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처음부터 다시 읽고 있다. 같이 읽기 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220쪽부터 읽을 것이다, 광고도 야무지게 했건만. 서론만 다시 읽어볼까, 하고 앞쪽을 펼쳤는데, 어쩔까나. 너무나 새 책 같고, 기억나지 않는 구절들이 속속들이 등장한다. 찬찬히 다시 읽자. 결심은 가상하나, 내가 꼴찌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말하는 부인공유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다만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것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공포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 이해할 것 같다. 공식적, 비공식적 매춘이라는 남녀관계에 대한 그들의 통찰에 동의하는 지점도 있다. 다만,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이 그렇게 정확히 나누어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사회는 사랑의 감정에 다양한 형태와 기능이 존재함을 사실상 용인할 것이며, 실제로는 평생 지속되는 동료애(어쩌면 성적인 요소는 극히 작을 수도 있다)가 가장 만족스러운 형태라고 믿겠지만, 융통성 없는 혼인 관습 그 자체가 항구적인 혼동과 오해의 원천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관습은 오늘날처럼 두 사람이 같은 집에서 영원히 살면서 식탁에 마주 앉지 않으면 아예 서로 남남이라고 여기며, 두 종류의 친밀한 관계만을 인정한다. 전통이 아니면 범죄이며 결혼이 아니면 간통일 뿐이다. (60쪽, <에드워드 카펜터, 『사랑의 성년기』, 1911년>)
단 하나의 사랑, 인생의 특정한 시기에 완수된 사랑, 관계가 지속되는 사랑만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나만의 사랑으로 ‘구속’하는 것 혹은 ‘구속하고자 하는 것’이 어쩌면 인간 본성에 더 가깝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한다.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 ‘엄마’, ‘아빠’ 다음으로 배우는 표현이 ‘내 꺼’이다. 심지어 그렇게 발음하지 못하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움켜쥐고는 몸쪽으로 힘껏 끌어당기며 그 작은 몸으로 그것이 자신의 소유임을, 자신만의 것임을 만방에 알리고자 한다. 인간의 그런 감정이 온당하다거나 자랑스러워할 만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으로 한껏 끌어당겨지고, 그 사람을 원하고, 그의 응답을 갈구할 때, 그 사람의 사랑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을까. 그 사람의 손길을 공유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의 눈빛을 다른 이와 나눌 수 있을까. 그 사람이 내게 주는, 주어야만 하는 사랑을 다른 사람과 나눠 가질 수 있을까.
난 괴로워
네가 나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만
웃고 사랑을 말하고
또 그렇게 싫어해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