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화상채팅을 하자고 했다. 나는 좀 부끄럽다며 그냥 통화를 하자고 했는데, 친구가 괜찮다며 화상으로 하자고 했다. 친구가 메일로 초대장을 보내줬고, 그렇게 친구가 만들어준 방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둘이 통화한 사진을 찍어 친구가 보내줬는데, 친구는 정상으로 나왔고, 나는 너무 핸드폰에 가까이 다가간 관계로, 이마에서 코까지만 보이는…. 참 놀랍고도 신기한 모습으로 친구와 한참을 통화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친구들 만나기가 어렵다. 사실은 불가능에 가깝다. 교회 후배 집에 놀러가서 밥 먹고 차를 마셨고(3월 말), 친구와 만나 커피숍에 한 번 갔다. 그 때는 4월 말이었는데, 친구는 ‘자발적’ 자가격리 상태여서 코로나 이후 첫 외출이라 했다. 가족끼리 몇 번 외식을 하기는 했지만, 점점 더 조심하게 되어 꼭 필요한 일(엄마에게 다녀오거나 도서관에 안심 대출, 장보기)이 아니면 외출하지 않는다.
나는 예전부터 아이들 학교 모임, 이른바 ‘엄마 모임’에 나가지 않았고, 정기적으로 운동을 다니지 않아 운동하면서 만나는 사람도 없다. 규칙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 같이 구역예배를 드리는 구역식구들인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교회도 주일 낮예배 빼고는 모든 모임이 ‘중지’ 상태다.
이런 상황이니 언감생심 친구를 만난다는 건 모험에 가까운 일이다. 자신이 확진자가 되었는데도 동선을 정확하게 공개하지 않거나, 심지어 거짓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방역 당국의 고심이 크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은 명확하게 잘못된 일이어서, 성인이라면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지만, 확진자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차별적인 공격이나 비난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만나는 사람도 고려해야 하니, 지금으로서는 만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럴 때 만약 알라딘 이웃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알라딘을 몰랐다면, 알라딘 서재를 몰랐다면, 알라딘 이웃들을 몰랐다면, 지금 내 삶은 더 팍팍하고 우울하지 않았을까. 알라딘 이웃 중에는 오프라인에서 만나 얼굴을 아는 분들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얼굴은 커녕 본명도 모른 채 알라딘 아이디만 아는 분들이다. 알라딘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책을 사고 감상을 적고 일상을 이야기한다. 어느새 서로를 알아가고 자연스레 더 많이 알게 된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서 이제 알라딘은 내게 친구를 ‘만날 수 없는’ 현재의 암울한 상황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이다.
일전에, ‘창비 우롱 상자(오늘까지만 놀릴께요, 창비 sorry!)’ 사건 때에도 알라딘 이웃들과 서로의 택배 상자를 공개하고, 책 인증샷을 나누고, 심지어 이메일 내용까지 나누면서 우리는 같이 신나게 한 번 웃었다. ‘원하는 책을 두 권 알려주시면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라는 결말은 흐뭇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원했던 건 어쩌면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이웃, 친구들.
내가 도선생님과 외출하기 전, 츤데레 남성과 밀당하기 전, 『오리엔탈리즘』을 읽고 있던 때였다. 말로만 듣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대표작을 읽어 보리라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책은 내 예상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에 대한 감상을 적어 알라딘 서재에 올렸는데, 알라딘 이웃 한 분이 ‘오리엔탈리즘’과 관련된 기사를 보내주셨다. 아직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여서, 그에 대한 비판 기사는 어려울 건 말할 것도 없었고. 게다가 그 기사는 영어로 작성된 거였다. 쉽지 않은 글을, 이해되지 않은 채로 찬찬히 읽었다. 끝까지 다 읽지는 못 했다. 생각보다, 아니, 생각만큼 어려웠다. 영어로 된 신문 기사를 읽으며 내가 발견했던 건 ‘오리엔탈리즘’이 갖는 다른 의미가 아니었다. 내가 발견한 건, 내가 오리엔탈리즘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내게 ‘도움이 될 만한 기사’를 찾아 링크를 보내주는 그 마음이었다. 우리 집 식구들은 내가 읽는 책의 ‘제목’ 정도는 확인하지만, 딱 제목까지다. 친구들과 만나 책 이야기를 할 때도 있지만, 사실 길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읽는 책, 내가 꽂힌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은 여기, ‘알라딘’ 뿐이다.
<'Orientalism,' Then and Now, NYR Daily, Adam Shats>
『여성 혐오가 어쨌다고?』의 임옥희님의 글이었다고 기억나는데, 사실 정확하지는 않다. ‘하나의 통일된 자아로 구성되었다는 믿음은 환상이다’라는 의미의 문장이 있었다. 물론이다. 사회적 역할로서 뿐 아니라 자아 역시 여러 측면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적어도 내 경우, 알라딘의 단발머리는 실제의 나보다 낫다. 알라딘의 단발머리는 실제의 나보다 더 착하고, 더 배려심 있고, 더 노력지향적이다. 실제의 ‘나’는 알라딘의 단발머리보다 더 못됐고, 더 이기적이며, 더 게으르다. 에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는, 더 자연을 낭비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알라딘의 단발머리 역시 나의 일부임이 확실하다. 밥하고, 청소하고, 노래하고, 피아노 치는 내가 나의 일부인 것처럼.
코로나19가 얼른 진정되기를 바란다. 내 나라, 내 조국도 그러하기를 바라고. 가족과 친구와 친구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다른 나라도 그러하길 바란다. 친구를 만날 수 없는 때에,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알라딘이 있어 다행이다. 어떤 뜨거운 날의 추억을 사진으로 꺼내본다. 올해의 더위가 모두 가기 전에 다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으면. 오늘 밤에는 기도를 좀 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