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 헤이즐우드의 책이다. 가장 강력한 뱀파이어 의원의 무남독녀와 늑대인간 무리 알파와의 사랑 이야기인데, 로미오와 줄리엣, 계약 결혼 중 사랑에 빠지는 설정 등이 스토리의 바탕이다. 아무리 그래도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냐. 여남이 이리도 다르고, 이리도 서로를 모른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부자연스럽다. 나는 초인적 능력의 늑대인간보다 어리숙한 인간 애덤이 더 맘에 든다. 헤이즐우드 책을 딱 한 권만 읽으시겠다면, 당연히 <The Love Hypothesis>(사랑의 가설)를 권하고 싶다. 아니, 권한다.
예전에 사 둔 책을 이제야 읽는다. 오디오북이랑 같이 읽으니, 생각보다는 진도가 잘 나간다. 단어는 쉽고 문장은 짧다. ‘여성 과학자 이야기’ 라는 사실 외에 책의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시작해서 그런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놀랄 일이 한가득이다. 여러 부분에 줄을 그었지만 이 페이지를 옮겨본다.
대화가 통한다는 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친구의 말을 이해한다는 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똑똑한 사람이 똑똑한 사람을 알아본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엘리자베스의 지적을 캘빈이 알아듣는다는 것, 엘리자베스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캘빈이 알아본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캘빈은 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말대로 사람들은 모른다. 사람들에게 엘리자베스는 캘빈의 ‘예쁘장한’ 새 여자친구일 뿐이다. 젊고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똑똑하고 나이든 남자를 넘어서는 일은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경우라면, 더욱 더.
이 책을 빌려오기는 했는데, 너무 어마어마하기도 하고, 기한 내에 다 읽을 자신도 없어서 목차에서 두 챕터만 읽기로 했다. 먼저, <11장 : 비전체 또는 성적 차이의 존재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맞짝이 ‘성적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라캉의 주장까지는 이해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철저하게 개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적으로 구분된 맞짝에 의지했다는 것도. 문제는 이 문장이다.
종은 재생산할 수 있는 단위를 의미하기에,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은 두 젠더로 이루어졌다”(1337쪽).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인가. 라캉을 읽는 혹은 라캉을 읽은 지젝의 결론은 무엇인가. 1338쪽과 1340쪽.
성적 차이는 단지 인간이라는 유/젠더의 보편성에 종속된 특수한 차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 자체의 보편성 자체 속에 기입되는 보다 강력한 지위를 갖고 있다. 이 차이는 보편적인 종 자체의 구성적 특징이며, 역설적이게도 그 때문에 자신이 구분하는 두 개념보다 (논리적으로/개념적으로) 앞선다. "아마 한 성을 다른 성과 떼놓고 있는 차이는 이쪽 성에도 또 저쪽 성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다." (1338쪽)
따라서 성적 차이는 궁극적으로 양성 간의 차이가 아니며 각각의 성의 정체성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그것을 불가능성의 표시로 낙인을 찍는 차이이다. 만약 성적 차이가 양성 간의 차이가 아니라 각 성을 내부로부터 절단하는 차이라면 양성은 도대체 어떻게 서로 관련을 맺을까? 라캉의 대답은 '무관심'이다. 아무런 관계도 없다. 성적 관계는 없다i n'y a pas de rapport sexuel. – 양성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1340쪽)
성적 차이가 인간이라는 종 자체의 보편성 안에 이미 기입되어 있는 것으로, 성적 차이가 양성 간의 차이가 아니라면, 양성은 도대체 어떻게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단 말인가. 라캉이 말한다. 무관심. 무관심? “아무런 관계도 없다. 성적 관계는 없다.” 그 유명한 ‘성적 관계는 없다’가 이런 맥락에서 등장할 줄이야.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남성과 여성만 존재한다는 이야기일까. 결국 내가 욕망하는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뜻일까. 그렇다면 성적 관계를 맺을 수 없지. 관계란 두 대상간의… 그런가, 그럴까.
라캉 때문에 졸린 오후, 아니 지젝 때문에 잠이 쏟아지는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