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중앙 아나톨리아의 카파도키아 평원에는 지하도시가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데린쿠유이다.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해 히타이트인들이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로마와 비잔틴 시대를 거쳐 더 확장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깊이 85m, 지하 20층의 규모이고, 작은 방들과 주방, 창고, 교실, 환기구 등이 보인다(<저스트 고 터키> 380쪽). 박해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위한 다양한 종류의 ‘방어문’을 가지고 있다. 벽에는 길을 알려주는 암호가 있는데, 외부인이 침입했더라도 길을 잃을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한다. 가이드는 몇 해 전에 안내를 무시하고 혼자 이동했던 일본인 관광객이 실종됐다는 말도 더했다.
신앙인으로서 감상을 예상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념을 지키기 위해 동굴로까지 피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했다. 순교자일 뿐 아니라 순종의 삶을 살기 위해 동굴에까지 자신의 몸을 숨겨야만 했던 사람들의 간절함을 생각했다. 그들의 믿음, 그들의 신념, 그들의 확신. 그런 것들이 내게 전해질거라고 예상했다. 내가 기대했던 감상은 그런 것들이었다. 세속주의에 물든 나의 나약한 믿음은 깊은 동굴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또 그들을 부러워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들의 믿음을, 그 신앙의 절개를.
몇 번째 방이었을까. 관광객들을 위해 현재는 내부가 훤히 보이는 모습이지만 당시 사람들이 생활할 때는 천을 문처럼 덧대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옆의, 그 옆의, 그 옆옆의, 그리고 아래와 그 아래아래의 사람들과 평생을 함께 지냈다는, 지내야만 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답답했다. 평생을 같은 사람들과 지내야만 한다는 것. 싫어하는 사람을 피해 도망갈 수 없다는 것. 보고 싶지 않은데 계속 봐야 하는 사람을 피해 도망갈 수 없다는 것.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것. 싫어하는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하는 괴로움과 좋아하는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하는 절망. 그런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동굴에서 얼른 나오고 싶었다.
터키는 광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나라이다. 열기구를 타고 내려다보는 괴레메 계곡의 나라이고, 파묵칼레의 나라이다. 셀주크의 나라이고, 제국의 강인함을 간직한 나라이다. 아야 소피아의 나라이고, 블루 모스크의 나라이다. 이 모든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이 기억에 남아있지만, 터키에서 내게 특별한 딱 한 장소만을 고르라면 난 데린쿠유를 고를 것 같다. 데린쿠유는 관광 스팟이 아니라 감정을 전해준 장소이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데린쿠유가 생각난건, 이 문단 때문이다.
그만 좀 해라, 토비. 그녀는 자신을 타이른다. 고립무원 상태거나 조난을 당했거나 포위 상태에 있는 닫힌 공동체에서는 바로 이런 식으로 문제가 시작된다. 질투, 불화는 집단 사고의 담벼락에 생긴 구멍이다. 사소한 증오심을 키우고 하찮은 분노를 마구잡이로 방출하며 서로를 향해 고함을 질러 대고 그릇들을 내던지는 등 어두운 자아로 인해 우리의 주의가 산만해지고, 그 결과 우리가 깜빡 잊고 잠그지 않은 문을 통해 우리의 적, 살인자, 그림자가 슬며시 들어오게 된다. (182쪽)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의 결과로 인류는 멸망하고, 순진무구한 신인류 크레이크와 소수의 인간만이 살아남았다. 폐쇄적이고 제한적인 공동체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 그리고 질투. 보기 싫은 어떤 사람과 보고 싶은 어떤 사람. 그들을 피해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을 때, 바로 그 때 토비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스스로에게 무어라 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