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문구, 정확하게는 내게 가장 흥미로운 문구다.
해러웨이는 위계와 지배의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여러 영장류 중에서 자신의 배우자를 동반한 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주장한다. 서구 유럽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고 있는 특별한 장소에 기반하여 동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60쪽)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서, 해러웨이는 그 시선이 ‘누구의 것인가’를 묻는다.
해러웨이가 보기에 그 시선은 백인, 서양 과학자의 시선이며, 원숭이와 유인원을 '거의 (남성)인간' 혹은 더 나아가 '기원적인’, '문화 이전의’, 혹은 '자연의’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조명한다. 다시 말하지만, 따라서 이 모든 것이 지식의 대상으로서 기입된다/만들어진다. 각 경우에 후자인 타자는, 자아이자 빛과 시각의 원천인 전자보다 열등하지는 않더라도 그것과 완전히 구별되며 부차적이라고 서술되지만, 두 쌍의 형상은 그와 연관된 이원론의 목록 전체와 마찬가지로 오직 상호의존적 위치로서만 의미를 만들거나 작동시킨다. 섹스/젠더, 자연/문화가 그런 이원론에 포함된다. 한쪽을 특정하거나 이해하는 일은 다른 쪽을 규정하는 매우 세부적인 사항과의 차이에 의존한다. 다른 것과 구별되며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위치 혹은 대상은 독특함과 우월성이라는 의미의 측면에서 부차적인것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보다 열등한 것, 즉 자원으로 낙인찍힌쪽 없이는, 보다 위대한 것, 문화의 비범한 특질인 쪽도 자신이 이야기하고 규정하는 것, 자신이 체현하고자 하는 것이 될 수 없다.(『도나 해러웨이』, 61-2쪽)
이성적이고 도덕적이며 문명을 이룩하는 주체(서구, 백인, 남성, 이성애자, 비장애인)에게는 감성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자연과 어울리는 대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인데, 상대가 어떠함을 규정함으로써 자신을 새롭게 ‘창조’했다는 점에서, 이는 동양과 서양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페미니즘 모토 중에 가장 ‘극단적’인 주장으로 알려진, 내가 보기에 가장 소박한(?) 것이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주장이다. 페미니즘에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라면, 아니, 그럼 여자도 사람이지! 언제 우리가 여자는 사람 아니라고 했어? 라고 반문할 것이다. 여자도 사람이다. 남자도 사람이고 여자도 사람이다. 남자처럼 여자도 사람이고, 여자처럼 남자도 사람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주장이 ‘여자’에게 적용될 때는 기이하게 변용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아니, 그래도 여자가, 그렇게 밤늦게 돌아다녀도 돼? 아니 그래도, 얘는 엄마가 키워야지. 아니, 그래도 여자가, 몰골이 그게 뭐야? 남자에게는 가능하고 당연하고 평범한 일들이, 여자에게는 불가능하고, 어렵고, 비범한 일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성 혐오 5천 년의 기나긴 역사는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또한 지속적으로 여성의 목소리가 억압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여자는 인간이되, 아직도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 했다.
‘미국의 인종 감별 잔혹사’라는 부제가 붙은 진구섭의 『누가 백인인가?』의 2장에서는 미국 사회에서 백인성, 백인됨이 사회적, 문화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이민 시대 초기 백인은 오직 ‘앵글로’와 ‘색슨’만을 의미했다. 독일인에 대해 반감이 컸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독일계조차도 순수한 백인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언론에서는 아일랜드 이민자를 원숭이, 야수, 술주정뱅이로 묘사했고, 동남부 유럽 이민자들은 견습 백인(probationary white),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백인 검둥이(white nigger), 그리스 이민자들은 기니아, 즉 검둥이로 불렸다. 유대인들은 검은 동양인, 하얀 검둥이(whiteniggers)로 불렸다고 한다(『누가 백인인가?』, 47쪽). 즉, 앵글로 족과 색슨족만이, 영국 이주민만이 가지고 있던 ‘우리’, ‘인간’, ‘백인’의 개념이 점차 다른 이민자에게까지 확대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중간 단계라 여겨져 노예 산업의 근간이 되었던 ‘흑인 남자’는 노예 해방운동의 중요한 축이었던 ‘백인 여자’보다 먼저 시민권을 획득함으로써, 먼저 ‘사람’이 된 경우이다.
사이보그는 인공두뇌 유기체cybernetic organism로,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이며, 허구fiction의 피조물이자 사회 현실 social reality의 피조물이다. 사회 현실은 삶에서 겪는 사회관계이자 가장 중요한 정치적 구성물이고 세상을 바꾸는 허구다.(『해러웨이 선언문』, 18쪽)
다시 제자리로. 심오한 역사적 폭과 깊이를 지녔어도, 젠더는 보편적인 정체성이 아닐 수 있다(『해러웨이 선언문』, 84쪽)는 해러웨이의 주장, 그리고 <반려종 선언>의 여러 주장을 고려해 볼 때, 그녀는 인간과 인간, 유기체와 기계, 인간과 동물간의 차이와 그 차이에 근거한 위계, 질서, 폭력이 온당하지 않으며, 그러한 그릇된 서열화는 ‘인간이 지구에서 최고의 존재’라는 잘못된 믿음, 더 구체적으로는 ‘서구의 백인 남성’이 이 지구 피라미드의 제일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다는 ‘비과학적’ 언설에 의해 지지받았다고 주장한다.
내가 개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개, 를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이한 원자의 독특한 결합으로 알고리즘에 따라 운영되는 ‘나’라는 존재 역시 유기체의 일종으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우리는 모두 사이보그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 것 아닌가, 추측해 본다.
너무나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며, 영장류에 속하나 ‘호모 사피엔스’임을 강조하며 살았던 한 명의 인간. 사이보그이며, 하이브리드, 모자이크, 그리고 키메라인 1인은 심히 괴롭다고 한다. 이제 팟캐스트 들으러 간다. 도움 받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