트럼프 재선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나는 또 내가 그렇게 충격받은 것에 놀라고 있다.

2022년 3월 8일, 코로나 검사를 받고 내가 받은 결과는 판정불가. 확진자 셋은 각각 자기 방을 차지하고, 나홀로 거실에 매트를 깔고 누워 개표방송을 보던 밤, 12시 반에 이재명에서 윤석열로 1위가 뒤바뀐 것을 보고 어째, 깜빡 졸았다가, 2시 반. 여전히 1위가 윤석열이고 어쩌면 윤석열이 당선된 줄 모른다는 예감은 내 목의 통증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때 알았다. 대통령은 윤석열이 될 것이고, 나는 코로나라는 걸.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했다. 이럴 수가. 미국 대선 뉴스를 그렇게나 꼼꼼히 챙겨보아서 당신은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에요,를 말하게 하던 1인은 이번 민주당 선거 전략 중 하나가 '여성 최초의 미대통령'이었다는 수식을 사용하지 않는 거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쩌랴. 사람들은 호감형의 해리스가 아닌 막가파 트럼프를 택했다. 해리스가 더 강한 모습으로 선거 전략에 임했다면 달랐을까. 해리스의 강한 버전 힐러리도, 트럼프에게 졌다. 트럼프를 이겼던 건 바이든 뿐이다.

남성의 53%가 트럼프를 지지하고, 여성의 53%가 해리스를 지지했다고 하니 더 많은 여성의 각성이 필요한 듯 보이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민주당 지지 성향의 흑인, 히스패닉계 남성들이 트럼프를 지지했다는 통계는 '남성 신화'의 견고함을 확인시켜 주는 예가 될 것이다. 남성은 되고 여성은 안 되는. 설사 그 남성이 흑인이라 할지라도 남성은 되고, 여성은 안 되는.

『사피엔스 : 그래픽 히스토리 Vol. 2 문명의 기둥』에서 법, 인권, 신, 국가, 기업, 돈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주관적인 것으로 역사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힘으로서 작동해왔다고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한 개인의 상상에 존재하는 주관적인 어떤 것이 아니기에 이를 '상호 주관적 실재'라고 일컬어지는데, 이는 많은 사람이 이러한 실재를 상상 속에서 공유하기 때문이다. 사피엔스가 역사 속에서 협력과 합의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 온 '상호 주관적 실재'를 '나 혼자' 믿지 않는다고 해서 외부 세계에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상상의 질서를 실제로 바꾸려면 수백만 명의 낯선 사람들에게 나와 협력하자고 설득해야 한다.(115쪽) 단시간에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내내 애용하는 이 사진은 장하준 교수의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앞면에 '친필' 인쇄문구이다.




사람들의 상호 주관적 실재 안에서 오랜기간,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그 중간 어디쯤이었다. 여성은 어린애와 같은 존재였고, 식민지 사람들은 열등하다는 이야기에 충분히 세뇌당해 자신이 정말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에 반대하는 새로운 상호 주관적 실재가 등장했고, 여러 가지 새로운 상호 주관적 실재가 제안되고 있다. 우리가 맞이하는 새로운 세상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늘봄학교는 저녁 8시까지 아이를 학교에서 맡아주겠다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아침 9시에 학교에 와서 저녁 8시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엄마와 아빠가 둘 다 회사에서 일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2021년 미국의 CEO들이 받은 보수는 일반 근로자 급여의 399배에 달했다. 왜냐하면 CEO들은 회사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너무나도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관적 실재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인가.

이런 주관적 실재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인가,라고 나는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의 일이, 어떤 사람의 시간이 다른 어떤 사람의 시간보다 399배나 중요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생애초기 10년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육아서에서만 확인되는 사항이 아니다. 그 중요한 생애초기의 많은 시간을 왜 텅 빈 교실에 남아 엄마, 아빠를 기다리며 보내야만 하는가.

이 문제의 핵심을 나는 '노동의 관한 것'이라 생각한다. 친구는 내 페이퍼의 결말은 자주 '기본소득'으로 간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리로 가고 싶은데 오늘은 거기까지는 못갈 듯 싶다.

일하는 것에 대한 환상을 깨뜨릴 수 있다면, 인간 존재의 가치와 평가가 노동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더 정확히는 그것을 생산성, 더 구체적으로는 '돈을 버는 일'에 한정하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가 맞게 될 '상호 주관적 실재'는 훨씬 더 나은 모습이지 않을까.











『포스트식민주의의 지리』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노동자를 위해 임금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에 가까운 존재이므로, 동물적 열정과 욕구 충족을 위해서는 생계가 유지될 정도의 임금만으로 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17쪽)

식민지의 원주민, 그리고 이제 노동자가 이들에 대한 자본가의 생각이 이러하다. 자본가의 실재이며, 그의 세계이다. 그 세계 속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없을까. 아니 그 세계 속에 아예 편입되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그것이, 스스로를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노동자'로 규정하지 않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주일에 몇 시간을 일해야 하나. 주 5일 근무제 도입이 본격화되기 직전, 신문은 매일 아침, 이러다가 나라가 망한다고 노래를 불러댔다. 내수성장의 황금시장이 열릴 것을 예상한 사람들은 그 때 당시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어릴 때 큰애가 좋아하던 엠마 시리즈에서 엠마는 수요일에는 집에 일찍 온다. 점심 먹고 바로 하교. 초등학교도 수요일은 전학년 5교시 하교다. 5교시 하교면 1시 40분. 수요일마다 아이를 위해 엄마, 또는 아빠가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해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상호 주관적 실재를, 왜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단 말인가.

여자라서 안 된다는 생각, 유색인종이라서 안 된다는 생각. 돈이 없어서 안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면 된다. 경제권력이 이미 정치권력의 상당 부분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지만(트럼프 당선으로 머스크 승승장부), 여전히 우리에겐, 시민들에겐 1인 1투표의 소중한 권리가 있다. 내가 원하는 상호 주관적 실재를 실현해 줄 정치세력을 찾아보아야 한다. 적어도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정치세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핵폭탄을 북한을 향해 쏘겠다는 정신 나간 정치 세력 말고.

덜 일하고 더 많이 놀 수 있게 해주는, 베짱이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세상.

개미들이 허리 펴고 쉴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세상. 그런 실재.

나는, 그런 실재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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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11-12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실재에 탑승합니다! 일단 내 안의 노동중심주의 철폐하고요, 그리고 돈이면 다되는 데…에 대한 희미한 욕구 잠깐 눌러놓고요, ㅋㅋㅋㅋ

사람들이 돈 주면 단발님처럼.. 책 읽고 사유할 거 같죠? 웅웅 근데 안그래요~ 노노~ㅋㅋㅋ 저 1세계에서도 피해의식에 둘러싸여 도찍한다 아입니까? (다만… 미국수준 한국수준 함께가고 있어서…ㅋㅋ) 어디에 가치 기준을 둘 것인가, 무엇에서 의미를 찾을 건가… 그거 묻는 사람 사라지면 소득 높아져도 더 나빠질 수 있다!! (확신에 참ㅋㅋㅋ)

개미들이여, 베짱이의 노래를 들어라 ㅋㅋㅋ

단발머리 2024-11-13 05:59   좋아요 1 | URL
미국의 도날드 찍으신 분들은 먹고 살기 점점 힘들어져서 도날드 찍으신 거 같구요. 근데 먹고 살기 괜찮은 동네에서는 무슨 일인지 ㅋㅋㅋㅋㅋㅋㅋ 너도 망하고 나도 망하고... 이런 그림, 이런 사진 난 진짜 꿈에도 생각 못 한...
도날드 윤석열 조합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할지... 아베는 벙커에서 구르더라. 윤석열도 골프 연습 말고 구르기 연습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11-12 13:09   좋아요 0 | URL
저는 그래서… 동일시에 대해 천착 중입니다.. 프로이트여… 라캉이여…

단발머리 2024-11-12 15:14   좋아요 1 | URL
나는 뭐, 천착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제밤에 읽은 책에 프로이트 이야기 나오더라구요.
칫솔에 치약 짜 주는 사람이 있었대요, 프로이트는 ㅋㅋㅋㅋㅋㅋㅋ 메롱!

공쟝쟝 2024-11-12 20:10   좋아요 1 | URL
프로이트 구강암으로 사망했는데 치약에 뭐 섰은 거 아닙니까? 진상규명! ㅋㅋㅋㅋ 치약은 내가 짜자!

단발머리 2024-11-12 21:34   좋아요 0 | URL
하인이나 해주던 일을 마누라 시키더니만 ㅋㅋㅋ 가정 내 폭군, 프로이트 구강암의 비밀; 곧 밝혀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