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스 갬빗의 엘리자베스 하먼은 사고로 부모를 잃고 여덟 살 나이에 보육원에 맡겨진다. 우연한 기회에 경비 아저씨 샤이벌에게 체스를 배우기 시작해 체스 두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베스는 열 두살 때, 휘틀리 부인에게 입양되어 보육원을 떠나게 된다. 우연히 체스 대회가 열린다는 걸 알게 된 베스는 아직 친하지 않은 휘틀리 부인에게 참가비를 내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베스는 보육원의 샤이벌 아저씨에게 편지를 쓴다. 아저씨, 1등에게 100달러를, 2등에게 50달러를 주는 체스 대회가 열린대요. 참가비 5달러를 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요. 아저씨가 돈을 보내주시면, 제가 대회에 나가서 상금을 받아 10달러로 갚을게요. 며칠 후, 연필로 주소가 쓰인 봉투가 배달된다. 봉투 안에는 5달러가 들어 있다. 메모도 없이.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베스에게 체스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자신에게 비상한 재주가 있음을 알고 있지만, 휘틀리 부인에게 자신의 재능을 증명할 수는 없다. 베스는 보육원의 샤이벌 아저씨에게 편지를 쓴다. 내게 체스를 가르쳐 준 사람. 내 재능을 알아봐 준 사람. 내게 두껍고 비싼 체스 교본을 사 준 사람. 그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베스의 마음, 베스가 의지하는 그 한 사람에 대한 마음이 전해진다. 과장되지 않으면서 진솔하게. 간절한 마음이 그대로.

 


한 달 전쯤에,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의 인터뷰를 들었다. (나는 민주당의 당원도 아니고 국민선거인단도 아니지만, 아무튼 이재명을 응원했다. 나는 이낙연의 품격보다 이재명의 개혁이 현재의 시대정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 인터뷰는 너무 흥미로웠다. 이낙연 대표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 부분에서, 이 대표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을 언급했다. 군대에서 갓 제대한 젊은 선생님은 오자마자 시험을 보고, 깡촌의 아이 이낙연의 머리가 비상함을 알았다. 그 후로는 아이 이낙연에게 반 친구들과는 다른 학습 기준을 제시하고, 이낙연의 공부량이 부족할 경우 체벌도 마다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반복해서 말한다. 너는 광주로 가야 해. 광주의 서중에 가야 해. 그리 (공부)해서 광주에 갈 수 있겠느냐. 그리해서 (너 같은 놈이) 서중 가겠냐? 동네의 고만고만한 친구들처럼 고만고만한 삶을 예상한 깡촌의 아이 이낙연에게 선생님은 새로운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그건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했고, 그래서 선생님은 박봉의 월급을 쪼개 매달 발행되는 수련장(참고서 플러스 문제집)을 구입해서는, 다른 아이들의 눈길을 피해, 밤에 1킬로를 걸어 아이 이낙연에게 건넸다는 것이다. 선생님,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선생님.  

 


















『학교의 슬픔』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열등생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대부분의 사람은 알지 못한다. 지독한 열등생이 느끼는 암흑과도 같은 절망을 우리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지독한 열등생이 평범한 어른이 되었을 경우에도, 우리는 지독한 열등생이었던 사람이 지은 을 읽게 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읽는 책은 대부분 똑똑했거나 혹은 똑똑한 사람들이 쓴 것이다. 전문 지식이 많은 사람, 정보가 풍부한 사람, 세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 마케팅에 능한 사람, 세상에 대한 혜안을 가진 사람, 특별한 감성을 가진 사람, 그 감성을 말로 풀어낼 줄 아는 사람의 책을, 우리는 읽는다. 열등생이었던 사람의 글을 만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이 책에는 열등생이 느끼는 절망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열등생이었던) 작가가, 그런 고민과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을 돕는 경험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나는 이렇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선생님을 중4와 고3 사이에 세 분 더 만났다. 이 세 구원자에 대해서는 다시 얘기하겠지만, 한 분은 수학 자체였던 수학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역사 구현력이 누구보다 뛰어난 놀라운 재능의 역사 선생님,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철학 선생님이다. 철학 선생님은 나에 대한 기억을 하나도 간직하고 있지 않았기에 (편지에서 그렇게 말했다) 나를 더더욱 놀라게 했으며, 이로 인해 그분이 더 크게 보였다. 그분의 인정에 기대지 않고 전적으로 그분의 비법 덕분에 나의 정신이 일깨워졌으니 말이다. 네 분의 선생님은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구원했다. (118)

 


열등생이었던 그는 어떻게 선생님이 되었고, 작가가 되었고, 소설가가 되었나. 저자는 말한다. 천재적인 선생님, 선생님들이 나를 구원했다. 내게 맞는 학습법을 고안해, 내게 적합한 숙제를 내주어, 내게서 그 어둠을 몰아내 주었다. 나를 구원했다.

 

체스 마스터 베스에게 체스 교본은 필요하지 않다. 동아일보 기자, 5선의 국회의원, 전남지사, 국무총리 이낙연에게 6학년 문제집은 필요하지 않다. 작가인 다니엘 페낙은 더 이상 철자법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다르다. 12살의 베스에게는 5달러가, 6학년 아이 이낙연에게는 문제집이, 열등생 다니엘 페낙에게는 그에게 맞춤한 숙제가 필요했다. 되기 위해서, 무언가 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하고, 가끔 그 도움은 한 사람에게서 온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주거나, 목숨을 담보하거나 하는 커다란 도움이 아니라, 아주 작은 도움, 어른의 입장에서는 사소하다고 할 만한 그런 작은 도움이 아이에게 힘이 되었다. 인생을 바꿔주고 그 아이가 뭔가가 되도록 도와주었다. 한 사람, 어떤 한 사람의 도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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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1-11-11 23:1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퀸스 갬빗이 그런 내용이었나요??
영화를 볼까,말까... 포스터만 계속 보기만 해도 눈빛에 쪼그라들어 매번 포기했었네요.
그니까 그 눈빛은 천재 소녀의 강렬한 눈빛이었군요??
리뷰를 읽고 나니 아이들을 보는 시선을 달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깊게 드네요.
경종을 울려 줍니다!!!^^

단발머리 2021-11-11 23:27   좋아요 4 | URL
저도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현재까지는 일단 천재 소녀입니다. 아니죠, 그냥 체스 천재입니다. 체스 영재요.
아이들을 보는 시선은 종종 점검해봐야 될거 같아요. 저는 그렇습니다 ㅎㅎㅎ

미미 2021-11-11 23: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그런 말이 있나봐요.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온 세상을 살리는 것과 같다고요. 저도 <학교의 슬픔>최근 사 두었는데 잘했네요. 이낙연의 ‘그 선생님 ‘얘기 울컥했습니다~♡

단발머리 2021-11-14 20:30   좋아요 2 | URL
<학교의 슬픔> 저도 아껴서 조금씩 읽고 있는데 너무 좋아요. 미미님이 읽으시면 좋은 리뷰 나올것 같아요.
기대하고 있을께요!!

그림 2021-11-12 07: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이낙연 어린이 선생님 이야기는 넘 감동적이네요..!

단발머리 2021-11-14 20:49   좋아요 3 | URL
그렇죠. 저도 그 이야기 듣는데 ‘지어낸 이야기‘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놀랍더라구요.
나중에 이낙연 전 대표가 국회의원이 되셨을 때, 저 선생님을 후원회장으로 모셨다고 해요. 실존인물이십니다^^

다락방 2021-11-12 08:1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글 너무 좋네요, 단발머리 님.
제가 늘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이 글에 있는 것 같아요. 좋은 어른이 된다는 건 비단 그 어른 자신에게만이 아닌, 나보다 어리고 약한 존재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는 거잖아요. 제가 누군가를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할 순 없어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더 많은 약한 처지의 사람들이 좀 더 힘을 얻고 사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싶어요.

단발머리 2021-11-14 20:34   좋아요 2 | URL
저도 그런 맘이 많이 들어요. 근데 사실 이런 작은 친절도 용기가 필요한 것 같아요.
제가 관심을 가졌던 건, 그 훌륭한 위인들이 아직 아이였을 때, 그런 도움이 얼마나 절실한가 하는 점이었어요. 어른에게는 그렇게 큰 돈 아닌데, 그런데도 그게 100배, 200배의 효과를 내게 되니까요.
참.... 여러모로 부끄러운 제 자신을 돌아보는 읽기였어요.

붕붕툐툐 2021-11-12 10:1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이콩~ 이런 대단한 샘들 이야기에 저를 떠올려 주시다니 너무 황송하네요~ 저는 그냥 좋은 영향력을 준다는 건 욕심인 거 같고 해로운 영향을 주지 말자 쪽인 어 같아요. 그래서 아이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좋은 점은 잘 발현되도록 돕는 정도? 현재 필요를 채워주면 그걸로 되었다 싶어서 졸업생 찾아오는 것도 그닥 좋아하지 않아요~ㅎㅎㅎㅎ
열등생의 마음 너무 알고 싶어요~ 이 책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앞에 좀밖에 못읽고 반납했어요~~ 다시 빌려 읽을래용! 단발머리님 감사해용!!😄

단발머리 2021-11-14 20:38   좋아요 2 | URL
진짜 툐툐님 생각났어요. 어떤 직업보다 선생님이 그런 역할을 하기에 좋은 직업군이라고 생각하기는 해요. 그리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겠다 막 결심하고 달려드는 것보다 툐툐님처럼 해로운 영향을 주지 말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아이들을 더 편하게 대해 주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열등생의 마음 심도깊게 파헤쳐드립니다. 그 아이들 뇌 속의 암흑과 마음 속의 고통을 속 시원히 해부해 드립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에요!!!

mini74 2021-11-12 18: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드라마로 먼저 봤어요. 단발머리님 글처럼 아저씨의 무심해보이는 모습 속 다정함이 좋았어요. *^^*

단발머리 2021-11-14 20:39   좋아요 2 | URL
미니님은 벌써 보셨군요!!! 전 드라마는 아직 보기 전인데, 사진으로만 봐도 주인공이 너무 매력적이네요.
샤이벌 아저씨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고요^^

공쟝쟝 2021-11-12 23: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샤이벌 아저씨 너무 좋죠. 위의 다정한 승리자 페이퍼와 연결지어지며 더 뭉클 쫀쫀. 퀸스갬빗이야 말로 숨어있는 무심한 다정한 존재들을 발견하는 이야기로구나 싶어지는 군요. 자 퀸스갬빗을 끝내신 후, 단발님의 인류애를 길이 보존하는 동시에 모든 생물의 다정함 마저 증폭(?) 시키기 위한 장치로 저와 함께 에단호크 감독의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를 감상하도록 하십시다. 유튜브 유료결제요망.

단발머리 2021-11-14 20:41   좋아요 3 | URL
샤이벌 아저씨가 베스에게 체스 가르쳐 줬는데 베스한테 지고 잠깐 삐졌을 때 너무 재미있었어요. 아무말 없이 스스르 돌아오셔서는, 바로 체스 한 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에단호크 감독의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감상하려고 해요. 유튜브 유료결제 한 번도 안 해보았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감상해보려고 해요.

공쟝쟝 2021-11-14 21:41   좋아요 2 | URL
가족영화로 안성맞춤 🤗 단발님 ㅂㄱㅅㅍ요

단발머리 2021-11-14 21:44   좋아요 3 | URL
응… 찾아볼께요. 나 아까 ㅂㄱㅍㅇ로 읽었어요. 그래서… 에궁 간식 없어요? 할려고 했더니 ㅂㄱㅅㅍ요, 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1-11-14 21:46   좋아요 2 | URL
통일되는 모음은 오 입니다💕 가 ㅅ은 이 네요 ㅋ

단발머리 2021-11-14 21:47   좋아요 3 | URL
나 이거…. 못 읽고 있어요. 엥? 🙄

공쟝쟝 2021-11-14 21:48   좋아요 2 | URL
아이참 보고시포요 보고싶다궁 🙄

단발머리 2021-11-14 21:49   좋아요 3 | URL
쫌만 기둘려요. 시간아 얼른 훨훨 날아가보렴!!! 🤨🤨🤨

독서괭 2021-11-13 01: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의 역할, 든든한 어른의 역할이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생각해보게 되네요.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한명의 어른만 있어도 아이는 자기의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을텐데…

단발머리 2021-11-14 20:48   좋아요 3 | URL
저는 항상 부모 이외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 어른이요. 물론 사촌언니나 오빠, 이모, 고모, 외삼촌, 막내 삼촌, 할머니, 할아버지... 될 수 있겠지요. 감정적으로도 그렇고 물질적인 면에서도요.

제가 예전에 <헬프>라는 영화를 봤는데, 영화 속에서 백인 엄마들은 맨날 예쁜 옷 입고 파티하고 모임하고 그러거든요. 애들하고 심정적 거리는 흑인 보모가 가까워요. 자기 아이를 맡기고, 내버려두고, 혹은 공동육아 상태로 놔두고 와서 백인 아이들을 돌보는데, 그 흑인 보모들이 아이를 진심으로 대하니까. 애들도 알아요. 이 사람이 엄마는 아닌데, 나한테 엄마 같은 존재다. 그런 거를요.
갑자기 독서괭님 댓글 읽다가 혼자 시네마 천국 찍었네요. ㅎㅎㅎㅎㅎㅎ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