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칭적 관계





 













제인 오스틴의노생거 사원』을 읽었다. 예전에 『노생거 사원』을 읽은 직후, 나의 오스틴 랭킹은 오만과 편견 > 노생거 사원 > 설득 > 엠마 > 이성과 감성 순이었다. 다른 작품들은 모르겠지만 노생거 사원이 진격의 2인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줄거리는 모두 다 알고 계시는 대로이다. 특히 이 책은 <작품 해설>에서 역자가 제인 오스틴의 작품 중에서 이 소설이 차지하는 의의와 의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줄거리도 상당히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서 미리 줄거리를 알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줄거리를 알고 싶어서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고. 사건과 사고와 말과 행동, 몽상과 행동에 대해 알기 위해, 기쁨과 슬픔을 같이 느끼기 위해 읽는 것이니. 이 책은 유쾌하고 발랄하고 재미있는 한 시간을 확실히 보장해준다.

 


주인공 캐서린은 이제 막 열일곱 살, 한국 나이로는 고딩 1학년이다. 이웃 앨런 부부의 초대로 유명 휴양지인 바스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게 된다. 친구가 된 이저벨라 소프와 캐서린에게 호감을 보이는 존 소프와의 관계도 흥미롭지만, 캐서린은 첫눈에 반한 헨리 틸니씨와 좀 더 친해지고 싶다. 그러나.

 


틸니 씨는 여전히 그들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캐서린에게 춤을 신청했다. 춤을 신청 받은 것은 더없이 기쁜 일이지만, 여자 쪽은 매우 속이 쓰렸다. 거절할 수밖에 없어 슬프다는 표현을 그야말로 여실하게 해서 바로 나타난 소프가 삼십 초라도 일찍 왔더라면 그녀가 좀 심하게 속상해하지 않나 했을 정도였다. 기다리게 했네요, 하는 소프의 말은 너무 쉽게 나와서 이렇게 일이 꼬여 쓰라린 속을 조금도 풀어 주지 못했다. (68)

 


젊은 여성이라면 기로에 선 이 순간의 우리 주인공에게 공감할 터이니, 그들도 이와 같은 마음의 동요를 한두 번은 경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피하고 싶은 남자가 따라다니거나 적어도 그렇다고 믿은 적이 있을 것이고, 또 마음에 드는 남자의 관심을 얻으려고 안달해 보았을 것이다. (94)

 

 

캐서린은 친구 이저벨라의 오빠 존 소프와 춤 선약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도회장에 도착하자마자 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춤 신청이 없어 자리를 지키는 처지가 되어버린 캐서린은 상당히 난감한데 마침 틸니 씨가 춤을 청하는 것이다. , 그런데 어쩌죠. 저는 선약이 되어 있어서쓰라린 마음을 안고 캐서린은 이제서야 자리로 돌아온 존과 춤을 춘다. 내 춤은 존과 함께, 내 마음은 틸니에게. <작품 해설>에서 역자는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직접적으로는 잘 표출되지 않는 작가의 생각이 거의 날 것 그대로(340)’ 드러났다고 썼는데, 두 번째 문단이 작가의 속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캐서린의 마음이 그렇다. 피하고 싶은 남자는 부지런히 나를 따라다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관심을 얻어야 하기에 내 마음도 분주하다. 긴박하게 바쁘다.





 














『사랑은 왜 끝나나』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자본주의가 개인의 사적 영역에 침입해 들어옴으로써 이 영역의 규범적 원리를 어떻게 변형하고 무너뜨렸는가?’(23) 라고 저자는 썼다. 에바 일루즈의 말을 옮겨본다.

 


제인 오스틴은 자신의 소설 『노생거 수도원』(1818)에서 등장인물 헨리 틸니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한다. "남성은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이점을 누리는 반면, 여성은 오로지 거부의 권리만 가진다." 남성이 자신이 구애할 상대를 골랐다면, 여성은 이런 선택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를 결정한다. 여성이 받아들이는 선택을 하면 감정을 서로 교환하며 소통을 나누는 통로가 열리며 구애는 연애로 바뀐다. 여성이 자기 욕망의 주체일 수 없고,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 고착될 수밖에 없는 사실은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이분법을 기초로 한다. 여성을 항상 수동적 위치에 세우는 구애의 형식은 이런 이분법 때문에 생겨난다. 실존적 확실성은 구애의 형식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당사자 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인지할 때 비로소 생겨난다. 즉 계급 차이와 젠더에 따른 역할을 명확하게 인정하는 자세, 곧 이런 차이와 역할은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자세로 자기 자리를 확인하는 감정이 실존적 확실성이다. (『사랑은 왜 끝나나』, 73)


 

남성의 구애와 여성의 선택. 소통의 통로가 열리며 구애는 연애로 바뀐다. 남성은 거절의 두려움을 무릎 쓰고 구애해야 하며, 여성은 거절을 통해 원치 않은 상대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남성은 한 번 거절당한 상대에게 더 이상 구애할 수 없으며, 여성은 남성에게 교제를 청할 수 없다. 남성은 구애하려는 여성이 자신에게 일말의 관심이 있는지 관찰해야 하며, 여성은 좋아하는 남성의 애정을 북돋아야한다. 일루즈는 전근대의 구애 과정과 자기 결정권이 확장되어 가는 감정 중심의 근대를 비교한다. 성적 자유, 소비문화의 확산, 그리고 자본주의의 얽힘을 풀어간다. 자세한 내용은 다 읽은 뒤 정리하기로. (하려는데 자신은 없다)

 

 


인간성 탐구의 역사적 획을 그으신 제인 오스틴님답게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 남녀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소프 가의 남매 존 소프와 이저벨라 소프이다.

 



새로운 칭찬은 하나도 개발하지 못했지만, 그녀(캐서린)는 그(존 소프)가 내세우는 것은 무엇이든 앵무새처럼 되풀이했고, 결국 그들은 그의 장비가 잉글랜드에서 가장 완벽하고 그의 마차가 가장 깔끔하며 그의 말이 가장 잘 달리고 그가 최고로 솜씨 좋은 마부라는 점에 어려움 없이 합의했다. (81)


 

"아니, 전혀. 그렇지만 네가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파트너를 바꾸는 게 낫겠지."

"그것 봐요." 이저벨라가 소리쳤다. "동생이 하는 말을 들으시고도 신경을 안 쓰실 건가요? 그렇담 바스의 모든 노부인들께서 난리법석을 떨어도 제 잘못은 아니라는 것 기억하세요. 캐서린, 제발 내 곁에서 나를 지켜 주렴." 그러고는 이전의 춤자리로 복귀하기 위해 그들은 가 버렸다. (72)

 


두 사람은 각각 잘난 체하는 남자의 전형과 내숭 9단 여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활약은 너무나 눈부셔서 이 사람 때문에 어이없다 싶으면, 저 사람 때문에 피식 웃게 되고, , 이건 아니지 싶다가도, 이건 또 뭐야,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무슨 덤앤더머 경쟁도 아니고 이게 웬일인가 싶은 정도다. 두 사람을 똑같이, 똑같은 무게로 야무지게 망쳐놓는 제인 오스틴의 글 솜씨에 점점 더 빠져들면서, 필시 두 사람의 모델은 실존 인물이었을 거라 하는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덤앤더머 경쟁은 책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닌 듯싶고. 그렇게 나도 모르게 현실의 덤앤더머를 떠올리게 된다. 저는요. 정치 끊었어요. 뉴스도 안 보고. 포털 기사도 안 읽는다고요. 근데, 어떡해요. 덤앤더머 경쟁 실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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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0-06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단발머리 님. 정말이지 재미있고 기분 좋게 잘 읽고 있었는데 이렇게 마지막에 사진으로 테러하시기 있긔없긔 ㅠㅠ
아 또 딥빡이 올라오네요 ㅠㅠ

단발머리 2022-10-06 10:00   좋아요 0 | URL
저도 어제밤에 사진 올리면서 ㅋㅋㅋㅋ 우리 제인 오스틴님 페이퍼에 누가 될까 약간 고민하다가 문맥 상 그냥 올렸는데 좀 그르죠? ㅋㅋㅋㅋㅋㅋ 며칠 있다 내릴까봐요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10-06 10:1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뇨, 뭐 내리실 필요 있겠습니까. 무릇 인간의 삶이란 다 연결된 것 아니겠습니까. 아름다운 문학도 있고 현실의 정치도 있고.... 하하하하하.

단발머리 2022-10-06 10:13   좋아요 1 | URL
우리네 삶이란 게 그런 거라는 거 알면서도 미사일을 자국 내 영토에 쏘아대는 정부 밑에서 살다 보니… 그냥 책 읽을까 봐요. 책이라도 읽어야 현실을 잊지요. 허허허.

난티나무 2022-10-07 05: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엇 저 바로 오늘 에바 일루즈 <사랑은 왜 끝나나> 73쪽 읽었는데요!!!! 읽다 만 <노생거 사원>도 얼른 읽어야 겠어요~^^

단발머리 2022-10-07 08:22   좋아요 1 | URL
저는 지금 일루즈 책 밀려있고요. 아니 에르노 월드 펼쳐졌습니다. 넘나 팔랑귀인 저는 어쩜 좋단 말입니까? ㅋㅋㅋㅋㅋㅋㅋ
<노생거 사원> 읽기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