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소설을 생각한다
웹소의 미덕


 

이 글은 웹소설보다는 로맨스물에 대한 것이다. 나는 네이버 연재로 웹소설을 딱 하나 읽어봤는데(이름도 기억 안 남), 무료로 공개되는 것이었다. 수요일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에 새 글이 올라왔는데, 아이들 수영장에 집어넣어 놓고 수영장 앞쪽 의자에 앉아, 쉬지 않고 새로고침을 누르다가 ‘New’가 뜨면 반갑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야한 장면도, 충격적인 장면도 별로 없어서 좀 싱거운 느낌이기는 했는데, 기다리고 읽는 시간은 마냥 즐거웠다. 그 후로는 웹소설을 읽지 않았던 듯하다.









 









로맨스물에도 유행이 있는 것 같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주 독자층인 여성의 입맛에 맞게 변형되지 않나 싶다. 이를테면, 2000년 작품이고 최근에 드라마로 만들어졌던 브리저튼 시리즈같은 경우 팽팽한 긴장감이 돌던 남녀 주인공의 상황이 단번에 정리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게 바로 첫날 밤이다. 성 경험이 다분한 남자 주인공이 성 경험이 전혀 없는 여자 주인공을 정복하는과정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남주는 섹스를 주도하고, 곤혹스럽고 당황해하던 여자 주인공은 섹스의 즐거움을 깨달아가는순간이 이어진다. ‘가르쳐주는남주와 배우는여주의 대조가 극명하다.

 




반면 내가 느끼기에 최근의 로맨스물은 남주의 신화화에 목적이 있는 듯하다. 이렇게까지 완벽한 남자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주는 여성들이 기대하는완벽한 남성의 모습이다. 일찍이 하지원, 현빈 주연의 <시크릿 가든>을 보면서 내가 현빈이 아니라 작가 김은숙에게 빠졌던 이유와 같다. 말하는 사람은 현빈이지만 그의 말을 만들어주는 사람은 김은숙이고, 김은숙이야말로 내가 듣기 원하는 말을 '해주는사람이기 때문이다



로맨스물에 등장하는 남주들의 특징을 비교적 최근에 읽었던 『The Love Hypothesis』Adam, 『The Hating Game』Joshua, 『People we meet on vacation』Alex, 『Beach Read』Gus, 『Book Lovers』Charlie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1. 그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난다.

 

인간이라면 모두 냄새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씻지 않으면 (나쁜) 냄새가 나고 씻으면 좋은 냄새가 난다. 하지만, 로맨스물 속의 남주에게서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난다. 좋은 냄새난다.

 

2. 그는 운동광이다

 

아침에는 달리고(아담), 저녁에는 헬스장(조슈아)에 간다. 근육이 발달해 있고, 힘이 어마어마하다. 맨손으로 트럭 민다(아담). 세상에 이럴 수가.

 

3. 그는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다.

 

유기농 재료를 냉장고에 상시 준비해두는 건 기본이요, 야채 썰기에도 능하다.(조슈아) 뚝딱! 오물렛을 만들어내는데, 게다가 맛도 좋다. 이런 남자를 누가 마다하리오.

 

4. 그는 예전부터 당신을 좋아했다.

 

사랑에 빠진 후, 그걸 알게 된 이후에 그가 고백한다. 사실 난 너를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좋아했어. (조슈아) 나는 3년 전부터 너를 좋아했어. (아담) 나는 10년 전부터, 아니 10년 동안 계속 너를 사랑해 왔어(알렉스). 이 정도면 거의 계 탔다고 보면 되겠다. 최근 표현으로 하자면, 로또 1. (참고로 저번 주 로또 1등 당첨자가 50명이어서, 1등 실수령액이 3 2천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5. 그는 committed long-term relationship을 원한다.

 

난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원나잇 스탠드의 만족도가 여성보다 높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진화 심리학은 수천 년 동안의 진화과정에서 양육의 책임을 우선적으로 맡게 되는 여성이 파트너 선정에 까다로운 성 전략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가부장제의 창조』에서 남녀 간의 이중적 성 관념이 여성 억압에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읽어보았던 1인으로서, ‘바람둥이의 실재를 옹호하는 과학의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통념은 그렇다. 남성은 성적 매력에 근거한 일회적 관계에 더 큰 관심이 있고, 여성은 자신과 태어날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충실한 관계에 더 큰 관심이 있다고 말이다.

 


로맨스물에서 여주는 하룻밤을 외친다. 이번 한 번만, 하룻밤만. 딱 오늘밤만. 남주는 여주의 제안을 외면하고, 섹스 기회를 거절하며(조슈아), 크게 화를 낸다(알렉스, 거스). 남주가 외친다. 내가 원하는 건 너와의 즐거운 하룻밤이 아니야. 나는 너와의 committed long-term relationship을 원해. 과학적 설명과 사회적 통념의 반대 방향에 서 있는 남주.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그는 독자이며 작가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는여성 독자와, 독자를 겨냥해 그 말을 해 주는작가(대부분 여성). 여성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여성이 해주고 있는 모습. 여성이 원하는 모습의 남성을, 여성이 만들어가는 장르. 그게 어쩌면 로맨스일지도 모르겠다.

 


향이 그윽한 따뜻한 커피에 쿠키를 먹으며 이 글을 쓰고 싶었지만, 마음이 급해서 그러지 못했다. 어젯밤에 끓여 둔 보리차에 구운 감자 Slim을 먹으며 썼다. 독서괭님과 수하님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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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2-06-18 10: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잘 읽었습니다 ^^ 먼댓글이란거 참 좋네요.

로맨스 소설도 로판 못지 않게 비현실적이군요… 유기농 야채에.. 예전부터 사랑해 왔다니. (그동안 다른 여자도 만났을 거면서) 로맨스가 나온다고 해서 다 로맨스 소설은 아닌 것 같네요.

여성은 로맨스 소설, 남성은 포르노를 보고 있으니.. 이런게 동상이몽이란 걸까요?

단발머리 2022-06-18 10:24   좋아요 3 | URL
유기농 야채를 싹싹 썰어서 오물렛을 금방 만들어오는 남자가 있더라구요, 책에는요 ㅋㅋㅋㅋㅋㅋ 그동안 다른 여자 만났으면서 (만났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너를 계속 좋아했다, 그러대요.

여성이 원하는 바는 로맨스 소설에서, 남성들은 포르노에서 그리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하아.... 그 간극이 너무 크다고 할까요.
먼댓글은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이게 참 좋습니다^^

건수하 2022-06-18 17:14   좋아요 2 | URL
남성만 그런 건 아닌것 같은데,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이랑 만나고 섹스도 하고 (아마도?) 그런 마음을 전혀 이해 못하겠어요 :)

어쨌든 유기농 야채 썰어서 오믈렛 만들어오는 남자 멋집니다… (이래서 로맨스를 읽는 거군요)

공쟝쟝 2022-06-19 09:28   좋아요 2 | URL
수하님 천재인가요 ㅋㅋㅋ 이거네 ㅋㅋㅋ 여자는 로맨스 남자는 포르노 ㅋㅋㅋㅋㅋ 아 진짜 슬프다 ㅋㅋㅋㅋ 당분간 한국 남성성에 대한 연구에 천착을 해야겠어요. 어쩌다…. 저들이 저렇게 되었나….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만드는가…. 그 코어 중 하나에 분명히 포르노가 있을 거 같다는 예감 ㅋㅋㅋ 제게 권력이 생긴다면 페미니스트 보다 휴머니스트 적인 입장으로ㅋㅋㅋ 한녀들에겐 로맨스 금지를 한남들에겐 포르노 금지를 동시에 해야겠군요 ㅋㅋㅋ

독서괭 2022-06-18 10:4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와~~ 단발머리님 글 재밌어요!^^ 매우 동의합니다!
이건 거의 계 탄 거라는 말씀에 빵 터졌네요ㅋㅋㅋㅋ 로맨스물 여주들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죠 암요.
여성이 바라는 이상의 남주를 그리는 데 집중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별로 개연성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개연성이 인정되면 잘 쓴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브리저튼은 다락방님도 여러번 말씀하셨는데 읽어보고 싶네요!

단발머리 2022-06-18 11:28   좋아요 4 | URL
마음에 차는 사람, 내 맘에 맞는 사람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요. 친구든 연인이든 말이에요. 이 정도 남주면 ㅋㅋㅋㅋㅋㅋ 로또인데 두 주 동안 1등 없어서 한 30억 넘게 받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ㅋㅋㅋㅋㅋㅋ 근데 계 탔다는게 실질적으로는 더 크게 느껴지네요.

저도 독서괭님 말씀에 동의해요. 개연성을 얼마나 촘촘하게 만들어가는가가 젤 중요한듯 싶습니다. 일단 왕자님 만나기는 너무 어려우니까요. (왕자님들 적기도 하지만 유명한 사람들 대충 다 결혼) 요즘에는 친구, 직장 동료, 동종 업계 종사하는 사람 등으로 남주가 여주의 삶 가까이로 다가 오는 거 같아요.

브리저튼은 저도 2권까지 읽었는데 아주 재미납니다. 아니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그럼에도 선사하는 즐거움이 한 가득. 넷플릭스 드라마화된 이후 책이 다시 베셀이 되었다고 하대요. 저는 2편의 주인공 안소니역의 조나단 베일리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아합니다. 참고 부탁드려요^^

유부만두 2022-06-18 11: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테니스를 즐기는 그에게선 언제나 비누 냄새가 ….. 하지만 우린 이루어질 수 없죠. 왜냐고요? 그 새끼가 뺨을 때렸거등요. 그 넘은 그게 질투와 사랑의 표현인줄 알만큼 멍청했어요!

단발머리 2022-06-18 12:0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저 너무 웃겨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새끼 혹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테리우스 아니던가요? 캔디가 옛날 남자 이야기 하면서 우니까 잊으라고 빰 싸대기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놈 맞지요?

유부만두 2022-06-18 12:40   좋아요 1 | URL
아뇨, 젊은 느티나무 근처 사는 므슈 리 아들이에요

단발머리 2022-06-18 12:5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그 놈도 테리우스 못지 않네요 ㅋㅋㅋㅋ 허참 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2-06-18 1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참깨스틱 졸업하시고 감자 슬림으로 넘어가신 건가요? (우리집에 둘다 있어서 이 글을 느긋하게 읽었죠)

단발머리 2022-06-18 12:07   좋아요 0 | URL
저 이거 세일해서 한 통 샀는데 예감보다는 인기가 없어서 ㅋㅋㅋㅋㅋㅋ 제가 다 먹을 각입니다. 저도 느긋하게 먹으면서 썼지요.

유부만두 2022-06-18 12:39   좋아요 0 | URL
한번에 많이 먹기엔 참깨스틱 못따라가죠. 감자슬림은 목이 메이게 밀가루 맛이 나요. 많이 못먹으니까 슬림 인정합니다.

단발머리 2022-06-18 12:58   좋아요 0 | URL
그래서 두 개 밖에 못 먹었어요. 저의 최애는 꼬깔콘 군옥수수맛인데 지금 막 떨어져서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2-06-18 14:17   좋아요 1 | URL
그거도 우리집에 있다요!!!!! ㅋㅋㅋ

다락방 2023-02-09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사랑의 가설>에 대해 단발머리 님이 쓰신 글 차레대로 다시 읽고 있는데 이 글에 제가 좋아요를 안눌렀더라고요? 방금 누르고 갑니다.

단발머리 2023-02-09 11:15   좋아요 0 | URL
제가 7개를 썼더라구요 ㅋㅋㅋ 샅샅이 찾아서 꼭꼭 💕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