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에서 돌아와서 우리는 무례할 뿐 아니라 심지어 불쾌한 말들을 들었다. 쉬운 판단들과 지정학적인 분석은 성급할 뿐 아니라 속이 비어 있었다. 그러나 듣기를 원치 않았던 말을 듣는 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우리는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된 양 우리를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시선까지 감당해야 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이렇게 말했는지 모른다. “잠깐만, 그들이 돌아왔다고?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는 거잖아.” 1950년인지 1951년인지에 대사관에서 초청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만난 한 프랑스 고위 공무원은 내 팔뚝에 새겨진 수형번호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그것이 내 사물함 번호였냐고 물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년 동안 나는 소매가 긴 옷만을 입었다. (『나, 시몬 베유』, 79쪽)
시몬 베유는 전쟁이 끝난 후 고국으로, 살고 있던 곳으로 돌아온다. 상상을 초월하는 나치의 잔혹함과 집요함을 이기고 마침내 살아서 돌아온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존자들을 반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피해자들이 어떤 고통 가운데 살았는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는지 들으려 하지 않는다. 피해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생존자들은,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은 움츠려 든다. 말하지 않고 숨는다. 자신의 피해가 수치스럽다고 생각한다. 수치스러운 피해자가 된다.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격랑의 시간을 얼마간 보내고 난 뒤, 우리 사회는 세월호의 충격을 벗어나려 노력했다. 세월호의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은 세월호 침몰의 원인을 밝혀내는 일이었다. 세월호가 왜 침몰해야 했는지 알아야했고,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선원 전부가 무사히 구출 됐을 때, 왜 배 안의 승객들과 단원고 학생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에 따라 배 안에 머물러 있었는지 알아야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가 청해진 해운의 유병언 때문이라고 규정하고, 유병언이 백골이 되어 나타났으니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선언하는 듯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를 통해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설명이었다. 그 다음은 기억하는 그대로다. 언론을 통해, 이웃의 입을 통해 세월호 유가족들은 “그만하면 됐다”, “이제 지겹다”, “자식 관 장사 그만해라.”라는 말을 듣게 된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덜 슬프다는 뜻은 아니리라. 하지만 부모는 산에 묻는다. 국토의 70%가 산지인지라 지천에 보이는 게 산이기는 하지만, 산은 우리의 삶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우리의 일상 너머에 있다. 우리는 산에 부모를 묻고는, 산에서 내려온다. 일상의 자리로 돌아오고 평범한 삶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지만 자식은?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 가슴에 묻힌 자식은 항상 내 마음에 있다. 자고 깰 때마다, 밥을 먹고 일터로 나갈 때도 가슴에 묻은 자식과 함께한다. 평범한 일상,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그렇다는 걸 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경험이 모아져 이런 속담이 만들어졌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 부모들에게 죽음의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원인 규명조차 해주지 않았다. 아니, 정부를 위시한 모든 기관이 총동원해 원인 규명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종국에는 이 일의 가장 큰 피해자인 세월호 유가족이 사회질서를 내세운 언론의 입을 통해 비난 받았다. 피해자가 비난 받는다. 피해자라는 이유로. 자식이 죽었다는 이유로. 자식이 죽었는데 슬퍼했다는 이유로. 자식이 죽었는데 너무 큰 소리로 울었다는 이유로. 죽은 자식을 빨리 잊지 못한다는 이유로.
성폭력 범죄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가장 안전해야 할 자신의 집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오가는 혼잡한 거리에서도, 지하철에서도, 공중 화장실에서도, 그 어떤 곳에서든 성폭력 범죄는 일어난다. 성폭력 피해자가 범죄 피해를 호소했을 때, 첫번째의 난관은 자신의 진술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면하는 일이다. 그 후에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 대한 비난을 겪어내야 한다. 왜 그런 옷차림을 했느냐, 왜 그 시간에 밖에 있었느냐, 왜 그 장소까지 따라갔느냐, 헤어진 남자친구를 왜 다시 만났느냐. 피해자는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데, 그가 듣게 되는 첫번째 이야기는 피해자가 된 것에 대한 비난이다. 피해 사실의 확인 또는 가해자의 범죄 사실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비난. 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비난하는가. 왜 피해자는 피해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비난 받는가. 피해자에 대한 비난은 왜 이리도 집요하고 잔혹한가.
시몬 베유는 1974년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된 직후, ‘베유 법’이라 불리는 자발적 임신중단에 관한 법안을 제출해 통과시켰다. 여성해방 투쟁의 상징적 인물인 그녀의 전기를 읽으며, 그녀가 겪어낸 홀로코스트의 참상,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된 후의 혼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에서 시몬은 홀로코스트의 특수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여러분께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의 특수성은 결코 훼손되어서도 희석되어서도 묻혀서도 변형되어서도, 요컨대 일반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 오직 자신이 속한 민족과 종교 집단을 이유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계획적으로 학살당한 사건과, 끔찍하고 잔혹한 동족상잔 전쟁에 같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요? … 그런데 오늘날 도덕적 상대주의 시대에 홀로코스트는 아마도 나침반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악의 절대적 기준, 절대 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제든 홀로코스트를 일반화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사건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84~86쪽)
시몬이 말하는대로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특수성을 갖는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 대한 비난, 피해자가 피해 사실로 인해 겪는 고통에 대해 살펴볼 때, 이해할 수 없는 행태가 반복되는 것에 주목하게 되었다. 피해자는 왜 피해자란 이유로 비난 받는가. 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비난 받는가.
혹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을 다시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