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30』
6번째 잭 리처를 읽었다. 순위 발표를 먼저 하자면, 『1030』 > (잭리처) 『어페어』 > 『잭리처의 하드웨이』 > 『61시간』 (잭리처) > 『네버 고 백』 > 『퍼스널』 되시겠다. 부동의 1위 『어페어』가 이번에 『1030』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말았다. 잭 리처를 읽는 재미는 뭐니뭐니해도 액션과 스릴, 그리고 잭 리처의 활약에 있다. 195센티미터, 110 킬로그램의 거인, 계산기보다 빠른 암산 능력, 동물적 감각, 한 손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괴력, 언제 어디서든 정확한 시간을 말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떠돌이 근성까지. 잭 리처 시리즈는 말 그대로 잭 리처 때문에 읽는다. 잭 리처를 더 알고 싶어서. 잭 리처와 더 있고 싶어서.
『어페어』는 잭 리처 시리즈 중에서 좀 특별한데, 그 책에는 잭 리처가 처리하는 ‘사건’ 뿐 아니라, 잭 리처의 개인적인 ‘사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잭 리처와 데버로의 로맨스가 ‘사건’의 해결 못지않게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사건’인데, 이건 뭐 19금 정도가 아니라 36세 이상 출입가능이다.
새롭게 1위에 등극한 『1030』은 위험에 처한 리처의 옛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뭉친 헌병대 전우들의 복수 활극이다. 대장은 잭 리처. 1030 암호를 리처에게 전송한 니글리, 칼라 딕슨 그리고 오도넬이 바로 그들이다. 헬리콥터를 이용해 전우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적들과 이에 맞서는 환상 호흡 잭 리처팀의 추격전이 쉴 틈 없이 이어진다. 적의 실체에 근접한 바로 그 순간, 딕슨과 오도넬은 인질로 붙잡히고, 적과의 대화를 통해 딕슨과 오도넬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한 잭 리처.
난 이 장면이 좋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하는 말을 알아채는 이 장면이.
2. 『예의 없는 새끼들 때문에 열받아서 쓴 생활예절』
주위 사람들(어쩌면 예의 없는 바로 그 새끼들)에게 묻기 어려운 생활 예절을 친절하게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 있다. 다만, ‘~하지 마라’ 뒤에 바로 따라 붙는 ‘그러다 죽는 수가 있다(동년배용)’ 혹은 ‘단명하실 겁니다(손위 어른용)’가 너무 자주 나오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블로그에 연재되었던 것을 묶어서 책이 출간된 것을 고려하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하루에 한 번 정도 ‘그러다 죽는다’는 괜찮은 것 같다. 워낙 예의 없는 새끼들이 많아서.
이 책을 이제야 읽게 된 건, 나 또한 ‘예의 없는 새끼들’에 포함될 거라는 불안한 예감 때문이었고, 슬픈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 과거의 내가 저질렀던 개념 없는 행동들, 하지만 이제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행동들을 확인하며 뜨거운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친구들아 미안하다. 언니, 미안해요.
김불꽃의 Answer에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인구 밀집 지역에서 고강도의 친밀감과 간섭의 혼재 속에 찌들은 채 살아 가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인이라면 이런 대답도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3.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자본주의의 핵심에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적대 관계가 놓여 있었다. 마르크스가 오랫동안 경제학을 연구해서 (그 절정이 미완성 걸작인 <자본론>이다) 체계적으로 보여줬듯이 자본가들이 추구하는 이윤은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이해관계의] 충돌로 분열된 체제다. 그리고 그런 충돌은 모종의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 내적 본성의 산물이다. (10쪽)
이 문단을 읽고, 나를 부끄럽게 했으면서 내 부끄러움을 모두 가져갔던 고병권 선생의 『다시 자본을 읽자』를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자본주의적 경제형태가 작동하기 위해 착취가 전제되어 있다면, 다시 말해 상품 생산과 가치증식이 착취에 입각해서만 가능하다면 이야기가 아주 달라져요. 이렇게 되면 잣대를 대고 비뚤어진 것을 바로 잡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잣대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불법이 문제가 아니라 법 자체가 문제인 상황인 거죠. 마르크스의 비판이 요구하는 게 이것입니다. 체제의 원리에 입각한 교정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역사적 이행! (61쪽)
탄생에서부터 착취를 배태하고 있었던, 착취 자체가 전제였던, 확실한 몰락이 예견되었던 자본주의는 이제 누구의 견제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절대권력의 자리에 올랐다. 자본주의 체제에 항복한 개인만, 지역만, 국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돈의 힘, 돈의 흐름이 지배하는 세상에 당당히 맞설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어떤 사람이, 어떤 국가가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을까. 어떤 생각이, 어떤 상상력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가능할까, 그 일이.
4. 『역사 속의 페미니스트』
『가부장제의 창조』를 다 읽었다. 정희진, 시몬 드 보부아르, 베티 프리단, 리베카 솔닛, 벨 훅스, 실비아 페데리치 옆에 ‘거다 러너’라고 쓴다.
『가부장제의 창조』의 쌍둥이책 『역사 속의 페미니스트』 관련 페이퍼를 살피다가 『가부장제의 창조』에 대한 하이드님의 글을 읽었다. 나는 그 책이 14년만에 재출간되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 이야기는 훨씬 더 감동적이었다. 출판사에 재출간 요청전화를 하고 50권 공구의 총대를 맨 용감한 독자 1인의 활약이 없었다면, 내 책상 위에 이 책이 올라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독자 1인에게 나는 빚졌다.
시작은 비슷하지만 결론이 다른 경우도 있다.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도서관 서고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여성의 신비』를 읽은 직후, 나도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재출간 의사가 없느냐는 질문에 직원은 그럴 계획이 없다고 명랑하게 답했다. 그 날로 원서를 구입했다.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은 아예 출판사에 전화도 해보지 않고 원서를 구입해서는, 계획과는 다르게 겉표지인 케이트 밀렛의 얼굴만 집중 연구했다. 최근에 『여성의 신비』는 다른 출판사에서 『여성성의 신화』로 재출간되었고, 『성 정치학』 역시 곧 재출간된다고 한다.
혁명적 사고는 항상 억압받는 사람들의 경험을 격상시킴으로써 가능하였다. 봉건영주에게 감히 도전하려면 농노는 먼저 그의 생활경험의 의미를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만 했다. 해방적 사고가 혁명이론으로 발전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산업근로자는 ‘계급의식화’(class-conscious)되어야 했으며, 흑인들은 ‘인종의식화’(race-conscious)되어야만 했다. 억압받는 자들은 동시에 행동하고 학습하였다 – 새롭게 의식화된 개인 혹은 집단으로 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해방적(liberating)이다.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의식의 변화를 두 단계에서 일어나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최소한 당분간은 여성중심적(woman-centered)이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가능한 한 가부장적 사고를 떠나야 한다. (396쪽)
인류 문명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역사는 지워지고 잊혀졌다. 여성의 목소리는 거부당했고, 여성의 존재는 불투명했다. 혁명적 사고로 이행하기 위해서 의식은 변화를 통과해야 한다. ‘여성중심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다.
하이드님이 운을 띄우고, 다락방님이 깃대를 들고 흔들었으니 이제 읽는 일만 남았다.
당분간은 여성중심적으로 사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