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타자를 생각함으로써만 자기 자신을 생각한다고 앞에서 이미 말한바 있다. 인간은 이원성의 기호 아래에서 세계를 파악한다. 이원성은 원래 성적 특성을 지니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을 동일자로 내세우는 남자와 다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타자의 범주에 분류되었다. 타자는 여자를 포함한다. 여자는 애초에 홀로 타자를 구현할 만큼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제2의 성』, 117쪽)
이런 주장은 자연스럽다. 세상을 나와 너로 구분하는 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궁금했던 건 주체와 타자로의 인식에서 남성이 자신을 주체로 인지한 데 반해, 왜 여성은 객체, 타자가 ‘될 수밖에’ 없었냐는 점이다. 여성은 왜 자신을 주체로 볼 수 없었는가. 여성은 왜 타자로서'만' 존재했는가.
인간을 정의하는 데 있어, 여전히 여성들은 불완전하고 주변적이어서 일종의 아종으로 규정되었다. 정치적으로 여성들은 ‘가상 투표권’이라는 빵조각이라도 대접받을 정도로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일단 어떤 문제가 사회 문제라고 규정되면, 그 문제를 정치 논쟁이나 투쟁에서 다룰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규정되지 못한 문제는 계속 침묵 당하고, 정치에 끼어들지 못한다. 남성의 규정 능력, 즉 무엇이 정치적인 문제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가를 규정하는 힘은 결국 여성들의 해방 투쟁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역사 속의 페미니스트』, 24쪽)
기나긴 여성 혐오의 역사 속에서 여성의 지위는 지속적으로 추락한다. 여성의 목소리는 지워지고 소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가 지워진 채 하나의 집단으로써 존재한다. 인간의 기본값이 ‘남성’인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여성은 그렇게 ‘타자’로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여성의 ‘2등 시민화’의 근거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찾을 수도 있겠다. 해제 속 정희진 선생님이 표현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위계적 세계관(28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위계적 우주 속에서 여성은 동물보다 우월하지만, 남성보다는 열등하며, 노예근성을 타고난 남자는 여자보다는 우월하지만, 자유롭고 자율적인 인격체를 가진 최상의 남자보다는 열등하다는 식이다. 위계적 우주 속에서 모든 개별 사물에게 각각의 자리가 지정되어 있을 때,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문화의 방식으로 사회를 지배할 때, 일개 개인이 그러한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아렌트가 접촉과 오염을 피하며 지성과 의지도, 욕구와 욕망도, 목적과 결과도 접촉하지 않은, 즉 절대적으로 무를 접촉하는 자유 공간 속에 행동을 두려고 한 데는 위험할 정도로 병적인 측면이 있다. (『남성됨과 정치』, 85쪽)
그리스 정치 속에서 이상향을 반드시 발견하고야 말겠다는 아렌트의 열정을 이해하지만, 웬디 브라운의 지적대로 그것은 이미 역사적 패배를 가정한 것이 아닌가 싶다. 관련된 책을 몇 권 찾아 놓았고, 자랑스러운 한나 아렌트 정치사상 세트는 구입했다. 도서관에 상호대차한 책도 받으려 가야 하는데 오늘도 못 나갈 듯싶다.
공허한 정치적 논의만을 이어가기에는 정치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 고결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맡겨 두기에는 정치가 우리 삶에 너무나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기도 하고, 혁명과 전쟁이 저문 이 세대에 변화란 결국 정치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테니 말이다. 대선, 이른바 정치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한나 아렌트만큼 중요한 우리의 대통령 선거. 마키아벨리 보다 중요한 대선 공약. 베버 보다 중요한 우리의 미래. 정치 그리고 우리의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