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마다 ‘시편’을 읽는다. 육체적으로 힘들 때보다 정서적으로 힘들 때 다윗의 ‘시’를 읽는다. 우아하고 절제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토해내는 다윗의 ‘간구’를 읽는다. 이번에는 다윗의 ‘기도’가 아니라, 다윗의 ‘삶’을 읽는다.
삶을 완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죽음과 완전히 대면해야 한다. 기묘하고 심지어 모순처럼 들릴지 모르나, 이것은 진실이다. 열정적으로 살았던 다윗은 또한 격렬하게 비탄에 젖어들었다. 그의 넘치는 열정과 비탄은 동일한 인생관, 동일한 가치관의 양면이었다. 즉 삶은 소중하다는 생각 말이다. 다윗은 인간의 삶-인간 삶의 사실 자체-을 넘치는 열정으로 존중했다. 그의 비탄의 깊이는 그의 그러한 숭배의 높이를 보여 준다. (178쪽)
다윗의 기도 중에 좋아하는 편이 여럿이지만 63편도 좋아하는 시편에 속한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시 63:6-7)
아롱이는 보통의 남자애다. 딱 그 나이대의 남자아이처럼 말을 안 듣고, 딱 그 나이의 아이만큼 순수하다. 예상을 뛰어넘는 기상천외한 말썽쟁이가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말썽쟁이다. 4-5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 있을 때는 같은 라인의 아저씨에게 ‘너, 개구쟁이지? 네 얼굴에 써 있어. 나 개구쟁이예요.’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개구쟁이고, 초등학교 입학하고 나서는 학교 번호로 급한 전화 한 두 번쯤 걸려오는 정도의 말썽쟁이다. 특별히 챙겨주지 알아도 스스로 자라는 큰 아이가 대견한 캐릭터라면, 작은아이는 인생이 대견함 그 자체다. 신발 주머니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며 학교로 향하는 더벅머리 중1 남학생, 보통의 개구쟁이.
동생은 딱 한 명인데 남동생이다. 어릴 때는 보통의 남매들처럼 꽤나 투닥거렸지만 한참 자란 후에는 깊은 밤, 나란히 발 뻗고 앉아 소근소근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남매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살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지만,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70대 부부의 깊은 고민을 알기에, 보통사람들의 생애주기를 벗어난 삶을 사는 동생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동생은 적지 않은 나이에 먼 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철모르는 동생은 남반구에 살며 겨울마다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친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건 누구였을까.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 기도는 ‘아들-동생’, ‘TH-아롱이’거나 ‘아들-동생-아들’ 또는 ‘TH-TH-아롱이’였다.
지난 한 달 동안 내 기도는 ‘아버님-아버님’이거나 ‘아버님-아버님-아버님’이었다.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약물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 내시는 아버님.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 눈을 뜨고 아침이 되었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아침이 됐구나. 밤에 전화가 오지 않았어. 아버님은 오늘 하루를 살아내실거야. 오늘을 견뎌내실거야. 또 하루를 참아내실거야. 힘드실텐데… 오늘 하루 또 힘드실텐데… 그리고는 기도를 한다. 아버님의 하루를 위해. 아버님의 살아갈 오늘, 아버님이 참아낼 하루를 위해.
그저께는 바쁜 아침을 먹기 전에 아롱이와 짧은 기도를 했다. 하나님, 이 맛있는 밥을 먹고 우리 아롱이, 오늘 하루도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친구들과 사이 좋게 지내게 해주세요. 주님 은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둘러 기도를 마친 후 생각한다. 아, 아버님 기도를 빼먹었구나. 아버님 기도를 하지 않았어.
이제 아버님은 기도 밖에 계신다. 한때는 내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아침마다 기도를 드리게 했던 아버님. 이제 아버님은 기도 밖에 계시고, 나는 더 이상 아버님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죽은 이후 남은 세계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 몇몇 사람이 나를 위해 울 것이고, 몇몇 사람이 내 삶을 기억할 것이고, 또 몇몇 사람이 내 죽음을 안타까워하겠지만, 나는 그 자리에 없다. 나는 알 수 없고, 나는 그 몇몇 사람들의 어떠함을 위로해 줄 수 없다.
기도하는 사람은 남은 사람이고, 남은 사람들만 기도할 수 있다. 나는 지금 남아 있는 사람이고 이제 남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러나 나는 잊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내내,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어머니 앞에서 나는 다윗이 되었다. 나는 항상 다윗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다윗이다. 이 이야기를 읽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무언가 다윗과 같은 면이 있음을 - "비롯 보잘것 없고 양이나 지키는 무명의 신세지만 나는 선택된 사람이다"-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성경 이야기꾼의 의도요 기술이다. (34쪽)
일은 성보다 훨씬 많이 사람들을 유혹에 빠뜨린다. 다윗 이야기의 후반부에 가면 다윗이 성적인 유혹에 빠져 간음하는 사건이 나온다. 그러나 성과 관련된 다윗의 죄보다는 일에 관련된 사울의 죄가 더 파괴적이었다. (52쪽)
이처럼 모든 진정한 일에는 섬김과 통치라는 두 요소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통치는 우리가 하는 일의 내용이며, 섬김은 우리가 그 일을 하는 방식이다. 모든 선한 일은 참된 주권적 통치의 발현이다. 그리고 그 주권을 가장 바르게 행사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섬김이다. (59쪽)
사울과 다윗은 둘 다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부음 받아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그들은 둘 다 좋은 일을 맡았다. 그러나 좋은 일을 맡았다는 것이 곧 좋은 일을 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똑같은 일을 수행하는 데 사울은 실패했고 다윗은 성공했다. 직업은 중요하다.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일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완벽하게 이루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의 열쇠,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사는 삶의 열쇠는, 어떤 직업이나 일을 맡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 있든지 우리가 그 일을 왕업으로 행하느냐이다. (60쪽)
다윗은, 자신에 대한 사울의 증오가 아니라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입각하여 기도하고 결단했다. 사울은 다윗을 힘들게 만들었지만, 그는 결코 다윗을 파멸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만일 다윗이 사울의 증오에 따라 자신의 인생 행로를 결정해 나갔다면 아마 파멸했을 것이다.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그의 인생은 분명 저주의 구렁텅이 – 복수심에 의해 옹색해지고 제한받고 좁아진 삶 – 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동안, 기도를 통해 자신의 고통과 분노를 하나님께 맡겨 드렸다. (181쪽)
하나님께 화가 난 다윗은 뿌루퉁해지고 삐쳐서 집으로 돌아갔다. 다윗은 하나님께 화를 내었지만 죽지 않았다. 다윗이 죽지 않은 것은, 화를 내는 다윗은 전에 찬양하고 있을 때의 다윗 못지않게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다윗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다윗. 그렇기에 살아 있는 다윗. 물론 다윗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했던 것이다. 웃사는 결코 하나님께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는 너무도 예의 바르고 깍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자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238쪽)
이것이 다윗과 밧세바 이야기다. 이것은 수세기에 걸쳐 조금씩 다른 형태로 수없이 반복되고 반복되어 왔던 이야기다. 범죄 이야기들은 서로 비슷비슷하다. 사실 모든 죄란 결국 같은 주제 – 스스로 신이 되려는 것, 자신의 삶을 제멋대로 하려는 것, 다른 사람의 삶을 지배하려 드는 것 – 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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