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책으로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있다. 처음 읽을 때는 ‘은혜로운 페미니즘’이 가능하다는 저자의 말에 너무 신나서 단숨에 읽었다. 강의를 옮긴 책이라 쉽게 느껴지기도 했고, 읽었던 책이 나올 때는 반갑기도 했다. 이번에 읽을 때는 노트를 펴놓고 정리하면서 읽고 있다. 가능하다면,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184, 185쪽이다. <4강, 전통의 재구성 – 여성의 눈으로 다시 건설하다>에서 페미니스트 조직신학자 밸러리 세이빙 골드스테인을 최초로 죄의 문제를 페미니스트 시각에서 문제 제기한 학자(183쪽)로 소개한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가장 큰 죄는 ‘교만’이다. 에덴 동산에서의 타락, 하나님과 같이(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선악과를 먹은 행위의 기저에 교만이 자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 다르게 말한다.
골드스테인은 ‘교만‘이 남자들의 죄라면, 자기 포기는 여자들의 죄라고 합니다. 물론 어떤 생물학적 남자의 경우는 자기 포기가, 어떤 생물학적 여자는 교만이 죄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가부장적 사회에서 절대적 다수의 문제는 아닐 거예요. 결국 창조주 하나님 신앙에 입각할 때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교만만큼이나 중요한 죄는 ‘자기 포기‘임을 천명해야 하며, 그것이 특히 여성들이 저지르기 쉬운 죄임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죠. … 살면서 어느 경우든 나를 주장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기심이나 이해타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목소리를 주셨고, 언어를 주셨고,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을 주셨는데, 왜 안 하나요? 늘 누가 대신해 주기를 바라나요? (184-6쪽)
남자가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죄가 ‘교만’이라는 데 동의한다.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 하나만 있으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남자들은 덜 말해야 하고, 덜 자신만만해야 한다. 더 성숙한 사람이 되는데 필요한 조건이다.
여자는? 여자는 자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난 못하겠어, 라고 스스로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어쩔 수 없지 뭐,라고 상황에 순응해서는 안 된다. (185쪽) 자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나를 주장해야 한다. 지금보다 더 많이. 더 성숙한 사람이 되는데 필요한 조건이다.
유투브 돌아다니다 조수미씨가 <대화의 희열>에 출연한 클립을 보게 됐다. 다섯 아이의 엄마였던 조수미씨의 어머니가 저녁 설거지 하는 내내 투덜거리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나서, 조수미의 손을 잡고 집 앞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면서 조수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매일 밤. 매일 밤 그녀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음악을 사랑하고, 노래를 사랑하고, 릴케의 시를 사랑하던 꿈 많은 여고생이 이제는 엄마가 되어 딸아이의 손을 잡고 걸으며 밤마다 말한다. 너는 나 같이 살면 안 돼. 한 남자에게 종속돼서 사는 게 아니라, 멋진 음악을 해서 세계를 돌면서 만인의 연인이 되렴.
나는, 모든 여성들의 선택이 존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지만, 큰아이를 낳고 나서 엄마라는 직업으로만 살고 있다. 아쉬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때 나의 선택은, 그 때의 나에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여성들이 결혼을 하라고, 아이를 낳으라고, 엄마가 되라고 강요 당하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지 않기로 결정한 여성들의 선택 또한 존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확히는, 여성들도, 너 자신의 꿈을 위해 살라고, 너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라고 격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이 그런 것처럼.
여성,이라는 종의 요구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 살아도 된다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암컷은 종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개성을 주장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