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임보일기
이새벽 지음 / 책공장더불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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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보다 더 아기자기하고 촘촘해진 그림체가 새로운 캐릭터들(임시보호하고 있는 아기 고양이들, 베리)의 사랑스러움을 잘 살린다. 다섯 마리 아기 고양이를 키우는 고충과 보람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데도 그 감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길고양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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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왕이 온다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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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포물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보기왕이 온다』의 책 예고편을 보고는 호기심이 생겼다. 주인공 히데키는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 '그것'을 처음 만났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고, 현관문 너머로 키가 큰 회색 형체가  보였다. 외할머니를 찾던 '그것'은 외할머니가 지금 집에 없다고 하자 외삼촌을 찾았다. 그런데 외삼촌은 수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히데키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외삼촌도 없다고 하자 '그것'은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세 번이나 불렀다. 그러자 가만히 누워있던 외할아버지는 현관문 너머의 존재에게 돌아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히데키에게 말했다. 문을 열어서도, 대답해서도 안 된다고.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한 히데키에게 '그것'이 다시 찾아온다. 그 뒤에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 궁금해졌고, 도서관에서는 항상 대출 중일 정도로 인기가 많은 책이라 어떤 책일지 더 궁금해졌다. 그러다 드디어 이 책을 손에 넣어 읽게 되었다. 


​  첫 장에서 느낀 공포는 비현실적인 공포다. 히데키를  위협하는 '그것'은 '보기왕'이라는 괴물이다. 자신에게 대답한 사람을 산으로 끌고 가 버린다는 보기왕은, 수십 년에 걸쳐 히데키를 찾을 정도로 집요하다. 안심하고 있으면 다시 돌아와 히데키와  그의 가족들을 노리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 보기왕과 접촉했던 사람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공포는 점점 더 커진다. 보기왕이 존재하고 자신에게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의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어 더 두려운 것이다. 


​  공포가 가장 극대화되는 순간은 마침내 히데키가 보기왕과 대면하게 되었을 때이다. 히데키가 자신을 도와주는 퇴마사 코토코의 지시대로 가족들을 집에서 내보내고 보기왕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 전화에 코토코가 남긴 음성 메시지는 정반대다. 당신을 집으로 오게 한 건 보기왕의 함정이고, 지금 당장 집에서 빠져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음성 메시지를 믿지 말고 자신의 지시를 계속 따르라는 핸드폰 속 코토코의 목소리와 집에서 나와야 한다는 음성 메시지 속 코토코의 목소리. 도대체 둘 중 어느 것을 믿어야 할까? 히데키는 핸드폰 속 코토코를 선택한다. 


​  히데키가 이제는 괜찮다고 안심하고 읽는 독자도 마음을 놓았을 때,  작가는 뒤통수를 친다. 핸드폰 속 코토코는 사실 보기왕이었고, 핸드폰 속 코토코가 내린 지시도 보기왕을 퇴마하는 것이 아니라 히데키를 유인하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속임수였다. 보기왕은 히데키 앞에서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낸다. 그래도 주인공이자 서술자이고, 영화판에서는 츠마부키 사토시가 연기하는 캐릭터인데 이렇게 빨리 죽을 줄 몰랐다. 이제 겨우 작품의 3분의 1 지점인데. 설마 정말로 죽었을까 싶었는데, 다음 장에서 무언가에 머리의 반을 먹힌 처참한 모습으로 히데키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히데키가 정말 죽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  비현실적인 존재 보기왕이 불러일으키는 첫 장의 비현실적 공포와 달리, 두 번째 장에서 느끼는 공포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 두 번째 장에서 서술자가 히데키에서 그의 아내 카나로 바뀌면서, 그들의 결혼 생활이 히데키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히데키는 자신이 누구보다 헌신적인 아빠이고 적극적으로 육아에 동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나가 생각하는 히데키는 자신이 좋은 아빠라는 생각에 도취된 사람이었다. 카나는 죽을 힘을 다해 아이를 낳았는데, 히데키는 속 편하게도 카나가 순산했다고 이야기한다. 아이를 돌보느라 책 한 페이지 읽기도 힘든데 히데키는 온갖 육아 서적을 사와서 읽어보라고 강요한다.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용변을 치우는 일처럼 정말 힘들고 귀찮은 일은 하지 않으면서 아이와 함께 노는 자신의 모습을 블로그에 올리고, 아빠 모임에 참여하는 데만 열중한다. 


​  여기에서 내가 느낀 공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여자로서 느끼는 공포다. 연애할 때는 누구보다 자상하고 다정했던 사람이라도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기는 힘들다는 것. 출산과 육아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도와주는 것은 '남'의 일에 힘을 보탠다는 것이지 자신의 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같이 하려는 사람을 만나기 참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아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운데 남편은 아이와의 행복한 모습만 블로그 포스트로 올려놓은 것을 보고 카나는 폭발해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녀와 같은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워졌다. 사회와 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카나나 나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들이 이런 공포를 느낄 것이다. 


​  또 하나는 관계에서 느끼는 공포다. 히데키는 카나와의 결혼 생활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카나는 히데키가 처참하게 죽었는데도 아무런 슬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져 있었다. 나는 상대방에게 잘하고 있고 나와 상대방의 관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상대방은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둘의 관계는 겉보기에만 괜찮지 속으로는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내게도 그런 관계가 있을까 두려웠다. 그리고 히데키처럼 '상대방에게 잘해주는 나'의 모습 자체에 도취되어 정작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배려하지도 않고 상대방을 더 힘들게 하지는 않았는지 두려워졌다. 


​  보기왕이 만들어내는 비현실적인 공포도 피부로 와 닿을 만큼 생생하게 구축되었지만,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뒤흔드는 것은 이런 현실적인 공포였다. 히데키 가족을 돕는 퇴마사 일행은 말한다. 보기왕은 사람 마음의 빈 틈을 파고 든다고. 보기왕이 히데키를 죽이는 데 성공한 것도 히데키와 카나 사이의 감정의 골을 교묘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마음에 틈이 생기면 어떤 슬프고 끔찍한 것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결국 모든 공포의 근원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  그러나 세 번째 장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전개는 이런 주제의식을 흐려놓는다. 수십 년 동안이나 히데키와 가족들을 쫓아다니며 자신과 접촉한 사람들을 끔찍하게 죽이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서 속일 정도로 교활하고 악랄한 보기왕은 정말 무시무시한 존재다. 그러나 퇴마사 코토코는 그렇게 무서운 존재인 보기왕을 너무나 쉽게 제압한다. 코토코가 진작에 나섰으면 히데키가 죽지도 않았을 것이고 딸 치사가 보기왕에게 끌려가지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토코를 의심하던 형사가 코토코가 경찰청의 높으신 분과 친분이 있는 관계라는 것을 알고 굽신거리는 모습은 일본 만화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던 클리셰라, 진지했던 소설의 분위기가 한 순간 우습게 느껴졌다.  


  코토코의 활약으로 보기왕에게 끌려갔던 치사가 무사히 엄마 품으로 돌아오는 결말에서 이제까지의 어두움과 공포가 모두 걷혀 개운했다. 하지만 보기왕이라는 존재가 자아내는 공포와 그 공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주제의식을 끝까지 끌고 나가는 뒷심이 부족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결정적인 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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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MB재산답사기 - 안원구의 쇼미더머니 시즌1 도곡동 땅, 다스 그리고 BBK
안원구.구영식 지음 / 비아북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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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특이한 제목의 책이다. 이 책은 어떤 책인가. 

B: 이명박 전 대통령(MB)은 평생 편법과 불법으로 부를 축적해 왔고, 국가기관이나 공기업까지 개인 재산을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부정 축재 은닉 재산을 되찾기 위해 만든 '국민 재산 되찾기 운동 본부'의 집행위원장인 안원구와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의 구영식 기자가 자신들이 보고 듣고 취재한 것, 시민들로부터 제보 받은 것을 토대로 이명박의 부정 축재 행각의 전말을 정리한 책이다. 


A: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B:  어렸을 때부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즐겨 읽어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패러디한 제목에 끌렸다...는 농담이고, 내가 시사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스는 누구 겁니까?",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같은 MB 관련 유행어들은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그 속뜻은 모르고 있었다. MB가 올해 3월에 구속된 것은 알고 있었어도 MB의 죄상들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는 못했다.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 나라에 무슨 적폐가 있었는지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A: 안원구는 어떻게 이명박의 부정 축재를 뒤쫓는 일을 시작하게 됐는가. 

B: 안원구는 30년이 넘게 국세청 공무원으로 일해 온 사람이다. 그는 대구 지방 국세청장으로 있을 때 포스코건설 세무조사를 하다 우연히 '도곡동 땅 실소유주 문건'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명박 정권에게 찍혀 2년 동안 억울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A: 이명박 정부는 왜 안원구를 구속시키면서까지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를  숨기려 했는가.

B: 이명박은 서울 강남구 도곡동 163-4번지(266평), 164-1번지(657평), 164-2번지(295평), 169-4번지(93평) 네 곳의 (현재는 164-6번지로 통합됨) 땅을 처남 김재정과 형 이상은의 명의로 사들였다가 비싼 가격에 되팔아, 시세 차익으로 248억 원을 벌었다. 그 중 190억 원이 김재정의 명의로 설립한 회사 다스로 들어갔다. 다스는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로 현대자동차의 협력 업체였다. 이 돈은 이명박의 수족 노릇을 했던 재미교포 출신의 금융인 김경준을 대표로 내세운 투자 자문 회사 BBK로 흘러들어가 주가 조작 자금으로 쓰였다. 즉,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가 이명박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부동산 투기와 주가 조작에 이명박이 개입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 이명박 정부로서는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를 숨기려고 할 수밖에 없다. 


A: 이명박은 왜 도곡동 땅도, 다스도, BBK도 다른 사람 명의로 해 놓았는가.

B: 이명박은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었는데, 현대건설 땅과 그 주변의 땅이었던 도곡동 네 곳의 땅을 자신의 소유로 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명박의 차명 인생이 시작되었다. 다수의 현대그룹 계열사 사장이었던 이명박이 본인 명의로 현대의 협력업체를 세우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다스도 김재정의 명의로 설립했다. 이명박은 다른 사람들의 명의 뒤에 숨어 천문학적인 액수의 금액을 불투명하게 처리하고 거기에서 이익을 얻었다. 적발돼도 명의를 빌려준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그만이다.


A: 이명박과 그 일당의 편법 행위로 인해 어떤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가. 

B: 이명박의 아들 이시형은 협력업체들을 인수하기 전 협력업체에 주던 일감을 줄여 적자가 나고 재정이 어려워지게 만든 뒤 싼 가격에 그 업체들을 사들였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사들일 때 자주 쓰는 악랄한 수법이다. 이로 인해 많은 중소기업들은 헐값에 회사를 내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MB와 김경준, 김경준의 누나 에리카 김의 주가 조작으로 1000여 명의 개인 투자자들이 1000억여 원의 손해를 입었다. 그 중에는 가정이 파탄나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한 사람도 있었다. 무엇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명박이 온갖 편법과 불법으로 쌓아 온 재산의 일부가 국민의 혈세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세금이 이명박의 배를 불리는 데 쓰인 것이다. 


A: 김경준과 에리카 김을 예전에도 알고 있었나?

B: 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나를 모르지만(웃음). 에리카 김이 쓴 에세이집 『나는 언제나 한국인』이 어렸을 때 집에 있어서 읽어 보았다. 그 책이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에리카 김의 책에서 김경준은 성미가 불 같지만 타향살이의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며 살아온 든든한 남동생으로 묘사되었다. 읽으면서  참 애틋한 가족애라고 생각했는데, 둘이 수많은 사람들의 가정을 파탄냈다는 걸 알게 되니 배신감이 든다. 


A: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B: 수많은 경제 용어들이다. 고등학교 때 사회탐구 과목를 경제로 선택했다면 난 대학에 못 갔을 것이다. 모르는 경제 용어는 일일이 네이버 사전 앱으로 검색해 가면서 읽었다. 게다가 MB와 관련된 기업이 줄기에 달린 고구마마냥 줄줄이 나와서 사실관계를 머릿속에 정리하기 쉽지 않았다. 


A: MB는 결국 구속되었다. 지난 번 특검과는 다르게 MB가 제대로 단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B: 지난 2007년 검찰 조사, 2008년 특검에서는 도곡동 땅, 다스, BBK의 실소유주가 이명박이라는 수많은 증거들이 나왔는데도 이명박이 실소유주가 아니라는 결론을 성급하게 내렸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인 이명박을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우리는 촛불을 들어서 박근혜를 물러나게 했다. 저자가 그랬듯이 나도 우리 국민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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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다른 악마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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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이 책을 부른다.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유명한 콜롬비아의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들 중에서도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 『사랑과 다른 악마들 Del amor y otros demonios』 을 다른 책 덕분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라틴아메리카는 처음인가요?』에서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Magical Realism, 사건과 인물은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꿈, 신화 등의 환상적인 요소들을 결합한 문학 사조)'을 소개했는데, '마술적 리얼리즘'의 예시로  이 소설을 들었다. 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다행히 우리나라에도 번역본이 나와 있었다. 강렬한 매력이 있는 이 소설을 만나게 되어서 행운이라고 느꼈다. 


​  이 책은 시작부터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소설은 1949년 콜롬비아의 어느 예배당 내 납골묘에서 한 소녀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 유골에 달려 있던 22미터가 넘는 풍성한 머리채는 독자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소녀가 죽은 뒤에도 그녀의 머리카락은 200여 년 동안이나 계속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야기는 200여 년 전 소녀가 아직 살아 있던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  소녀의 이름은 시에르바 마리아로,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던 18세기 콜롬비아의 항구 도시 카르타헤나에서 살고 있던 귀족의 외동딸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시장에 가다 미친 개에게 물렸다. 상처는 아주 가벼웠고 세 달 동안이나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열이 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시에르바 마리아가 광견병에 걸렸다고 의심했고, 상처를 다시 째거나 오줌을 마시게 하거나 독성이 있는 약을 먹이는 등 온갖 엉터리 치료를 해댔다. 멀쩡한 사람도 오히려 병이 나게 만드는 치료에 소녀가 반항하고 발광하자, 카르타헤나 시의 사제들은 소녀에게 악마가 씌었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수녀원에 갇혀 구마 의식을 치르게 되었고, 카르타헤나의 주교가 믿고 신뢰하는 젊은 신부 델라우라가 그녀의 구마 사제로 임명됐다. 시에르바 마리아의 병이 아니었으면 서로 마주칠 일도 없었을 두 사람은 생각지도 못하게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진다.


​  이 책의 중심 줄기는 시에르바 마리아와 델라우라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다. 사람들은 금지된 사랑을 하는 둘에게 악마가 씌었다고 말하지만,  진정한 악마는 사랑할 줄 모르고 증오만 하는 그들이다. 그러니 '사랑'은 두 사람이고, '다른 악마들'은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다른 사람들이다. '사랑'과 '다른 악마들' 중에서 '사랑'의 비중은 의외로 크지 않다. 남주인공인 델라우라는 작품의 3분의 1이 지난 뒤에야 등장하고, 작품의 중간 지점에서야 시에르바 마리아를 처음 만난다. 마르케스는 '다른 악마들'을 이야기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그가 간절히 바라고 지키고 싶은 것은 '사랑'이었겠지만,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방해하는 '다른 악마들'이 어떤 것인지 집요하게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악마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상에서 벗어난 것들을 광기, 이단, 악마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이다. 시에르바 마리아는 백인 귀족의 무남독녀로 태어났지만 부모는 그녀에게 무관심해 그녀를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었다. 무관심한 부모 대신 흑인 노예들의 손에 자라면서 시에르바 마리아는 스페인어와 기독교 대신 아프리카의 언어들과 종교를 자신의 언어와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백인 귀족이라기보다는 흑인 노예에 가까운 차림새와 언행을 보여준다는 이유만으로 시에르바 마리아는 악마가 들렸다고 오해받는다. 권력을 쥐고 있는 주류인 고위 기독교 사제들은 신의 사랑을 실천하기는커녕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단, 악마로 규정하고 고문하거나 죽인다.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그들이 바로 악마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이 소설에서 광신과 이성의 대립을 볼 수 있다. 18세기는 이성과 계몽이 빛나던 시대였지만 무지와 계몽의 과도기에 많은 사람들은 종교재판의 희생양이 되었고, 힘이 없는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성과 지식을 발휘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 소설은 200여 년 전 그 시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가 그 시대의 광기와 무지, 그로 인해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을 느끼게 한다. 그와 함께 우리는 사랑이 그 모든 것을 뚫고 나아가려다 좌절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  소녀는 단지 개에 살짝 물린 것이었고 가벼운 감기 때문에 열이 난 것일 수 있다. 멀쩡한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치료를 하니 아프고 겁이 나서 반항했을 뿐이었다. 지식인인 델라우라와 아브레눈시우는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권력이 없다. 권력을 쥔 자들에게는 소녀에게 악마가 씌었다는 것이 진실이고, 진실이어야 한다. 결국 델라우라는 소녀와 강제로 격리되어 평생 참회하며 살아야 했고, 소녀는 다른 사제들이 거행하는 고문이나 다름 없는 구마 의식을 치르고 목숨을 잃는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자르지 않겠다고 서원했던 소녀의 머리카락마저도 빡빡 깎였다. 사랑하는 델라우라와 결혼하면 스스로 자를 머리카락이었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한 때문이었는지, 고슴도치처럼 짧게 깎였던 소녀의 머리카락은 소녀가 죽은 뒤부터 수백 년 동안 계속 자라나 수십 미터나 되는 머리채가 되었다. 


​  이들의 사랑도 안타깝지만 '다른 악마들' 중에서도 눈에 밟히는 사람이 있다. 시에르바 마리아의 아버지 카살두에로 후작이다. 그는 사랑하지 않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방치했지만, 아픈 딸을 돌보면서 뒤늦게 부성애를 느끼게 된다. 그가 딸을 수녀원에 보낸 것도 딸이 구원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시에르바 마리아는 끝내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첫사랑 둘세 올리비아와는 오래도록 서로를 잊지 못했지만 사소한 어긋남들 때문에 끝내 이루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아내 베르나르다와 화해하려고 했지만, 베르나르다마저 귀족 부인이 되고 싶어 자신에게 접근했을 뿐 자신을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할 수 있다는 모든 희망을 잃은 후작은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다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난다. 광신과 증오 때문에 사랑하지 못했고 사랑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다른 악마들과 달리, 뒤늦게서야 사랑하려고 했지만 결국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도 못했던 그가 안타까웠다. 


​  사랑하는 이들, 사랑하는 이들을 악마로 몰아가는 진짜 악마들, 그리고 사랑하고자 했으나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한 이. 이들의 온갖 감정과 열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쓸쓸해졌다. '사랑'은 결국 '다른 악마들'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악마들'이 강제로 깎았던 소녀의 머리카락은 그녀가 죽은 뒤 계속 자라 광신, 권력자들, 세월에 저항하고 있다. 이 책에서 사랑은 승리하지도 행복한 결말을 얻지도 못했지만, 그 집요하고 강렬한 생명력으로 우리가 사랑의 힘을 믿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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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러브 디스 파트
틸리 월든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디어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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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평이나 영화평을 읽을 때 글쓴이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책(영화) 이야기를 읽고 싶은 건데 왜 내가 알고 싶지도 않은 글쓴이의 사생활 이야기를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작품이어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감상이 나오는 것은, 그 작품이 각자의 삶과 맞닿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간결해서 그만큼 각자의 삶과 맞닿을 여백이 많은 작품들이 있다. 미국의 만화가 틸리 월든의 만화 『아이 러브 디스 파트』도 그런 작품이다. 


 

 이 만화는 두 10대 소녀 레이와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독자들은 둘의 사랑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7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인데다 기승전결이나 시간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이 서로 어긋나는 모습 뒤에, 엘리자베스가 레이에게 "네 연주 좋았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둘이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인지 둘이 화해하는 모습인지 모호하다. 대사보다 이미지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대사들도 대부분 짤막하다.  "너 나 좋아하니?""엄청.""다행이다, 나만 그런 거면 어쩌나 했는데." "널 어떻게 미워해." 일상적이고 단순한 대사지만 우리도 언젠가 누군가와 나눠봤을 대화들이다. 그 누군가 때문에 이 단순한 대사들이 마음에 파장을 남긴다. 간결하면서 서정적인 그림체와, 흑백과 보라색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색 구성이 둘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담백하면서도 감각적으로 전한다. 흑백 사이에 간간이 들어간 보라색이 달콤쌉싸름한 느낌을 더한다.


  독특하게도 이 만화에는 배경 건물에 비해 레이와 엘리자베스가 더 큰 모습으로 등장하는 컷이 많다. 배경의 건물이 미니어처이거나 둘이 킹콩이라도 되는 것처럼. 왜 이런 특이한 연출을 했을까? 둘의 세상에서 가장 큰 부분이 서로였기 때문이 아닐까. 서로가 있는데 등 뒤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300미터가 넘는다는 것이 뭐가 중요할까. 제목인 '아이 러브 디스 파트',  엘리자베스가 레이와 이어폰을 한 쪽씩 끼고 음악을 듣다가 말한 한 마디 "이 부분이 제일 좋아"에서 '이 부분'은 음악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서로였을 것이다. 내 세상에서 제일 큰 부분도, 제일 좋은 부분도 바로 너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나에게도 이어폰을 한 쪽씩 끼고 노래를 같이 들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함께 들은 노래보다 함께 부른 노래와 서로에게 불러준 노래가 더 기억에 남는다.  미술관으로 함께 걸어가는 길에 그애가 나지막하게 성시경의 <내게 오는 길>을 불렀다. 둘이 등산을 하면서 김동률의 <출발>을 같이 신나게 불렀다. 나는 등산을 싫어하지만 그애와 함께 있는 게 좋았다. 그애가 잠 못 드는 밤에는 스탠딩에그의 <Little Star>를 그애에게 불러줬다. 그애는 우울해하는 나를 위해 메신저로 자기가 직접 기타를 치며 부른 노래를 보내주었다. 그애가 사는 집 앞 골목을 팔짱 끼고 함께 걸으면서, 가로등불 켜진 저녁 골목길을 함께 걷고 있는 이 순간을 그리워할 날이 분명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을 못 견디게 그리워한 날들도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 순간을 아주 조금 그리워한다. 이 만화를 읽을 때는 아주 조금 더 많이 그 순간이 그리웠다.


참고기사: 「세계의 한 부분, 바로 너를」, 2018.10.25,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674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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