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임신중지를 단속한다. ‘임신중지 금지’를 대놓고 말하지 않되, 임신중지의 경험과 그 결과라는 각본에 따라 공유된 의미에 반反임신중지 정서를 심는다. 이를테면 ‘여성이 임신중지 뒤에 깊은 슬픔과 수치심을 느꼈다‘는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임신중지는 본래 애통함과 수치를 야기하는 절차로서 자리매김한다. 이는 여성이 간절히 원한다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는 생각과 분명 양립하지만, 한편으로 임신중지를 하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경고가 되기도 한다. - P10

페미니스트들은 젠더를 탈자연화하려는 정치적 책무를 안고 재현 방식에 주목하며, 그럼으로써 사회에 굳게 뿌리박힌 젠더역할과 이에 새겨진 불평등을 수면 위로 올린다. 페미니즘의 접근대로라면 여성이란 생물학적으로나 신경화학적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여성을 묘사하는 행위 안에서 구성된다. - P23

제니퍼 키스에 따르면 여성은 몇 가지 감정 조절 기술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요구되는 감정 각본의 틀에 맞추어 낸다. 예를 들어 반임신중지 진영의 여성은 태아를 아기로 인격화할 것이다. 반면 프로초이스 진영의 여성은 배아, 태아, 혹은 세포조직이라 여길 것이다. 임신중지에 관한 상반된 내용의 감정 각본들이 공존하는데, 그 어떤 각본도 여성의 임신중지 경험을 자동적으로 프로그래밍하지는 못한다. - P24

임신중지에 관한 사회적 우려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모성을 둘러싸고 생겨난다. 임신중지는 수행적으로 재현된다. 이는 단순히 임신중지 여성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젠더화된 주체로 만드는 방식이다. 젠더는 과정으로 나타날 뿐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끝없는 반복과 유지를 필요로 한다. 임신중지의 재현은 젠더를 형성하고 재형성하는 수단이다. - P25

오늘날 임신중지와 임신을 묘사할 때 일반적으로 배아를 태아 혹은 생존 가능한 태아, 출생 전후의 태아, 심지어 아기와 한데 묶는다. 배아는 임신 8주차에 들어서야 태아가 되는데도 말이다. 임신중지가 대부분 임신 3개월 내에 일어나며, 약물에 의한 임신중지가 늘면서 임신 9주차 전에 행하는 매우 이른 임신중지건수도 증가하고 있다. 배아나 태아의 생명이 지니는 의미시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체외수정 과정에서 일어나는 배아 폐기는 임신중지와는 다르게 취급된다. 임신한 여성의 의도·행동이 두 경우에 서로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임신중지의 경우, 배아는 재생산을 의도하지 않은 채 성관계를 하고, 출산 이후에도 양육을 원치 않는 여성에게 착상되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같은 배아 폐기라도, 냉동고에 보관된 배아는결과적으로 모성을 의도한 과정의 산물로 간주된다. - P27

선택이라는 수사는 임신중지 의제에 따라 붙을 때부터 비판받아왔다. 임신중지가 여성의 선택 문제로 환원되면 순전히 개인적인 결정처럼 보일 수 있다. 여성이 임신해 엄마가 되든 임신중지를 하든, 그런 일은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성이 임신과 양육에 대해 내리는 결정과 그에 따른 결과는, 젠더·계급·인종 같은 요인 때문에 그 여성이 어떤 선택에 다가갈 수 있으며 어떤 선택에서 멀어지는지, 더 넓게는 선택이 사회·문화적으로 어떻게 의미화되는지와 떼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문제를 선택의 자유로 축소해 버리면 임신중지를 우리 시대의 도덕적·사회적·정치적 이슈로 만드는 사회·정치의 요인이 흐릿해진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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