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쉘터 공간 - 예술과 공학이 만나다 스마트 쉘터 공간 1
고경호 외 지음 / 미진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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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쉘터shelter'는 피난처, 은신처, 오두막, 수용소, 쉼터, 주거지, 보금자리 등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단어이다. '스마트 쉘터smart shelter'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더 기능적이고, 더 경제적이고, 더 안전하고 편안하며 지속 가능한 주거지를 말한다. 자연재해와 테러, 전쟁은 과학 기술이 발전한 지금도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고, 어떤 대책을 써 봐도 주택난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어느 때보다 우리를 지킬 수 있는 보금자리가 필요한 때다. 그래서 2015년 9월부터 스마트 쉘터 공간을 만들기 위한 철학, 건축, 예술, 공학 분야에서의 합동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책은 그 3년 동안 연구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작품 사보이 하우스. 벽이 아닌 기둥만으로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는 필로티 구조는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지진에 취약하다.


  1부에서는 미술을 통해 '더 좋은 공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고민하고 있다. "좋은 공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단 하나의 정답은 없다. 어떤 사람은 기능적이고 경제적인 공간이 좋은 공간이라고 할 것이고, 다른 사람은 보기에 아름다운 공간이 좋은 공간이라고 할 것이다. 모더니즘에서는 편리하고 합리적으로 기능하는 공간, 이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공간, 경쾌하고 명확해서 시각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있는 공간을 이상적인 공간으로 보았다. 그러나 기능과 아름다움 모두를 갖춘다는 것은 모순이다. 건물을 벽이 아닌 기둥만으로 지탱하는 필로티piloti 구조는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건물 전체에 투명하고 가벼운 느낌을 주지만, 지진에 의한 진동에는 취약하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모더니즘 건축의 획일성에 반발해 건물 하나 하나의 개성을 강조하고, 모더니즘 건물이 배제했던 장식을 다시 건물에 넣거나 한 구조가 한 가지 기능을 갖는 모더니즘 건물과 달리, 한 구조가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개성적으로 보였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도 그 장소가 가지는 개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비슷한 모습을 가진다. 두 건축 모두 인간의 실질적인 삶, 그 장소에서 사는 사람들 고유의 전통과 개성, 삶의 방식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 하우스>. 누나 마르가레테를 위해 비트겐슈타인이 건축 전 과정을 전담한 이 저택에서 현실의 문제를 가리는 전통 양식, 화려한 장식은 배제되어 있다. 


  미술가들과 건축가들은 인간의 삶이 공간에 반영되게 하려고 노력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누나 마르가레테가 살 저택 '비트겐슈타인 하우스'의 건축을 맡았다.(기초 설계는 비트겐슈타인의 친구였던 파울 엥겔만이 시작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설계 초안의 일부를 변경하고 내부 설비 디자인과 건물의 완공에 이르는 전 과정을 전담했다.) 집의 중심이 되는 지상 1층을 예술가들이 공연하고 교류하는 장으로 만든 것은 근대 이전부터의 가문의 전통을 따른 것이었지만, 전통적인 양식과 화려한 장식은 거부했다. 그에게 윤리는 삶에서 가치 있는 것, 진실로 중요한 것을 탐구하는 것이었고, 집을 짓는 것은 거주자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는 저택이 있던 빈의 심각한 주택난과 계급 갈등을 가리는 전통 양식과 장식을 배제했다. 그러나 이 공간조차도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거친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순수하고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곳 저곳을 떠돌다 낡은 오두막집에 머물며 철학을 연구했다. 


안드레아 지텔의 작품 <A-Z 이스케이프 비히클>에 사용자가 들어가 있는 모습


 한편 미국의 미술가 안드레아 지텔은 다양한 쉘터 작품들을 통해 사람들이 도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1997년 처음 전시되었던 <A-Z 이스케이프 비히클 A-Z Escape Vihicles>은 바퀴가 달린 욕조 모양의 스테인리스 통 두 개가 맞붙어 있는 형태의 작품이다. 작품 내부는 사용자의 취향에 맞게 꾸미고 변경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사회와 인간관계에서 겪는 스트레스, 억압, 구속에서 벗어나 한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현대인을 위한 쉘터이다. 그녀 밖에도 여러 미술가들과 건축가들, 디자이너들이 유목민들처럼 일시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공간, 누구나 조립하고 공유하고 배포할 수 있는 공간을 기획하고 있다. 주택 문제에 시달리는 서민들이나 전쟁으로 집을 잃은 난민들까지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에게 대안이 되어 주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2부에서는 공학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스마트 쉘터를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건축가 김덕수는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과 보행자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 공간, 통합정보센터가 도시에서의 정보 처리의 중심 역할을 하고, 대중교통의 환승 거점에 공용 사무 시스템, 다목적 문화 시설이 설치되며 외곽 지역에는 직접 농산물을 생산해 지하 구조물로 도시 곳곳에 농산물을 배송하는 실내 재배 시스템이 설치된 도시 공간을 제안한다. 건축가 송복섭은 스마트 쉘터에서 기능성, 경제성, 지속 가능성, 안정성, 편안함, 사회적 기능, 미학적 아름다움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고려되어야 할 특성들이다. 그리고 공간을 건물-가로-시설-지구-도시-광역 등의 단위로 분류하고 공간 단위에 따라 체계적으로 스마트 도시를 계획해야 한다고 말한다. 건축가 김언용은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전 세계의 도시가 개성을 잃고 획일화될 수 있고, 효율적인 도시 관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시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비판들을 이야기하면서, 스마트 공간이 가진 위험성 또한 잊지 않는다. 건축가 지승열은 아직은 사람의 뇌파(뇌세포가 활동할 때 일어나는 전류)가 전달하는 정보에 기반한 자동화 시스템이 스마트 쉘터에 적용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뇌파와 뇌파를 이용하는 자동화 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더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3년 동안의 연구 결과라지만 아직까지는 큰 그림을 제시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 큰 그림을 실질적인 세부 내용으로 채워나가는 것은 후속 연구에서 이루어질 일이다. 사람들이 주택난, 자연재해, 전쟁과 테러의 위협에서 벗어나 더 안전하고 편리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 고민하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이 책에서는 예술과 공학이 서로 접점을 가진다기보다는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서로의 접점을 찾으며 더 좋은 생각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도판이 작아서 본문 내용을 이해하는 데(특히 공학 파트의 스마트 쉘터, 시스템에 대한 도판들) 도움이 되지 못하고, 2부의 공학 파트가 공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이 읽기에 좀 어려운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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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노트 - 알고 싶은 클래식 듣고 싶은 클래식
진회숙 지음 / 샘터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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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대해 처음 알게 됐을 때 '책에 실린 QR 코드로 클래식 음악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갔다. 종이로 된 책 중에서 QR 코드를 활용하는 책은 처음 봤으니까. 음악은 백 번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직접 듣는 것이 더 나으니, 음악을 주제로 하는 책으로서는 음악을 직접 들려주는 게 큰 장점이 될 것이다. (이미 3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신기한 신제품을 처음 써 보는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

  친절하게도 책 서두에서부터 QR 코드 사용법을 가르쳐주고, QR 코드를 비교적 정확히 인식해 주는 앱들까지 추천해 준다. 사용법대로 QR 코드를 인식하니 정말 해당 곡의 유튜브 영상이 뜬다.


책에 실린 QR 코드를 QR 코드 앱으로 스캔하면 해당 곡의 유튜브 영상 링크와 연결된다.


실제로 책 속 QR 코드를 스캔하면 이런 영상 링크가 뜬다. 이 영상은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중 남주인공 카바라도시가 부르는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


  안타까운 것은 유튜브의 특성상, 해당 계정이 사라졌거나 저작권 문제로 영상이 삭제되는 등의 문제로 지금은 연결되지 않는 링크가 여러 개 있다는 것이다. 해당 링크가 보전되도록 수시로 점검, 업데이트하겠다지만, 출판사가 마냥 이 책만 관리할 수는 없으니 힘든 일일 것이다. 게다가 이 책에 실린 QR 코드는 320여 개나 된다. 그래서 링크가 연결되지 않는 경우에는 내가 직접 유튜브에서 곡 이름으로 검색해서 다른 버전을 찾아 들었다. 320여 개의 곡을 다 듣다 보니 이 책을 다 읽는 데 거의 한 달이 걸렸다. 덕분에 한 달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들었다. 


책에 실린 QR 코드로 볼 수 있는 영상 중 하나.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중 '올림피아의 아리아'. 기계 인형 올림피아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인데, 올림피아 역 소프라노의 기계 인형 연기가 인상적이다.


 QR 코드로 직접 해당 곡을 들으니 텍스트로 된 설명만 읽을 때보다 훨씬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프시코드 같은 옛 클래식 악기 연주를 직접 들으니 그 악기가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연주하며 어떤 음색을 지녔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들에서 피아노 멜로디 자체는 아름답지만 오케스트라 파트는 피아노의 반주 수준으로 빈약하다는 이야기도 직접 들으니 납득이 됐고. 아리아의 경우는 그 곡이 오페라 안의 어떤 장면에서 나오는지를 직접 볼 수 있어, 그 곡이 어떤 맥락에서 불리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오페라 속 성악가들의 연기와 의상, 무대를 함께 볼 수 있어 더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 책은 QR 코드라는 장치에만 기대지 않는다. 클래식 곡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이나, 클래식 음악가들의 사생활 이야기로 내용을 채우는 책들과 달리 이 책은 클래식 음악의 ABC부터 차근차근 알려준다. 클래식 음악의 역사부터 클래식 악기들, 음악 이론과 곡의 형식, 음악 상식들까지. 오케스트라에는 왜 지휘자가 필요한지, 왜 오보에의 A음으로 오케스트라 악기 전체를 조율하는지, 현대에 탄생한 12음 기법은 어떤 거인지, 실내악, 환상곡, 교향곡, 협주곡은 어떤 형식의 곡인지 등등. 초중고등학교 음악 시간 이후로 음악 이론은 잊어버렸어도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지식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다. 

 내용의 질에 있어서나 QR 코드라는 새로운 장치에 있어서나 다른 클래식 책들과 차별화되는 책이다. 
한 번만 본 지식은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지니 곁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읽으면 좋을 것이다. 워낙 많은 곡들이 소개되어 있으니 마음에 드는 곡을 종종 꺼내 들어도 좋을 것이고. 한 번 읽어보고 끝내기보다는 곁에 두고 오래 읽어 보고 싶다. 

P.S 1. 저자는 미술 비평가 진중권의 누나다. 가족이라고 해서 다 닮지는 않지만, 누나나 동생이나 각자의 분야를 대중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데 재능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멜라니 C가 부른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넘버 I Don't Know How To Love Him


정선아가 부른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의 한국어 버전 '어떻게 사랑하나'


P. S. 2. 오페라를 원어로 공연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넘버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의 원곡과 한국어 버전을 예로 들었는데, "...하나, ...했어, 라는 유아적인 뉘앙스의 종결어미 때문인지, 예수에 대한 사랑으로 갈등하는 마리아의 고뇌가 전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라는 말에서 한국어 버전을 깎아내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원어 공연의 중요성으로 든 근거들은 납득이 되지만 '유아적인 뉘앙스'의 종결어미라니. 

  오페라와 같은 이유로 수입 뮤지컬은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원어로 공연해야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는데, 라이센스 뮤지컬도 좋아하는 뮤덕으로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저자가 예시로 든 두 영상 중에서는 나는 오히려 한국어 버전에 더 공감하고 감동했다. 한국어로 개사되면서 원어 가사에 맞춘 리듬과 강세가 어그러지고 가사 속 미묘한 뉘앙스, 의미가 뭉뚱그려지는 것은 인정하지만, 모국어로 가사를 들었을 때 노래의 감정이 더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 의미 전달은 한국어 자막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했지만, 무대와 한국어 자막으로 시선이 분산되는 것보다 한국어로 바로 듣는 것이 의미를 전달하는 데 더 유리하다. 그리고 프랑스 뮤지컬의 라이센스인 <노트르담 드 파리>나 미국 뮤지컬의 라이센스인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넘버들처럼 의미 전달에 그치지 않고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음악적인 운율 모두를 살리는 번역이 있다. 이런 좋은 번역, 좋은 라이센스 공연도 필요하고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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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앉아 금琴을 타고 샘터 우리문화 톺아보기 2
이지양 지음 / 샘터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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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즐겨듣는 음악의 범위는 아주 한정적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나 좋아하는 뮤지컬들의 넘버 외에는 아는 음악이 얼마 없다. 특히 국악은 중학교 때 수행평가 때문에 본 공연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국악 공연일 정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옛 글 속의 우리 음악 이야기를 모은 책 『홀로 앉아 금을 타고』를 알게 되었다. 우리 음악에 관심을 가져오진 않았지만 우리 역사에는 관심이 많았고, 그 동안 잘 몰랐던 것에 호기심이 생겨 읽어보기로 했다. 

  이 책은 한문학자 이지양이 고문헌 속의 우리 고전 음악 이야기에 대해 쓴 글들을 모은 책이다. 첫 번째 글이 우리 음악을 잘 모르는 지금 세대에게서 느끼는 안타까움을 담은 글이니, 저자의 목표가 우리 음악을 더 친숙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 이 책을 읽은 뒤에도 국악은 내 귀에서 아직 멀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초중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웠던 국악 지식은 기억 저 편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그러니 저자가 말하는 평조, 계면조가 어떤 조성이고 도드리장단, 중중모리장단이 어느 정도의 박자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런 국악 용어들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저자가 국악 전공자가 아니라 국악을 사랑하는 한문학자이기 때문에 서문에서부터 음악 이론에는 무식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출판사에서라도 용어 설명을 추가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음악은 글로 읽는 것보다 귀로 들을 때 확실히 아는 것인데, 이 책은 음악에 대한 책이라기보다 음악을 이야기한 글들에 대한 책이다.


  이 책에서 글로만 나오는 우리 음악이 궁금해 유튜브에서 찾아 들었다. 그런데 글로 읽는 노래와 직접 듣는 노래는 전혀 달랐다. 클래식 음악에서의 '라르고largo(느리게, 표현을 풍부하게)'가 빠르게 느껴질 정도로 느릿느릿한 가사와 시조창에 충격을 받았다. 책에 나온 가사가 '봄잠을 느지막이 깨어 중창을 반가이 걷으니'인데 실제로 들어보면 '보오오오오오옴자아아아암으으으을 느으으으으으지이이이이이이마아아악이이이이이 깨어어어어어어으 주우우우웅차아아아앙으으을 바아아아아안가이이이이이 거어어어얻으으으니'이다. 과장이 아니다. 그리고 한시를 우리말로 풀어쓴 게 아니라 한자음 그대로 읽는 가사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坐撫樹而終日 濯淸天而自潔'을 "앉아서 나무를 어루만지며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맑은 냇물에 몸을 씻어 스스로 깨끗하게 하기도 한다"고 풀어쓰는 게 아니라 '좌무수이종일하고, 탁청천이자결이라'라고 한자음 그대로 읽는 식이다.) 아직은 국악보다는 클래식이, 클래식보다는 가요가 귀에 익숙하고 편하다. 

  하지만 국악 속에 배어 있는 옛 사람들의 생활상은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배를 타고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을 보낼 때 부르는 노래 <배따라기>는 항구가 있는 고을마다 있다고 한다. 배를 타고 중국이나 일본으로 사신이 떠날 때도 <배따라기>를 불렀다고 하는데, 아예 떠나는 것도 아니고 잠시 여행을 다녀 오는데 이별이라며 슬퍼하는 게 언뜻 생각하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여행을 갔다 사고를 당해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만큼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는 여행길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그리고 판소리 <춘향가> 중 이몽룡이 과거를 보는 장면인 <춘당대시과> 부분은 조선시대 과거 시험 풍경을 어느 역사 기록보다 생생하게 전한다. 

  우리 옛 노래에 중국 한시와 고사에 관련된 가사가 왜 이렇게 많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문화는 그것의 의미를 알고 제대로 향유하는 사람들의 것이니, 처음에 누구에게서 나왔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저자의 말에 납득이 되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한자와 중국 문학은 널리 공유되던 문화적 자산이었을 테니까. 근대 이전의 유럽 문화권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한 예술을 공유했던 것처럼. 서민들이 즐기는 판소리, 민요에서도 중국 옛 고사와 한시가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중국 한시와 고사가 뿌리 깊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 같다. 


<무신진찬도병> 중 '선유락'이 그려진 부분.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불러주던 노래 <배따라기>는 외국 사신을 떠나보낼 때도 불렸다. 이 때 <배따라기>에 맞추어 기녀들이 추던 무용이 선유락이다.


신윤복, <서생과 아가씨>. 이 그림은 변방 지역의 거친 분위기를 그린 노래 '관산융마'에 대한 글과 함께 실려 있지만,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옛 노래들의 정서와 잘 어울린다.


그리고 책 중간중간에 들어간 옛 그림들이 이해를 도우면서 전통적인 분위기를 살렸다. 모든 그림이 책의 내용과 딱 맞는 것은 아니지만, 책에 소개되는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을 그린 그림을 보면서 그 음악이 실제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고, 가사와 어울리는 산수화나 풍속화를 보면서 그 노래 특유의 정취를 더 짙게 느꼈다. 

  우리 음악을 기초부터 제대로 알고 싶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책은 아니다. 나처럼 읽고 나서도 국악이 아직은 귀에 낯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옛 우리 음악 속의 마음들은 와 닿는다. "누군가 저 멀리 있는 이를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믿음이 가는 것이다. 자기와 직접 인연이 닿지 않아도 자기 내면의 온기를 늘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있는 사람은, 그리운 대상이 없어서 누구도 그리워하지 않고 삭막하게 살아가는 사람보다 미덥고 정이 가지 않나?"(「그녀와 놀고픈 봄날의 꿈-춘면곡」 중)
"...칭찬조차 다시 상처가 되고 마는 그런 때, 메시지는 없이 사람의 따뜻한 목소리만으로 얼러 주는 <구음 시나위>가 진정으로 마음을 달래줄 것이다."(「영혼을 얼러 주는 가락-구음 시나위」 중) 아직 국악이 귀에 낯설다 해도, 우리 옛 음악 속에 담긴 옛 사람들의 마음을 전해주었으니, 우리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의 씨앗은 심어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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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 그림에서 찾은 13개 퍼즐조각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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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는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칭송 받는다. 하지만 <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 같은 그의 작품들을 보면 이전의 회화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린 평범한 구상 회화로 보인다. 그런데도 현대의 저명한 철학자들과 미학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현대 미술의 씨앗을 보았다. 도대체 어떤 점에서 마네가 현대 미술을 시작했다고 하는 걸까?  『마네 그림에서 찾은 13개 퍼즐 조각』 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와 조르주 바타이유, 미국의 미술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마네론(論)을  소개하면서, 마네가 어떻게 서양 회화의 전통에서 벗어나 현대 미술을 시작했는지 살펴보고 있다. 


  푸코는 마네가 공간 처리, 조명, 관객의 자리, 이 세 가지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이루었고, 그것이 20세기 현대 미술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제목인 '13개 퍼즐 조각'은 푸코가 마네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기 위해 선택한 13개의 작품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 <오페라 극장의 가면무도회>,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보르도 항구>, <아르장퇴유>, <온실에서>, <맥주홀의 종업원>, <철도>, <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 <피리 부는 소년>, <발코니>, <폴리 베르제르 바>를 말한다. 


에두아르 마네, <오페라 극장의 가면 무도회>, 1873-1874.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이 발명된 이후로 서양 회화에서는 원근법을 이용해 2차원의 캔버스 위에 3차원의 공간을 그렸다. 하지만 그림 속 공간은 환영이고 속임수일 뿐이고, 그림의 진실은 그림이 물감을 바른 평면이라는 것이다. 마네의 <오페라 극장의 가면 무도회>에서는 사람들이 벽처럼 그림을 가득 메우고 있어, 공간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두 개의 커다란 기둥이 그리는 수직선과 그림을 가로지르는 발코니가 그리는 수평선이 직사각형 캔버스의 형태를 반복하고 있다. 마네는 이렇게 그림 속 깊이는 실제가 아니고, 그림은 직사각형 캔버스라는 평면 위에 그려졌다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헤라르트 판 혼토르스트(1590-1656), <중매쟁이>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마네는 조명을 통해서도 그림이 물감을 칠한 평면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서양 회화에는 두 가지 조명이 있다. 내적 조명은 그림 안에 그려진 빛이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헤라르트 판 혼토르스트의 그림 <중매쟁이>에서 그림 속 촛불은 사람들의 얼굴에 명암을 만들어 인물에 볼륨감을 주고, 장면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명암 또한 작품에 입체감을 주는 수단이었다. 반면 외적 조명은 그림이 걸린 전시실의 조명 등 화폭 밖의 실제 빛이다. 그러나 얇은 헝겊인 캔버스 안에 실제 빛이 들어 있을 리 없으므로, 그림 속의 빛 또한 환영, 거짓말에 불과하다. 마네의 <올랭피아>에서는 배경이 어둡게 처리되어, 내적 조명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올랭피아의 몸은 명암 처리가 거의 되지 않아 납작하게 보인다. 마네는 그림 속 공간의 깊이와 인물의 입체감을 지워버림으로써, 그림이 현실을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물감과 캔버스로 이루어진 물질, 그림 그 자체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림이 현실을 재현해야 한다는 목적에서 벗어나 그림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된 것, 미술 그 자체를 위한 미술이 된 것이 현대 미술의 시작이었다.

에두아르 마네, <폴리 베르제르 바>, 1881-1882.


  그리고 관객의 자리에 있어서도 마네는 서양 회화의 전통을 깨뜨렸다.관객은 어느 자리에서 마네의 작품 <폴리 베르제르 바>를 보는 것이 좋을까? 당연히 그림 속 종업원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그림 한가운데 앞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종업원의 뒷모습과 종업원과 대화하는 남자의 앞모습이 그림 오른쪽에 있다. 이 그림의 배경은 거울인 것이다. 그런데 관객이 그림 속 종업원을 바라보는 위치가 그림 한가운데라면, 종업원의 그림자는 종업원 바로 뒤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림 속 종업원의 그림자는 종업원이 서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한참 떨어진 자리에 있다. 종업원을 정면으로 보는 시점과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보는 시점, 이 두 시점이 한 화면 안에 있는 것이다. 원근법이 발명된 이후로 서양 회화는 한 시점에서 본 장면을 담고 있었고, 관객의 자리는 원근법에 따라 최적의 장면을 볼 수 있는 정확한 한 지점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마네는 원근법의 고정된 한 시점이라는 전통을 깨뜨리고 여러 시점을 한 화면에 담는 방법을 통해, 그림은 관객이 자유롭게 자리를 옮기면서 볼 수 있는 하나의 사물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도 마네가 그림의 물질성과 평면성을 강조한 것이 현대 미술, 모더니즘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모더니즘이 한 분야가 자신의 정체성, 순수성을 찾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근대 이전 미술은 문학처럼 성경이나 신화 속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뛰어난 기교로 조각과 같은 입체감을 표현했다. 마네는 그림의 물질성 평면성을 강조함으로써, 그림이 문학에 종속되지 않고 그림만의 특징인 평면성을 인정해서 회화만의 정체성, 순수성을 보여준 것이다.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카드로 만든 성>, 1734-1735.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


  푸코와 그린버그가 마네의 그림을 르네상스 이래로 수백 년 동안 이어졌던 원근법이라는 전통을 깬 것으로 생각한 반면, 마이클 프리드는 프랑스의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드니 디드로의 회화론을 깬 것으로 보았다. 디드로는 연극에서 배우가 관객을 의식하면 자연스러운 연기를 할 수 없기에, 배우는 관객과 무대 사이의 가상의 벽, 즉 제4의 벽이 있다고 생각하고 연기에 몰입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회화 속 인물들이 관객에게 보이기 위해 부자연스럽고 과장된 표정과 몸짓을 하는 것 또한 과장된 연극성이라고 비판했다. 프리드는 디드로의 회화론 이후 프랑스 회화에서는 그림 속 인물들이 관객의 존재를 잊어버린 척 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화가 샤르댕의 그림 <카드로 만든 성> 속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카드로 성을 쌓는 데 열중하고 있는 소년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연극이든 그림이든 엄연히 관객들이 바라보는 대상이다. 마네는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관객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림 속 인물들을 통해, 관객의 존재와 그들의 시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림이 누군가가 바라보는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림이 누군가가 바라보는 가상의 장면이라는 것을 숨기려 했던 디드로 이후 회화의 전통을 깬 것이다. 


에두아르 마네, <늙은 악사>, 1862.


  한편 바타이유는 마네가 미술을 지식에서 해방시켜 미술의 본질을 회복시켰다고 보았다. 원시인들은 단지 즐거움을 위해 생계를 유지하는 데 전혀 필요 없는 동굴 벽화를 그렸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서양 미술은 성경이나 신화, 과거의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었고, 배경 지식이 있어야 그 그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나열되어 있는 <늙은 악사>처럼, 마네의 그림은 어떤 이야기도 교훈도 전달하지 않는다. 예술은 원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는데, 아무런 의미도 지식도 전달하지 않는 마네의 그림은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면서도 그로 인해 황홀함과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이 네 명의 학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렇다. 마네는 성경이나 신화, 역사 속 이야기를 재현하고 교훈을 전달해야 하는 목적에서 미술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실제처럼 어떤 공간과 장면을 재현한 그림이 단지 평면 위에 물감으로 그려진 허구, 하나의 사물이라는 것을 자신의 그림으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어떤 목적에 얽매이지 않고 미술 그 자체를 위한 미술, 현대 미술이 시작된 것이다.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을 과대평가한 감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키요에를 접하기 이전 서양 회화들은 어두운 색뿐이었고, 우키요에가 밝고 순수한 색채를 일깨워 주었다고 했는데, 빛과 어두움의 대비를 강조시켰던 바로크 회화 이전, 사물의 색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이전의 서양 회화들은 화려한 색채로 채워졌었다. 우키요에가 서양 회화에 밝은 색채를 가져왔다기보다는 잊혀져 있던 밝은 색채를 다시 불러왔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우키요에가 유행하던 시기 조선의 화가들은 중국의 산하와 풍속을 그렸고, 풍속화가 있어도 크기가 너무 작고 수적으로도 빈약하며 색채가 단조롭다고 말했다. 조선의 풍속화가 우키요에만큼 서민들에게 널리 퍼지지는 못했지만, 중국이 아닌 우리의 현실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리고 그림의 크기와 색채만으로 그 그림의 예술적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역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표상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 기억이 없다고 했는데,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는 당시 조선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김준근의 풍속화 1500여 점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 조선의 모습을 세계에 알렸다. 우키요에가 서양 현대 미술에 미친 영향은 잘 알지만, 우키요에와 우리 미술을 비교하다 보니 우리 미술을 다소 폄하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단점이 있지만 이 책은 마네의 일생, 마네의 작품으로 인해 일어난 스캔들 같은 단순한 배경지식을 넘어 마네의 그림이 어떻게 서양 미술사의 전통을 깨고 현대 미술의 기틀을 이루었는지 더 깊이 이해하게 한다. 이 네 명의 마네론에 대한 저자 자신의 생각도 함께 썼다면 더 좋았겠지만, 대중 독자들에게는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론들을 쉽고 친절하게 설명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미술이 너무나 난해하게 느껴지는 지금, 마네를 통해 현대 미술이 이전의 미술과 어떤 면에서 다른 것인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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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떻게 보이세요? -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의 빛을 따라서 아우름 30
엄정순 지음 / 샘터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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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 있다. 코끼리의 어느 한 부분만 만져보고 코끼리가 이렇게 생겼다고 이야기하는 시각장애인들처럼,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신이 아는 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오랜 시간을 두고 코끼리의 전체를 만져보고, 다른 사람이 만진 부분과 자신이 만진 부분을 합친다면 코끼리의 전체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화가 엄정순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는 이런 상상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보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고, 이 의문은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시각장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맹학교에서 시각장애인 학생들의 미술 교육을 맡게 되었다. 빛조차 인식할 수 없는 전맹(全盲)부터 빛과 어둠만을 구별하는 눈, 시야의 주변은 흐릿하고 가운데만 선명하게 보이는 눈, 시야의 반만 보이는 눈까지 다양한 눈을 가진 아이들이 있었다.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시야와 시력, 방식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는 1996년부터 지금까지 미술을 매개체로 서로의 보는 방식을 알아가는 프로젝트 <우리들의 눈 Another way of seeing>을 진행해 오고 있다. 미술은 시각예술이니, 보이지 않는 사람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지 설명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 보이는 아이들이 어떻게 미술을 하냐,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더 낫다'는 핀잔도 들었지만, 미술 교육에 열심히 참여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녀는 깨닫게 되었다. 아이들은 시각이 없는 대신 다른 모든 감각으로 세상을 느끼고 경험하고,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표현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어느 날 그녀는 캄보디아의 들판을 걸어가는 코끼리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최초로 우리나라에 왔던 코끼리 이야기를 찾아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코끼리는 조선 태종 때 일본에서 진상된 인도네시아 코끼리였다. 기후도 먹이도 맞지 않으니 코끼리는 조선 땅에 적응하기 힘들어했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사람을 두 번이나 밟아 죽였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세종은 코끼리를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 보내어 병들고 굶어 죽지 않게 하여라."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녀는 인도네시아에서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떠돌며 외롭게 살았던 코끼리에게서 외롭고 소수자인 존재를 만났을 때의 교감을 느꼈다. 그 교감은 시각장애인 아이들이 직접 코끼리를 만지며, 커다란 대상을 통해 상상력과 크기 감각을 키우고 다른 생명체와 정서적으로 교감한다는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사육사의 도움으로 코끼리를 만지는 맹학교 아이들 출처: https://www.saveelephant.org/news/the-art-of-touching-an-elephant/

 

  하지만 프로젝트를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러 동물원 관계자들이 여러 사람들의 낯선 손길에 코끼리가 당황해서 아이들에게 부상을 입히지 않겠냐고  우려했다. 나도 읽으면서 '아이들에게는 좋은 경험이겠지만 코끼리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코끼리가 스트레스를 받아 아이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러나 이미 코끼리 체험 프로그램이 있으니 와서 하기만 하면 된다면서 도움을 준 동물원 사람들이 있었다. 수의사들과 조련사들의 도움과 배려로 아이들은 코끼리를 직접 만져볼 수 있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전에 전시된 맹학교 학생의 작품, 코끼리의 긴 코가 강조되어 있다. 출처: https://blog.naver.com/openkaab/20113302004

 

 

  코끼리를 만져본 뒤 아이들은 자신이 느낀 대로 코끼리의 모습을 표현했다. 코끼리의 긴 코만을 강조한 아이도 있었고, 자기가 만진 순서대로 코끼리의 각 부위를 수평으로 늘어놓은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이 만든 코끼리들은 코끼리의 실제 모습과는 다르지만, 코끼리의 기존 이미지에 의지하지 않았기에 코끼리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보이는 나로서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고, 각자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표현함으로써 좀 더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소통에 미술이 좋은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데서 미술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낀다. 함께 코끼리를 만지고 느끼고 상상하고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 함께 보고 경험하고 느끼고 표현하는 일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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