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쓰기가 뭐라고
유쾌한 강준만에게 듣는 글쓰기 비법. 작가들이 말하는 ‘글쓰기 고통’에 속지 마라, 구어체를 쓰지 말라는 말을 믿지 마라, 글쓰기의 최상은 잘 베끼는 것이다, ‘질’보다는 ‘양’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인용은 강준만처럼 많이 하지 마라, ‘사회자’가 아니라 ‘토론자’임을 명심하라 등등 목차 하나하나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문단은 “뭐 어때 하면서 뻔뻔해져라”.
글쓰기를 할 때엔 겸손하면서 오만하고, 오만하면서 겸손할 필요가 있다. 글에서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욕심을 내는 일에서 오만이 필요하며, 그런 욕심이 드러나지 않게끔 차분하게 논지를 펴 나가는 일에선 겸손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64쪽)
그리고 ‘통계를 활용하되, 일상적 언어로 제시하라’이다.
주거 문제 이야기를 할 때엔 1인 가구 비율(2015년 기준 27.2퍼센트)을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취업 문제를 논할 때엔 문,이과 수능 응시 비율은 6대 4인 반면 기업 채용은 2대 8이라는 ‘취업 미스매치’에 관한 개략적인 통계를, 영화 이야기를 할 때엔 한국은 2013년 기준 1인당 평균 영화 관람 편수가 4.12편이라는 점을… (155쪽)
생활 취미로서의 글쓰기와 소확행으로서의 글쓰기에 100퍼센트 동의한다. 가끔 소확행이 중확행이 되기를 바라면서. 가능한 일일까.
2. 최고의 작가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가
작가 루이즈 디살보는 영문학자이며 뉴욕헌터 칼리지 교수로서 창의적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으며, 버지니아 울프 문학 연구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소설을 비롯해 다양한 글과 책을 쓰는 작가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그 결과를 갈무리한 책이다. 전문적으로,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작가들의 이야기라 바로 대입할 수는 없지만, 몇 개의 단락들은 정말 마음에 든다.
하루에 가능하면 두 시간씩, 두 시간이 어렵다면 무슨 일이 이어도 조금씩은 매일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이 낮잠을 잘 때나, 좀 더 자라서는 학교에 가고 없을 때 글을 썼다. 많은 부모들이 그 소중한 시간을 집안일에 낭비한다. 나는 빨래와 쇼핑, 요리는 아이들을 옆에 끼고 했다. (49쪽)
“어떻게 하죠?” 그녀가 컨퍼러스에서 물었다.
“집에서 나가요. 카페에서 써요. 노트를 들고 파이어 아일랜드에 가서 써요. 예전 일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102쪽)
매일매일 실천하고픈 글쓰기 지침이다. <과정 일기> 활용법도 알아둘 만한다.
우선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의 작성하고 쓰고 싶은 주제에 대해 적는다. 그리고 글쓰기 과정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나의 작품에서 잘 되고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은 어디인지, 작업 일정에 변화가 필요하지는 않은지, 작품에 대한 내 생각은 어떤지를 고민한다. 장면을 스케치하고, 작품 구조에 대해 생각하고, 눈앞에 놓인 도전 과제를 하나씩 풀어나가고 가능한 해결책을 떠올리는 데 사용한다. (108쪽)
3. 밥보다 일기
서민, 알라딘서재 마태우스님의 매일 30분, 글 쓰는 힘. 일기의 효과와 중요성에 대해서는 모두 다 동의하겠지만 실제로 일기쓰기를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학창시절 쉬지 않고 일기를 써왔던 나이지만 일기쓰기를 멈춘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예쁜 노트를 하나 구입해(항상 시작은 예쁜 노트다) 다시 일기쓰기를 시작할까 잠시 고민했다. 이 단락을 읽으면서는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영원한 것은 없더라고요. 한때 잘나가던 싸이월드가 없어졌습니다. 제 초등학교 동창들이 모였던 ‘프리첼(freechal)’도 유료화 여파로 사라졌습니다. 제가 처음 글을 쓰던 ‘드림위즈’도 없어졌습니다. 무려 8년이나 거기다 글을 썼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예외적인 사례라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은 막강한 제국처럼 보이는 페이스북이 20년 후에도 건재할까요? … 저도 드림워즈가 없어졌을 때 그 홈페이지에 있던 글들을 새로 장만한 곳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근데 한 300개 정도 옮겼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걸 언제 다 옮기냐?’
결국 저는 ‘앞으로 글을 더 멋지게 쓰자’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기존 글을 사장시켰습니다. (94쪽)
마태우스님은 <대결 : 일기장 vs 블러그>에서 8년 동안이나 글을 올렸던 드림워즈가 없어지는 바람에 일부 글을 옮기기는 했으나 상당한 양의 기록을 허공으로 흩어버려야 했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나는 알라딘에 일기를 쓰지는 않지만, 가끔은 일기와 비슷한 글을 쓰기도 하고 또 생각을 정리한 글을 올리기도 하는데, 만약 알라딘이 문을 닫는다면, 이 공간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하나. 마태우스님에게 일어났던 일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말란 법이 있는가. 알라딘은 영원할 거라 장담할 수 있나.
나는 워드에서 글을 쓰고 알라딘서재로 옮기는데 알라딘에 옮긴 후에도 수정을 하기 때문에 내가 보관하는 글과 알라딘에 올려진 글에는 차이가 있다. 가끔 사진을 올리기도 해서 실제로는 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최근에 사용자 감소를 이유로 TTB2 광고가 없어지는 바람에 다른 분들 서재에서 신간 구경하는 재미도 줄어서 그런가, 불안한 마음이 자꾸 커지려고 한다.
알라딘이여! 영원하라!를 외치며 호기롭게 이 문단을 마친다면 강준만 교수님이 지양하라고 하셨던 ‘새마을운동식 결론’일 것 같아 그것만은 피하고 싶지만 딱히 다른 문장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알라딘이여! 영원하라! 예쁜 노트는 일단 준비해 두겠다!
4. 페미사이드
『페미사이드』를 읽고 있다. 페미니즘 책들 중에 읽기 전에 제일 두려웠던 책은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였는데, 부제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그 책이 강간의 역사를 가열차게 파헤쳤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라면, 노예 해방 이전에 남부를 비롯한 미국 전역에서 이루어졌던 흑인 여성 노예에 대한 ‘성착취’가 단순히 ‘성적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는 성욕만큼 지독하게 철저한 인간의 ‘탐욕’을 간과했었다.
남부의 가부장적 노예제는 백인이 흑인 위에 있는 형태를 취할 뿐 아니라 남성이 여성 위에, 더 정확히는 백인 남성이 흑인 여성 위에 있는 형태를 취했다. 흑인 여성은 노동자일 뿐 아니라, 재생산자였다. 노예제 하에서의 성적 착취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흑인 여성의 재생산 기관을 완전히 통제함으로써 6세 내지 8세가 되면 바로 작업에 투입할 수 있는 노예 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을 의미했다. 그 아이가 흑인인지 물라토인지는 상관이 없었다. (237쪽)
즉, 흑인 여성은 백인 농장주, 백인 중간 관리자들의 성적 만족, 성적 쾌락을 위해 강간당하기도 했지만, 흑인 또는 물라토 아이를 얻기 위해, 새 노예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출산 기계’로서도 이용당했다.
『페미사이드』를 읽는 일 역시 쉽지 않다. 여성이 물리적 폭력에 희생자가 되어, 고문당하고, 피 흘리며, 결국 죽임을 당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일은, 그것을 책 속 문장을 따라가며 확인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저항을 계속해 왔다는 사실은 감동적이다. 이렇게나 오랫동안 남성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녀들의 죽음이 사회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탓하는 환경 속에 처했음에도, 살아남은 여성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여성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여성이기 때문에 죽었다고 항변했다. 외치고 저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