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아닌, 그제 아침의 일이다. 한밤에 꿈이 너무나 또렷해 안방에서 걸어나와 거실 책장 앞에 섰다. 없었다. ‘엘렌 식수는 없었다.

꿈 속에서 나는 똑같은 자리에 서 있었는데, 책장의 맨 왼쪽, 위에서 두번째 칸 앞이었다. 그 자리는 필립 로스 구역이다. 나는 그곳에 필립 로스의 책을 모아두었다. 그런데, 꿈 속에서 나는 필립 로스 구역에서 『엘렌 식수』라는 제목의 책을 뽑아 들었다. 꿈 속에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 엘렌 식수는 사람 이름인데, 제목이 '엘렌 식수'네? 나한테 이런 책이 있었나. 그럴 리가. 책을 뽑아 들고는 꿈에서 깼다. 일년에 한 두 번밖에 꿈꾸지 않는 나는, 아침에 다시 책장 앞에 섰다. 그럴 리가. 그럼 그렇지. ‘엘렌 식수라는 책은 없었다.

알라딘에 엘렌 식수라고 검색해 보니, 이 책이 제일 먼저 검색된다. 제목에서부터 카리스마를 뿜뿜하는 이 책, 『메두사의 웃음/출구』. 책표지의 제목은 『메두사의 웃음/출구』이고 알라딘 제목은 『매두사의 웃음 출구』로 표시된다. 나는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 책의 존재조차 알지 못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엘렌 식수를 꿈꿨는가.











어렴픗 떠오르는 책은 『부엌 청소로 오르가즘을 느끼는 여자는 없다』. 이 페이지를 찍었던 기억이 그제야 난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써야 합니다.

여자들에 대해 써야 합니다.

여자들은 글 쓰는 자리로 이끌어야 합니다.

여자들은 그들의 신체와 마찬가지로 난폭하게

그 자리를 박탈당해 왔습니다.

여성은 자기 자신의 해방 운동을 통해

세상 속으로, 역사 속으로 들어가듯, 글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엘렌 식수


여자들의 글쓰기에 대한 엘렌 식수의 글을 읽고 나니 여성적 글쓰기가 떠오른다. 나의 서재-서재 태그를 통해 여성적 글쓰기와 연결된 글을 찾는다. 그렇게 나는, 작년에 내가 썼던 글을 어렵사리 기억해낸다.




엘렌 식수Helene Cixous는 여성을 억압하고 침묵에 빠뜨리는 가부장제의 이항대립적 사고의 기반을 약화시키거나 무너뜨리는 언어로 여성적 언어를 말한다. 또한 이런 종류의 언어가 이른바 여성적 글쓰기ecriture feminine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고 믿는다. 여성적 글쓰기는 자유로운 연상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성된다. 여성적 글쓰기는 미리 정해진 올바른구성법, 합리적인 논리 규칙(경험 인지에 관한 협소한 정의에 근거하여 다양한 종류의 감정적, 직관적 경험을 불신하는, ‘머릿속에서만 머무르는 논리), 선형추론 linear reasoning(x 다음에는y, y다음에는 z가 온다는 식의 추론)등을 요구하기 마련인 가부장적 사고방식과 글쓰기 양식에 저항한다. (『비평이론의 모든 것』, 228)





신체와 마찬가지로 쓰는 자리, 말하는 자리를 박탈당한 여자의 위치에서, 쓴다. 페미니즘 현몽은 이렇게 내게 왔는데, 시작은 엘렌 식수이다. 알게 모르게 지나쳐 왔던 '엘렌 식수'를 이제 다시 읽게 될 것이고, 그리고는 쓰게 될 것이다. 그 다음, 그리고 그 다음, 그 다음 다음의 현몽에서 또 다른 인물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꿈꾸고, 책을 뽑아 들고, 책을 찾아 보고, 읽고 그리고 또 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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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5-08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님이 공부하시고 이제는 꿈도 꾸시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적어주시는 게 너무 좋습니다. 응원하고 지켜보고 있어요. 이 글을 보니 저 역시 짤막한(실제로 짧게 쓸지 어떨지 모르지만)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쓰러 가야겠어요. 슝-

단발머리 2018-05-13 19:3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의 응원에 제가 항상 파이팅하고 있다는 거.... 꼭.... 기억해 주세요.
같이 공부하는, 서로 응원하는 다정한 친구가 다락방님이라서, 참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