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앉아 소파에 삐딱하게 기대 책을 읽는다. 엄마, 읽는 거 뭐야? 이거? 응, 제목이 뭐야?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 그제야 알겠다. 내가 읽는 책의 제목을 물어보는 이유를. 응, 이거 만화야. 물어보지 않는 걸 굳이 말해준다. 내가 좋아할 만한 만화겠나. 내가 읽을 만한 만화겠나. 고민하는 어린이 1인. 화난 여자들의 화난 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괴짜 탐정의 두번째 사건노트 2』로 돌아간다. 각자 자기 책으로, 자기 세계로 돌아간다.
1.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
나는 모든 책을 설렁설렁 읽는다. 읽고 나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생각해보니 교과서도 그렇게 읽었다. 꼼꼼하게 읽은 거라면 <성경> 뿐인데, 성경은 워낙 방대하다 보니 또 기억을 못 한다. 근래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읽는 내용을 금방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했다. 이런 책을 읽고 나서 ‘페미니즘의 역사’가 작게나마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면 좋으련만. 평생의 습관이 금방 바뀌지는 않을 것 같고, 갈 길은 멀다.
2. 여자라는 문제
부제는 <교양 있는 남자들의 우아한 여성 혐오의 역사>이다. 여자가 어떤 일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할 때의 근거는 여자의 뇌가 작다는 것이었다. 남자의 뇌보다 작고 더 부드럽고 폭신하고 가벼운 물질로 이루어진 여자의 뇌. 정리 정돈을 위한 여자의 뇌.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여자의 뇌.
여성이라면 연약한 손목과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지만, 가정부와 여자 노예, 탄광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남자같은 손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 했다.
3. 흑인 페미니즘 사상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가 서로 맞물리면서 작동하는 여러 억압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 없이는 지속되지 못한다. 세릴길케스가 주장한 대로, “흑인여성이 불평등의 전체 구조와 갖가지 방법과 형식으로 표현되는 인종차별주의에 담대하게 저항하는 것은 기존 질서의 유지에 지속적이고 다층적인 위협이 된다”. 흑인여성을 유모, 가모장, 복지수당 수령자, 섹시한 여자 등의 정형화된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은 흑인여성억압을 정당화하는데 복무한다. 흑인여성을 억압하는 통제적 이미지 controlling images에 도전하는 것은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핵심 주제이다. (129쪽)
이 책을 조금 더 일찍 읽었어야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열심히 읽어서 겨우 184쪽. 반납일을 5일 앞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4.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이주의 발견>으로 이 책을 꼽는다. 말 그대로 페미니즘 리부트의 시대. 출간되는 페미니즘 도서를 모두 읽을 수는 없다. 소설도 읽어야 하고, 시도 읽어야 하고, 또… 무더기로 출간되는 페미니즘 도서 중에서 이 책은 빛난다. 페미니즘과 관련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가 치른 곤욕부터 시작해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뜨거운(?) 고등학생들과의 페미니즘 공부는 실천하는 페미니스트의 면모를 보여준다. 여성혐오에 대한 아래 문단은 가히 압권이다.
대한민국에 여성혐오가 어디 있냐며, 이제는 남자가 더 살기 힘든 시대라 주장하는 남자들이 많다. 그런 분들 다 같이 모여 러시아 한번 가보시면 좋겠다. 늦은 밤 길거리를 누비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보도록. 현지인 친구에게 인종차별 때문에 밖에 나가기가 무섭다는 하소연을 했다가 ‘요즘 세상에 인종차별이 어디 있냐’는 핀잔을 들어보도록. 모든 백인이 그런 건 아니니 일반화하지 말라고, 자신을 욕하는 것 같아 기분 나쁘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면, 그럼, 아니 그래야만 당신도 여성들의 공포와 분노에 공감할 수 있을까? (80쪽)
남자가 페미니스트일 수 있을까.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어느 만큼 여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오바마 같은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딸 가진 아빠가 페미니스트가 되기 쉬울 것 같은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저자는 자신의 ‘페미니즘 사고’가 시작된 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에게는 더 자연(?)스럽다. 고단한 엄마의 삶이 자신의 삶에 대한 ‘예고편’이라는 사실을, 여자들은 불길하게 예감한다.
열두 살 아이의 눈에도 어머니는 힘겨워 보였다. 고통을 덜어드리고 싶어 가사노동을 시작했다. 빨래와 청소, 설거지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지친 얼굴로 퇴근한 어머니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들어가는 대신 이불을 덮고 소파에 눕는 것이 좋았다. “도와줘서 고마워, 아들.” 어머니는 나 혼자 끓여 먹은 라면 그릇을 씻어도 고맙다고 했다. 이상했다. 함께 먹고 같이 입고 모두가 더럽히는데, 씻고 빨고 청소하는 건 오롯이 어머니의 역할인 게 이해되지 않았다. (27쪽)
엄마, 내가 사랑하는 엄마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엄마를 돕고 싶다고 생각하는 열두살 아이.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엄마를, 내가 사랑하는 엄마를 도와야겠다고 결심하는 열두살 남자 아이. 뭉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