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아틀리에 -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
김상욱.유지원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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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술작품에서 과학을 보는 물리학자 김상욱과 과학에서 예술을 읽는 타이포그래퍼 유지원의 협업으로 만들어어졌다. 내용과 형식의 기묘한 조합은 글자모양 폰트로 구체화되었다. 본명조 레귤러의 김상욱과 아리따부리 미디엄의 유지원은 다른 이야기를 다른 글씨로 말한다. (이 글은 알라딘 돋음체로 쓰여졌다) 신선하고 도전적인 시도이어서 책 읽는 시간 내내 호기심이 일었지만, 특히 작가 유지원의 매력이 대단했다. 읽고 있는 글을 쓴 사람이 유지원이 아니라 김상욱이 아닌가 싶어 앞으로 돌아가 글쓴이를 확인하고는 했다.

 

양자역학 전문가인 김상욱의 글 중에는 <친애하는 마그리트 작가님께>가 기억에 남는다.

 





양자역학에 중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존할 수 없는 두 상태가 공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파리에 있으면서 동시에 브뤼셀에 있는 것이지요. 당신의 작품 <표절>을 보면 실내에 꽃병이 하나 있는데, 꽃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건물 밖의 나무가 존재합니다. <빛의 제국>에서는 하나의 장면 속에 낮과 밤이 공존하고 있죠. 저는 이런 그림이 양자 중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당신이 저의 이런 해석을 달가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83)

 



저자는 초현실주의 작가 마그리트의 작품이 양자역학의 중요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양자역학과 초현실주의에 일천하지만, 마그리트의 그림과 함께 양자역학의 중첩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면, 무엇인가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듯 착각에 빠진다. 1920년대 유럽이라는 시공간에서 양자역학과 초현실주의의 동시 탄생에 대한 저자의 학문적 의심에 자기도 모르게 동의하게 된다.


 

<벌거벗은 이름>에서 벌거벗는다는 것은 이름만 남고 그 대상이 남겨진 상태를 말하는데, 생물학에서는 대상의 묘사가 규정에 따라 적절하게 채워지지 않았을 때를 가리킨다(240). 반면 수학에서는 대상이 벗겨진 개념들에도 이름이 붙기도 하고, 물리학 역시 마찬가지다.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관념 자체가 환상이기에(239), 이름이란 결국 사람들 간의 소통과 합의가 분명해지도록 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에 느닷없이 외국어 공부의 효용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대상에 이름이 한 번 밀착되면, 거기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멈추게 되기 쉽다. 대상에 들어붙은 이름을 벗겨 보는 데에는, 모국어나 익숙한 영어 아닌 다른 외국어가 도움이 된다. 거리를 벌려 놓으면 대상과 이름 사이에 넓어진 틈새에서, 감각을 확장한 관찰과 대안적인 사유가 활기차게 운신을 재개할 수 있다. 이렇게 느슨해진 공백은 사고가 완고해지는 일을 막아 준다. 다양한 언어를 경험한 정신의 과학적 효용과 묘미도 여기에 있다. (242)

 


국어, 그리고 잘하지는 못해도 익숙한 언어인 영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 완벽하게 낯설고 여타의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은 외국어를 통해서, 외국어 공부를 통해서 사고가 완고해지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외국어 공부가 치매 예방에 좋다는 흔한 이야기의 과학 버전.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책을 언제 만나는가에 대한 생각들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전에는 게을렀던 나 자신과 흘러간 시간에 대한 후회가 많았다면, 변명일지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만날 책을 만날 때에 만나게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코로나19로 인해 도서관 휴관이 너무 길어질 것을 예상해 사두었던 책인데, 모두 다 그렇듯이 구입한 후에는 바로 읽지 않고 책상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요 며칠 심난한 시간들이 이어져 어떤 책도 읽고 싶지 않았는데 내용을 예상할 수 없는 이 책을 손에 든 순간, 잠시라도 고민과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내가 만난 문단은 이 문단이었다. 나는 이 문단이 내게 찾아왔다고 느꼈다. 내가 이 책을, 지금 만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별에서 온 원자들이 우리 몸으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진다는 과학의 진실을 안다. 인간은 필멸이라도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는 불멸임을 안다. 이 사실은 위안을 준다. 그러나 필멸의 생명이란, 원자들을 기계적으로 단순하게 조립한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 아님도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주 속 유구한 생명의 흐름은 지속될 것을 알고도 개체의 소멸을 애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한 명의 인간 개체는 생의 노력으로 쌓아 올린 경험과 지식과 기억의 온전한 집적체일진대, 그것이 죽음으로 스러지는 엄청난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견디어야 할까? 살아간다는 기쁨, 육체 감각의 강렬함, 억제하기 어려운 열망, 넘쳐흐르는 감정들은 어디로 가는가? (134)

 



전시장에는 오래된 책의 한 면이 펼쳐져 있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린 라파엘 로자노헤머의 ‘결정의 숲(Decision Forest)’ 전시였다. 펼쳐진 책에는 영국의 수학자 찰스 배비지가 1837년에 발표한 논문 <우리가 거주하는 지구에, 우리의 말과 행동이 남기는 영구적인 각인> 중 한 대목이 담겼다. 그 부분을 읽어 보니 우리말 관용구 하나가 떠올랐다. "말이 씨가 된다." - P43

인간의 말소리는 공기를 진동시킨다. 이렇게 발생된 공기의 파동은 전 지구의 육지와 바다를 돌아다닌다. 인간의 말소리가 바꾸는 공기의 움직임을 지구상 대기의 모든 원자가 받아들이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스무 시간이 채 안 되다는 내용을 담은 논문이었다. 지구 위에서 생존해 온 인류의 모든 개체들이 남긴 소리와 숨결은 그렇게 공기 입자의 움직임 속에 영원히 기록된다는 것이다. 찰스 배비지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구의 공기 자체가 전 인류의 태곳적 행적부터 기록된 ‘거대한 도서관’이라고. 그러니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지구의 공기에 진동의 씨를 남기는 셈이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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