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징징거리는 글을 쓴 뒤
퇴근하면서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대신 나의 독서 길티 플레저 - 책에 관한 책 - 인 <평균의 마음>을 듣기 시작했다.
이 책의 장르는 굳이 따지자면 고전에 관한 독서 에세이이고, '저마다의 극단을 사는 현대인을 위한 책 읽기' 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작가는 이전에 <숙련자를 위한 고전노트> 라는 고전에 관한 에세이를 냈던 적이 있는데 (지금은 절판이다. 재밌었는데 왜 절판됐을까 아쉽..) 별로 겹치는 책은 없다.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 라는 독서 에세이도 냈는데, 여기에는 고전 외에 최근 소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아직 읽지 않았다)
운전을 하며 나의 길티 플레저를 즐기다 보니 비오는 날 밀리는 퇴근길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한스 로슬링의 <팩트 풀니스>에 대한 생각에 공감하면서 역시 이 작가만큼이나 나도 삐딱하구나 하는 생각도 하고 ㅎ
한참 듣다 보니 얼마전 읽고 싶어서 담아둔 제인 오스틴의 <설득> 이 언급되었다.
(민음사, 문학동네, 시공사... 무엇을 읽어야 할 것인가. 일단 검색했더니 민음사 판이 제일 위에 있어서 이걸로 넣음)
그리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동네, 라임 레지스(리지스라고 하기도 한다) 라는 곳이 귀에 꽂혔다. 제인 오스틴의 <설득>과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모두 이 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라임 레지스가 어디냐면, 그 유명한 영국의 화석 수집가 (많은 기여를 했지만 고생물학자 혹은 박물학자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메리 애닝이 공룡, 암모나이트, 벨렘나이트 등 화석을 무더기로 발견한 곳이다. 나는 어릴적 에이브 전집의 <바닷가 보물>에서 이 이야기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곳이 배경이라고? 귀가 쫑긋해졌다.
19세기의 오스틴이 당대의 라임을 수채화처럼 맑고 가볍게 그렸다면, 20세기 소설가 파울즈는 150년 전의 라임을 극사실주의 회화로 복원한다.
오스틴의 소설은 빅토리아시대의 평균적인 여성들보다 뛰어난 지성과 분별력을 갖춘 여성이 그에 걸맞은 훌륭한 남성과 결혼이라는 정박지에 안착하는 과정에서 겪는 사회적 충돌과 심리 변화를 섬세하고 매끄러운 문장으로 보여준다. 그에 비해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다윈의 <종의 기원>(1859)과 마르크스의 <자본론>(1867)이 출간되고 산업혁명이 본격적인 궤도에 접어들면서 철도와 공장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극도로 억압적이고 금욕적인 태도를 고수한 젊은 남녀들에게 실제로 가능했던 사랑은 어떤 양상이었는지를 꼼꼼하고 차가운 자연주의자의 시각으로 파헤친다.
- <평균의 마음> 1부, '인기있는 로맨스 소설의 비결' 중
오호. 제인 오스틴의 소설도 좋아하지만, 이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어떤지 궁금해진다.
요즘 책을 안 읽었다 했지만 지난주 토요일에는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웹소설 하나를 읽었다. (웹소설 치고는 제목이 별로 이상하지 않으나 별로 밝히고 싶진 않다 ㅎㅎㅎ 알라딘에서는 검색되지 않는다는 정도로만 남겨둔다) 전에 보던 웹툰이 있어 업데이트 되었나 카카페에 들어가보았다가, 캐시를 준다기에 무료로 한 편 보는 것으로 시작되어 끝을 보고야 말았던 것. 저번에도 그런 식으로 낚여서 결국 사서 본 적도 있는데.. 이젠 낚이지 말아야지.
웹소설을 읽다 보면 재미있고 시간도 참 잘 가는데.. 설정만 봐도 참 전형적이다. (나한테만 그런 소설이 낚인건지 모르겠으나) 보통 중세 배경에 귀족이고, 여자주인공은 예쁘고 똑똑하지만 가냘프고 몸이 약하고, 남자주인공은 돈이 많고 항상 출생 혹은 성장의 아픔이 있어 성격이 나쁘고 (...) 몸이 엄청나게 좋으며 보통 흑발이다. 임자가 있는 여자주인공에 들이대어 남자주인공과 갈등을 빚다가 내쳐지는 서브 남주는 보통 금발이고 멋대로 자란 도련님이다. 읽다보면 너무 뻔해서 잘 넘어가기는 하는데 페미니즘 책을 읽는 내가 이런 거 읽으면서 즐거워해도 되는거야? 하는 죄책감이 든다.
페미니즘 책이나 PC (politically correct) 한 성향의 책들만 읽다 보면 어느새 좀 지치고 우울해질 때가 있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부조리한 점이 많고 잘못되었고 내가 갖고 있는 의식의 이면에는 어느새 사회에서 세뇌된 것들이 많고.. 그런 것들을 (모르던 것도 있고 알다가도 또 잊고 살아가고 하는 것도 있는데) 자꾸 알려주는데 지적 자극이 되지만 어느새 무기력함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문학으로 좀 도피하기도 하는데 읽어야 할 책들이 쌓여있다 보면 도피가 어려우니 참다 참다 한번씩 (캐시도 준다고 하니까) 웹소설로 가고, 또 일단 그 길로 가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끝을 봐 버리는 것.
그러니까 막다른 곳에 몰리기 전에 그냥 소설도 좀 봐주고 영상물도 봐 주고 해야 하는데.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여러 독서모임에 매인 몸을 풀어 자유도를 높여줘야 할 것 같다..
인기 있는 로맨스 소설은 평범한 주인공에게 무지갯빛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우리의 평범성을 값지고 특별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던 흔한 인물이 사랑의 힘으로 단숨에 빛나는 별이 되는 것,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 남달리 사랑받는 것, 우리에게 설렘의 감각을 일깨우고 충만감을 안겨주는 로맨스 소설의 힘이다.
- <평균의 마음> 1부, '인기있는 로맨스 소설의 비결' 중
아, 그래서 로맨스 소설이 스트레스 푸는데 도움이 되는 것인가.
오스틴의 소설에서 인물들의 육체성은 매우 희미하고 낭만적으로 미화된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성적 언급을 금기시했던 빅토리아시대의 관습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 섹슈얼리티를 가리는 은밀함이야말로 성공하는 연애소설의 핵심 기술이다. ... 우리가 '사실들'로부터 달아나고자 할 때, <설득> 류의 소설은 가성비 좋은 연료가 된다. 우리는 우울한 각성 대신 망상 속에서 조금 더 오래 둥실거릴 수 있다.
- <평균의 마음> 1부, '인기있는 로맨스 소설의 비결' 중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어떤가 하면
최종 목표가 결혼인 이야기보다는 실험가의 무정함으로 주인공 남녀를 사랑의 여러 경계들 끝까지 몰아붙이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연애의 본질을 더 깊이 사색하게 하는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 19세기에 불시착한 시간여행자처럼 보이는 사라는 자기 시대로부터 빠져나오려고 필사의 생존 투쟁을 벌인다. ... 약간은 사랑이었을 수 있고 일말의 의무감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라를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이게 한 힘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존재'로 살아가고자 하는 독립심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 <평균의 마음> 1부, '인기있는 로맨스 소설의 비결' 중
<설득>과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모두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수은의 글을 보면 요즘 나의 성향상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더 흥미로워 보이지만, 내가 또 스트레스 쌓이면 웹소설도 읽는 사람이니까.. 그건 읽어봐야 알겠지.
2017년에 읽었던 제인 오스틴의 중편 <레이디 수전>을 얼마전 다시 읽었다. <레이디 수전>은 제인 오스틴의 처녀작이고 그녀가 스무살일 때 썼다고 하는데, 이 책의 주인공 레이디 수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오만과 편견>이나 <이성과 감성>의 주인공들과는 좀 다르다. 아름답고 똑똑하고, 이성적이고 화술도 좋지만 레이디 수전은 남편이 병으로 죽은지 10개월만에 두 남성과 (한 명은 유부남이다) 스캔들을 일으키고 얼마 후 재혼하는 '악녀'이다. 보통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악녀 캐릭터는 끝이 좋지 못하지만 <레이디 수전>에서는 스캔들을 일으키던 두 남성 말고 다른 남성 (스포일러를 하고 싶지만 꾹꾹 눌러 참는다) 과 결혼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레이디 수전>은 작가가 사망한 후 반세기만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늦게 출판된 이유, 그리고 이후 제인 오스틴이 온건한 작품을 쓴 이유.. 빅토리아 시대와 20세기 모더니즘의 차이도 있겠지만 작가의 성별도 그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존 파울즈가 아닌 여성 작가가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썼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에서 메이브는 <레이디 수전>이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했다. 그녀가 내 마음에 쏙 드는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 발언 때문에 호감도가 더 올라갔었다. <레이디 수전>이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그 전에도 용기있는 작가들이 있었으리라 믿고 싶다), 지금 읽어도 흥미롭고 생각할 만한 지점이 많은 소설이다.
<러브 앤 프렌드쉽>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도 만들어졌었는데 (그래서 2016년쯤 전자책으로 번역이 되었었다), 이건 좀더 현대적으로 각색되어 색다른 재미가 있다.
음. 그래서.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페이퍼를 하나 더 쓰게 되었고, 기분도 좀 나아졌다.
길티 플레저라는 이름 말고 좀더 나은 이름을 '책에 대한 책'에게 지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