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일루즈의 사랑의 사회학 시리즈는 『사랑은 왜 불안한가』, 『사랑은 왜 아픈가』, 『사랑은 왜 끝나나』의 세 권이다. 『사랑은 왜 아픈가』는 인간의 감정 중 극한의 지점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을 시도했다.
사랑(특히 이성 사이의 사랑)이 소설의 주제가 되면서 ‘사회적 이동성’이라는 주제와 밀접하게 맞물린다(25쪽)는 지적이 새롭다. 이전 세대와의 비교가 필요할 텐데, 저자는 오스틴 여주인공들의 자아가 현대 여성의 자아에 비해 남자의 시선에 훨씬 덜 의존적(55쪽)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사회 네트워크로서의 연애’라는 틀 속에서 여성이 훨씬 더 자유로웠다는 것인데, 구애자인 남성이 예비 장인과 장모뿐 아니라 구애의 대상인 여성에게 철저한 ‘심사의 대상’으로 존재했으며, 연애의 과정 전체를 ‘여성’이 통제(64쪽)했음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결혼 시장의 확대는 이러한 문화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배우자 선택의 기준이 개인주의화한 것과 공동체의 도덕구조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두 가지 새로운 기준이 개선행진을 벌여온 데서 분명히 목격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감정적 친밀함과 심리적 합의'가, 다른 한편으로는 '성적 매력의 발산’이 그것이다. (86쪽)
계급, 즉 집안과 재산, 평판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예전에 비해 그 중요성이 급격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호감을 느끼는 자아’, 그 자아가 경험하는 ‘특별한 감정’ 그리고 도처에 발산되는 ‘성적 매력’이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남성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주장한다. 감정적으로 대등한 관계, 특별히 연애 과정에서 주도권을 쥐었던 여성이 결혼 시장의 등장과 ‘섹스 해방’의 기치 아래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대 이전의 남성과 여성은 적어도 감정적으로는 어깨를 나란히 했다. 반면 자본주의 경제에서 재산과 자본 흐름의 대부분을 통제하는 쪽은 남성이다. 이로써 결혼과 사랑은 여성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생존과 직결되었다. 이어지는 두 장에서 논증하겠지만, 결혼시장이 불러온 이런 탈규제화는 섹스 분야를 통제한다는 새로운 형태의 지배권을 남성이 잡도록 방조했다. (109쪽)
<권력의 고정 틀 깨기>에서는 문화적 세계관의 하나인 페미니즘으로 사랑의 문제를 연구한다. ‘대칭성’에 대한 부분이 흥미롭다. 대칭성이라는 축을 따라 애정 관계를 조직하는 새로운 원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성희롱’이라는 것인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 데이브 캐스와 석사과정 졸업생 클라우디아 스타셜의 관계를 조망한다. 학교 당국은 학사과정 학장 후보에 오른 캐스의 이전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들(캐스와 스타셜)은 비대칭적 관계를 비판하는 페미니즘의 규범을 여러모로 침해했다. 이 규범에 따르면 서로 애정을 나누는 사람들이 이루는 관계의 쌍방 사이에 현저한 권력 차이가 성립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다. 이런 틀에서 본다면 비대칭적 관계는 일종의 추행과 다르지 않다. 서로 합의했다는 게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불가능해 보인다. 대칭적 관계란 평등과 선택의 자유를 나타내는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데이브와 클라우디아는 연령대에서 큰 차이가 난다. 데이브는 클라우디아보다 25세나 많다. 또 대학교에서 권력지위가 서로 달랐다. 즉 데이브는 교수고 클라우디아는 제자였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비대칭적 관계였다. (333쪽)
역시나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The Love Hypothesis』.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썼을 때 많은 분들이 남자 주인공(애덤)이 교수, 여자 주인공(올리브)이 박사 과정 학생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우려’를 표시했다. 작가는 그 부분을 ‘희석’하고자 여러 장치를 마련해 두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설정의 의미가 가벼워질 수는 없다.
두 사람 모두 미혼(구체적으로는 사귀는 사람도 없는 상태의 미혼)이고, 두 사람의 나이 차가 8살밖에 안 되고, 올리브는 애덤의 제자가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fake relationship이었음에도 애덤의 여자친구가 된 이후, 올리브는 실험실의 여러 사람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올리브의 다음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애덤의 친구였다. 컨퍼런스를 위해 급하게 방을 구해야 했을 때 도움을 준 사람도 애덤이고, 컨퍼런스에서 발표할 슬라이드를 봐주는 사람도 애덤이였으니, 애덤이 소유한 지식/지위/권력/돈/시간이 올리브의 삶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작가는 이를 상쇄하기 위해 애덤을 한없이 ‘소극적인’ 사람으로 그리는데, 그는 예전부터 올리브를 마음에 두고 좋아했지만, 그녀가 같은 과에 속한 대학원생이라는 점 때문에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지 '못' 했다. 말 그대로, 속앓이.
다만, 올리브는 애덤의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한 채 그와 사랑에 빠지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솔직하게 반응한다. 관계의 시작과 진행, 그리고 끝을 조정하는 사람은 애덤이 아니라 올리브다. 애덤 앤 올리브. 올리브 앤 애덤.
10년도 이전 일인 거 같은데, 아이들이 방학하기 전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가 며칠이나 이어지던 어느 날, 학교에 가려고 나서는 큰아이에게 말했다. 어쩜 좋니, 오늘도 많이 더울 거 같은데. 오늘도 잘 지내고 와. 큰아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우리는 에어컨 있잖아요. 이렇게 더운데, 엄마는 혼자서 어떡해요.
엄마, 아빠, 동생, 나, 친정 식구 네 사람은 모두 더위에 강하다. 우리는 추위에 약한 종이다. 시댁 식구 네 사람은 모두 추위에 강한 종이다. 그러나, 더위에는 어마 무시하게 취약하다. 아이들은 둘 다 시댁 식구들을 닮아 더위에 약하다. 나는 덥지만, 덥지 않다. 어느 경우든, 더위는 참을 만하다. 자기가 더울 때 힘든 것처럼 엄마도 더울까 걱정해주는 아이 맘이 참 기특했다.
오늘 아침. 종일 비가 오나, 기온은 몇 도까지 올라가나 앱을 확인하다가 아이가 오늘의 습도를 알려줬다. 95%. 오전 7시, 서울의 습도가 95%였다. 아이가 집을 나서면서 말한다. 엄마, 우리 가고 나서 꼭 에어컨 켜요. 너무 힘들어. 아이는 바뀌지 않았다, 착한 마음. 높은 습도에 엄마가 자기처럼 힘들어할까 봐. 엄마는 괜찮아. 나도 집에 안 있을 거야. 걱정 마.
착한 마음 고맙다. 마음만은 잘 받겠다. 그러나, 나를 걱정하지 마라. 나는 시원하게 안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