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성 을유사상고전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정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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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 음악, 독서도 하나같이 똑같은 역할을 한다. 일하지 않는 여자가 그런 것에 전념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자기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다. 미래를 열지 않는 행동은 내재의 공허 속으로 다시 떨어진다. 한가한 여자는 책을 읽기 시작하다가 집어던지고, 피아노를 열었다가 다시 닫는다. 자수를 다시 집어 들고는 하품을 하고, 결국에는 전화 수화기를 든다. 그녀는 확실히 사교 생활에서 가장 쉽게 도움을 구한다. 외출하고 방문하고 손님 접대에 - 댈러웨이 부인처럼 -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녀는 모든 결혼식과 장례식에 참석한다. 더 이상 자기 생활이 없으므로 타인의 존재에 기대어 살아간다. 교태 부리는 여자에서 수다스러운 여자가 된다. 그녀는 관찰하고 논평한다. (813)

 


이 부분을 읽고 친애하는 알라딘 이웃은 이렇게 적었다. “아마츄어로서의 읽고 쓰기를 하는 여성들에 대해서 언니가 일갈할 때 심장에 수류탄 넣어주시는 줄 알았다. 아주 그냥 제대로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집어 던질뻔도.” 보부아르를 인생의 등불이라 칭하는 착한 성정의 이웃님이 전해오는 이 놀랍고도 불쾌하며 정당한 감정. 나도 비슷하게 느꼈다. 여성의 취미 생활에 대한 저평가. 가정에 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의 이해 부족. 엘리트주의. 아마추어에 대한 냉소. 하지만 보부아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왜 그렇게 말했는지에 대해선 이해한다. “대학에 가라. 학위를 따라. 직업을 가져라고 말했던 베티 프리단의 주장도 겹쳐 보인다. 봉사 활동마저 사교 활동의 연장으로서 이해되는 환경에서 직업’,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질 것을 강조한 이유를 이해한다. 다만, 그녀들이 돈 벌러 나갔을 때 그 집 아이들을 돌보았던 흑인 여성들, 3세계 여성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저임금 등의 불합리한 처우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여성의 요구는 팽크허스트Pankhurst 일가가 런던에 여성사회정치연맹 Woman Social and Political Union'을 창설한 1903년경에 특이한 국면을 맞았다. 이 연맹은 노동당에 가담하고, 과감하게 전투적인 활동을 펼쳤다. 여자들이 순수하게 여자의 자격으로 확실하게 노력하는 시도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것이 영국과 미국의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던 여성들’ 의 모험에 특별한 흥미를 더해 주었다. 그녀들은 15년 동안 여러 면에서 간디의 태도를 연상시키는 압박 정치를 주도했다. 폭력을 거부하면서 다소 교묘하게 그 대용품을 고안해 냈다. 그녀들은 자유당 집회 동안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는 글이 쓰인 깃발을 휘두르면서 앨버트 홀에 침입했다. 애스퀴스Herbert Henry Asquith(1852~1928)의 사무실에 밀고 들어가거나, 하이드파크나 트래펄가 광장에서 집회를 열거나, 현수막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거나 강연회를 개최했다. 시위 도중에는 소송 사태를 유발하기 위해 경찰을 모욕하거나 돌을 던지며 공격했다. 교도소에서는 단식 투쟁을 벌였다. 기금을 모으고 그녀들 주위로 수백만 명의 여자와 남자를 결집시켰다. (202)

 


참정권 투쟁의 역사는 전투적이다. 좋은 말로. 좋게좋게 말했을 때는, 아무도 여성의 말을 들어주지않았다. ‘과격한투쟁이 이어질 때야 비로소 상대방은 묻기 시작한다. ”?”, “왜 그러는 건데?”

 

답은 정치에 있다. 얼마 전에 의붓딸을 12년 동안 343회 성폭행하고 낙태까지 종용했던 의붓아버지에 대한 판결이 났다. 25. 고작 25년이라니. 9살의 나이부터 현재까지 지옥을 살았을 그 아이의 삶은 무엇인지, 그 삶에 대한 일말의 고려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2021 11 2), 아이가 사정을 털어놓았던 사회복지사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집에 보내지 않자 면사무소를 찾아가 갖은 욕설과 폭언을 하고 현관문, 유리창을 부수고, 사회복지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의 욕설을 담은 문자메시지, 음성메시지를 보냈다. 폭력적인 피의자에 대해 아이가 현재도 느끼고 있을 공포심에 대해 사법부는 뭐라 말하는가. 25년이라니.

 

더 강력한 처벌이 어떻게 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판사들은 소극적이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 한계 내에서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형량을 내린다. 그렇다면 법을 바꿔야 한다. 입법은 국회의 영역이지만, 푸른 꿈을 안고 국회에 입성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너무 작다고 말한다. 성범죄에 대한 더 강력한 처벌을 규정하는 법을 발의하면, 같은 당의 의원 중 공동 발의할 의원을 모아야 한다. 그다음에는 그 당의 의원들을 설득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상대 당의 일부 의원들을 설득해야 한다. 쉽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다. 결국은 정당이다. 여론 환기와 법 개정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국민적 관심 속에 법 제정을 추진할 곳은 정당뿐이다. 판결에 분통이 터진다고 마냥 기다릴 일이 아니다.

 



여자가 자신을 위해 자신에 의해 살게 될 때, 그때 여자는 완전히 한 인간이 될 것이다. (379)

 


자신을 객체로 보는 나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 주체로 살아가야 한다고 다짐한다. 페미니즘 책을 계속 읽어오고 있지만, 이번에 이 책을 다시 읽는 시간은 좀 달라서 마음이 복잡했다. 친구들과 댓글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로운 걸 많이 배웠다.

 

대학교 4학년 때 친해진 친구 세 명은 학교를 졸업하면서 바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인 건 분명한데, 친구들은 세 명 모두 장학생. 공부할 마음도 공부할 실력도 안 되는 나인지라 그때는 고민하지도 않았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나니 그때의 결정이 아쉽고 후회가 되기도 했다.

 

더 공부하지 않은 혹은 공부하려고 하지 않았던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는 없다. 혼자여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이게 맞는 걸까 고민되는 시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친구들의 댓글을 읽으면서 얻은 가르침은 대학원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함께 텍스트를 읽고 그 너머와 이면에 관해 이야기하고, 말하지 않은 혹은 말할 수 없는 행간을 이해하는 당신. 지혜로운 당신 그리고 또 멋진 당신이 여기에 있다.

 



내게 가르침을 주는 당신이 바로 내 스승이다.

내 친구 당신이, 내 스승이다.

나의 소중한 친구이며, 또한 나의 큰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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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1-05 11: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태그에 눈물이 핑 도네요. 혹시 나인가, 라고 생각하는 바로 당신이라니.

저도 과거의 제가 왜 공부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수시로, 자주 생각해요. 그 때 공부 열심히 했다면 내가 완전히 다른 미래를 펼쳐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에 대한 생각도 하고요. 지금 이런 후회와 마음가짐이라면 최종학력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고 단발님께 박사 친구 되어줄 수도 있었을텐데... 하아-

그렇지만 저 역시 단발님이 쓰신 이 글처럼 좋은 친구들을 스승으로 두고 있습니다. 같이 책 읽으면서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알게 되고 또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아요. 어쩌면 제 인생에는 학창시절 공부 대신 좋은 벗들이 주어진건지도 모르겠어요. 주기적으로 대학원을 갈까말까 고민하다가 가지 않는 지금의 제가 되었지만, 우리 서로에게 벗이 되어주고 스승이 되어줍시다, 단발머리님.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단발머리님은 지금 최고로 멋져요. 그걸 잊지 말아요!

단발머리 2021-11-05 13:18   좋아요 3 | URL
더 공부했다고 뭐가 달라질건가 (제 주위의 숱한 고학력 여성들) 하는 생각과 더 공부했다면 달랐을거야, 하는 생각이 항상 막상막하입니다. 다락방님이 저의 박사 친구여도 너무 좋았겠지만(하이! 닥터 리!) 작가 친구여서 괜찮습니다.
박사 보다 작가 아니겠습니까!!!

고미숙 선생님이 서로에게 친구이며 스승인 사람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잖아요 (책에서). 생각보다 로맨스의 기간은 짧고 또 아.... 짧죠. 지금 함께 공부하고 이야기나누고 힘을 주고 파이팅을 외치는 친구들이, 새로운 가르침을 주고,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해주는 친구들이 제게 스승입니다.

혹시 나인가,라고 생각하는 당신이 바로 제 친구이고, 바로 저의 스승입니다.

공쟝쟝 2021-11-07 18:41   좋아요 1 | URL
저는 지금하는 공부가 제일 재밌고, 과거의 공부안한 저를 후회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페미니즘 공부가 재밌는 이유는 바로 과거의 제가 해댄 수없는 헛발질들 때문입니다. 공부가 재밌어진 이유가 과거에 공부를 안했다는 반성이기에 ㅋㅋㅋㅋ 만약에 공부를 했다면 정작 지금은 공부 안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네요!! (ㅋㅋㅋ)
반칠십에 생긴 공부에 대한 욕심은 스승이며 친구인 그대들 덕분입니다. 사.....사라...사탕합니다...!

그레이스 2021-11-05 11: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멈칫했는데, 시대적 사유때문인걸로 이해하고 넘어갔어요^^
아마 지금이었으면 다른 말을 했을지도...
성취, 사회적 성공을 통해 주체로서의 삶을 인식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보부아르 역시 어떤 부분에서는 동일성을 벗어나지 못했겠죠.
그것의 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한계인듯요

스승에 관한 문장 동감입니다

단발머리 2021-11-05 12:42   좋아요 3 | URL
그레이스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성취와 사회적 성공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죠.
또 이후에 그런 측면만을 강조했을 때 여성에게 주어진 이중, 삼중의 노동이 있었음도 분명하구요.
한계를 넘어서고 또 현재에 맞게 고쳐나가야 한다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친구들과 알라딘 이웃님들이, 저의 스승입니다^^

2021-11-05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05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05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21-11-05 12: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자신에 의해, 라는 말에 적극 동의 동감합니다 단발머리 님

단발머리 2021-11-05 12:50   좋아요 3 | URL
네 맞아요. 자신에 의해, 자신의 힘으로, 노력으로. 저도 적극 동의합니다!

유부만두 2021-11-05 13: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보부아르 읽으면서 (네 읽고는 있습니다) 영화 ‘서프레제트‘를 챙겨 봤는데요, 배우들 좋은 연기와 이야기가 너무 매끄럽고 우아하게 슬퍼서 그 과격함이 순화된 느낌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 시절 내가 그 곳에 있었더라면? 하는 질문에는 마음이 많이 복잡해지고요. 보부아르의 책은 (전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절 ‘공부‘하게 만드는 책이에요. 쫌만 기다려주세요. 거리의 은행알이 다 터지기 전에 제가 완독을 해보겠습니다.

단발머리 2021-11-07 23:04   좋아요 0 | URL
보부아르 읽으면서 서프레제트 보기, 너무 좋은 계획이네요. 그 시절 그 곳에 있었다면, 용감하지 않았을 거 같아서.... 전 아직 그 영화를 못 보았는데, 그래도 봐야겠지요.
이것저것 챙겨서 보시면서, 보부아르 평전도 읽으시면서 부지런히 읽고 계시네요. 은행알이 천천히 다 터지기를요^^

책읽는나무 2021-11-05 14: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인용문...딱 저 인용문!!!!
저도 인용할 뻔했던 딱 저 인용문!!!
몇 달전부터 그림과 피아노 둘 중 하나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고 강렬한 의지가 불타 올라 미술 학원이랑 피아노 학원 앞을 기웃거리고 있었거든요.차마 시작하고픈 용기는 안나.....미루고 있었죠.
헌데....저 인용문에 순간 얼굴이 확 붉어지면서...책 덮었죠!!!
그림이나 자수등의 작품들을 그저 수공예품이라고 일갈하는데....하~~
아마츄어 여성작가들을 폄하 할때도 하~~
보부아르님도 선입견이나 고집이 상당하시겠다!!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결정을 했죠.
그럼 수채화 대신 아크릴화로~
피아노 대신 바이올린으로~
음악 대신 체육???
독서 대신....대신....????
독서는 대신할 게 없네요??
그럼 다시 독서로 돌아오면 되겠죠ㅋㅋㅋ
마지막 문구는 눈물 흘릴 뻔 했어요.
단발머리님의 스승이 될 수 없어 아쉽다고 운 건 절대 아니에요.ㅋㅋㅋ
오늘도 많이 배워 갑니다.
가르침은 단발머리님이 주셨어요^^

단발머리 2021-11-07 23:08   좋아요 1 | URL
일단 저로서는.... 피아노 배우기랑 그림 배우기 모두 추천드리고 싶어요. 저는 취미가 직업만큼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열망까지 있으시다면 더 미루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 인용문 그대로 한 적도 있어서 말이에요, 저는요. 그래서 싫었습니다만.... 하....
설렁설렁이 아니라 프로의식을 갖을 것에 대한 충고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아무것도 독서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제일 쉽고 간단하고 상대적으로 돈도 덜 드는 최고의 놀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책나무님 저의 스승이에요. 책읽기도 그렇고, 아이들 키우는 것도 그렇고, 김치(특히 총각무) 담그시는 것도 그렇고요.
제가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해요, 책나무님!!!

붕붕툐툐 2021-11-05 22: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너무 멋지셔요~ 북플에서 이렇게 멋진 분들의 대화를 읽을 수 있다는게 넘 행복하네용~😍

단발머리 2021-11-07 23:09   좋아요 1 | URL
멋지다고 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제게 주신 멋짐 모두 모아 툐툐님께 반사!!!

라로 2021-11-06 13:4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보부아르 시작했어요. 넘 뭘 몰라서 이렇게 뒤늦은 시작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일찍 시작하신 단발머리님과 같은 분들이 제 스승입니다. 지치지 않고 꾸준히 이렇게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단발머리 2021-11-07 23:11   좋아요 1 | URL
보부아르 읽기 시작하셨군요. 라로님 바쁘신대도 독서에 진심인 모습 항상 보기 좋아요.
스승이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부족한 글인데도 읽어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