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는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성공회대 하종강 교수님의 강의를 듣다가 내 생각이 나서 연락하는 거라고 했다. 어머나, 하종강 강의를 들으면서 생각나는 친구라니. 너무 근사한 거 아닌가. 좋은 강의 듣는구나, 답했다. 친구는 다른 강의에서 헨리 조지가 나오면 또 내가 생각난다고 했다. 어머나, 진보와 빈곤. 헨리 조지를 들을 때 생각나는 친구라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이 친구는 나를 많이, 계속 좋아하는 친구다. 15년 전인가.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친구 집에 갔다. (그 지역은 조문을 집에서 받는 분위기) 일행이 나까지 넷이었는데, 서울에서 큰딸 친구들이 왔다는 이야기에 어머님이 우리를 맞으시는데, 내 두 손을 꼭 잡으시며 “네가 **이니?” 하고 물으시는 거다. 어머님의 따뜻한 손과 반짝이는 눈빛을 보고 단번에 알았다. 친구가 나에 대해 어머님에게 어떻게 말했는지를. 기대와 기대와 또 기대감에 가득 찬 사랑의 눈빛.
내 친구는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인데, 이를테면, 4학년 때 구내식당에서 1학년 때 들었던 수업 내용에 관해 물으면, 수업 내용과 예시는 물론이요, 그 앞뒤로 선생님의 시답잖은 농담까지 기억하는 친구다. 기억의 쌍두마차 중 한 명이다. 진보와 빈곤이라니, 안 봐도 비디오다. 대학교 4학년 때 『진보와 빈곤』을 읽은 거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얼마나 아는 척에, 깝치고 다녔을까. 비상한 기억의 소유자이자 착한 내 친구는 헨리 조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때의 나를 ‘긍정적으로’ 기억해내고, 내게 말하는 거다. “그걸 지금에야 알아듣고 삽니다. ㅋㅋㅋㅋ” 아, 비상하고 착한 친구여.
기억의 쌍두마차 중 다른 친구는 고등학교 친구다. 얼마 전에 카톡을 하다가(카톡 많이 하는 사람), 큰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가 딸기를 사 왔다고 했는데, 친구는 딸기는 기억이 안 나고 아이 내복을 사 갔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친구 말이 맞다. 왜냐하면, 이 친구는 기억의 쌍두 마차 중 하나니까. 이 친구의 기억은 무조건 옳다. 그래서 얼른, ‘그래, 딸기랑 아기 옷을 사 왔지’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친구가 ‘네가 복숭아를 너무 예쁘게 깎아서 깜짝 놀란 기억이 있어’ 그러는 거다. 아… 복숭아라. 나는 과일을 잘 못 깎지만, 복숭아는 그중에서도 워스트다. 사과, 배, 참외, 수박, 멜론과는 결이 다르다. 특히 말랑이는 최고의 난이도다. 이번 추석에도 동서가 복숭아를 이쁘게 깎고 있길래 “복숭아… 이렇게 깎는 거지?”하고 물었더니, 동서는 “응응.”하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런데, 친구가 그러는 거다. 네가 복숭아를 너무 예쁘게 잘 깎아서. 20년 전의 내가? 진짜? 그래서, 그 친구는 기억의 쌍두마차 중 한 명인데도, 나는 용감하게 말했다. “설마?”
최근에 읽었던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나’를 이렇게 정의한다.
‘나’란 내 기억의 총합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두 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아는 나와 남들이 기억하는 나. 친구들의 기억 속에 나는 『진보와 빈곤』을 읽고 복숭아를 예쁘게 깎는 사람이지만, 실제의 나는 지난번 이사 때 『진보와 빈곤』을 버렸고 (후회막급), 아직도 복숭아를(다른 과일도) 볼품없는 모양으로 내놓는 사람이다. 어떤 게 진짜 나일까. 어떤 모습이 진짜 내 모습에 가까울까.
기억을 다운받아 그것이 물질적인 형체를 갖지 않은 채 데이터 형식으로 우주를 유영한다면, 혹은 디지털 공간에서 ‘영원히’ 살아간다면, 그걸 나의 ‘현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육체 속에 갇혀 있어야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여야만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나일까. 어디서부터 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