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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애정 - 여성 작가 16인의 엄마됨에 관한 이야기
도리스 레싱 외 지음, 모이라 데이비 엮음, 김하현 옮김 / 시대의창 / 2018년 12월
평점 :
여성 작가 16인의 엄마됨에 관한 이야기 『분노와 애정』을 읽고 있다. 많이는 아니더라도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적잖이 읽어왔다고 생각하는데, 수전 그리핀의 <페미니즘과 엄마됨>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뜨거워진다. 짧지만 강렬하다.
수전 그리핀의 글은 ‘싱글맘을 위한 신문’에 기고된 것으로 엄마됨에 관한 페미니스트 이론을 주제로 하고 있다. 끝없는 사랑으로 자녀를 보살피는 아름다운 엄마의 모습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지에 대해 수전은 말한다. 아이와 엄마는 가난하다.
여성이 필수품을 얻으려면 아이들의 아버지와 결혼해야만 하고, 아이 아버지에게 이들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80쪽)
여성이 아버지 없이 아이를 키우려 할 때, 아이와 여성은 비난에 직면할 뿐만 아니라, 생필품을 얻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사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서로 떨어져 지내야 한다. 가난 속에서 아이를 키울 때, 가난한 여성이 아이를 혼자 키울 때, 이들의 정신과 신체가 파괴되는 모습이 문학작품에서는 되풀이된다.(81쪽)
엄마됨에 관한 페미니즘 분석에 걸맞는 또 다른 통찰은 아이의 이익을 가져와야 할 어머니의 희생이 아이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가 자신의 자아를 희생하면 아이도 자아를 희생한다. 엄마의 사랑은 아이를 집어삼킨다. 엄마의 평가는 억압이 되고, 엄마의 보호는 지배가 된다. (83쪽)
정희진은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에서 ‘노동시장으로 진출하지 않은 혹은 못한, 중산층 고학력 여성들이 자아실현을 위해 가정에서 자녀 교육에 올인하는 구조 때문에 계급 고착화가 심화되었고, 강남 부동산 문제나 사교육 문제도 이와 연결되어 있다’(226쪽)고 지적했다. 엄마의 희생이 아이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엄마의 사랑으로 아이가 억압되는 구조. 서로의 희생으로 서로를 옥죄는 절망적 상황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정답은 없다. 하나의 답을 강제해서도 안 된다. 후회도 아쉬움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때로 돌아가 퇴사하지 않고 아이를 부모님께 맡기겠냐 묻는다면. 아니. 난 그 때와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꽃처럼 싱그럽고, 별처럼 빛나는 내 예쁜 아기를, 내 손으로 키우겠다, 말할 것이다. 하지만, 모두 다 그래야만 한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건 폭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여성에게는 모성애가 있고, 어머니의 사랑은 숭고하며, 어머니의 희생으로 아이가 자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답해 주고 싶다. 그건 거짓말이다. 희생을 전제로 한 사랑은 포근할 수 없다. 자신을 버려서 얻게 된 힘으로 전하는 사랑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 엄마와 아이가 같이 행복을 누려야만 진짜 사랑이다. 특정 시간만큼은 희생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 기간을 최소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은 분명 존재한다.
우리 아파트에는 한 층에 4가구가 사는데, 바로 옆집의 아이가 둘째와 같은 중학교, 같은 학년이다. 긴 옷을 챙겨준다며 현관문을 열고 나섰더니, 엄마는 얼른 들어가시라, 벌컥 화를 낸다. 엄마가 챙겨주는 아이가 되고 싶지 않아서 혹은 그런 돌봄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싫어서. 얼른 집 안으로 들어서며 다시는 현관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지 다짐을 한다. 현관문을 열고 학교 가는 둘째의 대견한 뒷모습을 바라보지 말아야지. 큰아이 방에 자꾸 들어가지 말아야지. 아이들이 내 사랑을 귀찮아할 만큼 매달리지 말아야지.
그게 빅뱅과 같은 호르몬 대폭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두 아이에 대한 나의 참 사랑일테니. 예전처럼 붙어있을 수는 없겠지. 지금은 이렇게 약간의 공간을 두고 떨어져 있는 게 어쩌면 진짜 사랑일 수도. 응원하며 옆에 있어 주기. 약간 떨어져서. 현관문 밖에서는 애정을 자제하고.
그렇게 해야지. 꼭 그렇게 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