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주의 요리책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필리아 지음, 이용재 옮김 / 마티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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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주의 Futurismo, Futurism 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현대 예술 운동으로, 예술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기존의 가치와 문화를 혁신하려고 했던 운동이었다. 미래주의자들은 과거의 것과 전통을 현대화의 걸림돌로 여겼고, 현대화된 도시와 기계 문명의 속도감과 역동성을 찬양하며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려 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산업화가 늦었던 이탈리아에서, 미래주의자들은 삶과 예술 모두를 현대화시키고 싶어했다. 삶과 예술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현대화되는 것이 미래주의자들이 꿈꾸는 혁명이자 미래였다. 미래주의자들이 혁신시키려고 하는 대상에는 미술, 음악 같은 예술뿐만 아니라 요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래파의 창시자이자 수장인 마리네티 Filippo Tommaso Marinetti, 1876-1944 는 동료 미래주의자인 화가 필리아(Fillia, 1904-1936, 본명은 루이지 콜롬보)와 함께 1930년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하고, 2년 뒤에는 미래주의가 창안한 음식 레시피와 새로운 식사법을 소개하는 책 『미래주의 요리책』을 펴냈다. 


 서문에서 마리네티는 미래주의 요리 혁명을 통해 이탈리아 민족의 식습관을 바꾸고, 실험과 상상력이 가득한 새로운 음식과 인간다운 식사법을 제안하겠다고 패기 넘치게 선언한다. 그런데 그 제안이 황당하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인 파스타를 추방하자는 것이다. 그가 파스타를 추방하려는 이유는 이렇다. "입에 맞을지는 몰라도 파스타는 구시대 음식입니다. 비만을 초래하고 짐승처럼 먹게 합니다. 영양이 많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회의적이며 굼뜨고 비관적이게 만듭니다." 파스타를 이탈리아인의 식탁에서 영원히 추방하자는 제안에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마리네티가 파스타를 게걸스럽게 먹는 사진이 찍혔지만 마리네티 본인은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만들어진 합성사진이라고 일축했다. 


 미래주의자들이 꿈꿨던 식생활은 비만을 불러일으키는 음식을 몰아내고 신체에 필요한 열량을 빨리 공급하며, 음식의 맛과 색, 형태, 촉감, 음식을 먹을 때의 주변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들은 현대 기술을 적극 활용해 오감을 동시에 자극하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요리들을 개발해, 사람들에게 미래적인 감성을 일깨우려고 했다. 그런데 이 요리들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항공음식', '탄성케이크', '이혼한 계란', '입체파 채소밭', '당근+바지=교수', '직관적인 전채', '깜짝 바나나' 등등. '최강정력'이라는 요리 이름에서는 풋 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뒤로 이름만큼이나 정신 나간 레시피들이 이어진다. 강철의 맛을 느끼기 위해 강철 볼베어링을 닭고기 안에 넣고 오븐에 10분 구워 볼베어링의 맛이 닭고기에 배게 한다. 공감각적 맛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향수에 재료를 재워두는 레시피들도 여럿 있다. 심지어 다양한 향수를 풍선에 채우고, 풍선 입구 가까이에 불붙인 담배를 가져다대고 빠져나오는 향을 들이마시는 것도 요리라고 한다. 그럭저럭 먹을 만해 보이는 레시피조차 재료의 양은 대략적으로만 적혀 있고, 아예 적혀 있지 않을 때도 있다. 조리 시간은 아예 적혀 있지 않다. 그런데 재료의 양과 조리 시간이 적혀 있지 않아서 오히려 요리사의 창의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 


  식사법도 레시피만큼이나 독특하다. '항공음식'은 검은 올리브와 회향 구근, 금귤을 아무 조리 없이 그냥 먹는 간단한 요리이지만, 먹을 때 왼손으로 사포, 비단, 우단을 엮어 만든 천을 만지고 종업원이 식사를 하는 손님의 목 뒤에 카네이션 향수를 뿌리고 비행기 모터 소리와 바흐의 음악을 틀어 공감각적인 식사로 만든다. '미래주의 항공시 저녁 식사'는 고도 3000미터 높이에 오른 비행기 조종칸에서 아래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면서 하는 식사다. '지리학 저녁식사'에서 종업원이 몸에 두른 아프리카 지도 중 한 군데를 손님이 가리키면 손님이 가리킨 지역과 관련된 요리를 내어온다. 


  이 모든 정신 나간 소리를 아주 진지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들의 요리가 식생활의 혁명이라고 240페이지 내내 자화자찬하고 있는데, 역시 맨 정신으로 프로파간다를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들의 요리 혁명에 전 유럽의 주요 언론들이 주목했다는데, 과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관심을 가져주었을지 모르겠다. 기계 문명을 느끼기 위해서 쇳덩어리를 음식에 넣고, 빵을 비행기 모양으로 만들어낸다는 것도 1차원적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외국인과 연애하거나 외국 음악을 즐기고 외국 제품을 쓰면 해외병 환자로 매도하는 국수주의에, "감성적인 여성 화장실에 있는 암컷 침팬지처럼", "뱃사람 애인만큼이나 뚱뚱한 양파" 등 여성을 대상화하고 비하하는 표현, 흑인을 항상 "검둥이"로 지칭하고 식사 분위기를 돋우는 도구로 취급하는 인종 차별까지 미래주의자들의 편견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솔직히 말하면 본문보다 본문을 패러디하면서 미래주의자들을 풍자하고 놀리는 번역자 후기가 더 재미있다. 번역자는 마리네티에게 현대의 레스토랑들을 보여주면서 파스타가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준다.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 사람들도 파스타를 즐겨먹고 있다. 탄수화물과 면이여, 영원하라. 파스타의 당당한 기세에 기가 죽은 마리네티는, 미래주의 요리는 현대적인 요리라기보다는 충격을 주고 주의를 끌기 위한 일종의 장난이었다는 냉정한 분석에 더욱 더 의기소침해진다. 그러나 아이팟으로 재생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산물 요리를 먹게 하고, 꽃 향기가 나는 캘빈 클라인의 향수 '이터너티'와 어울리도록 오렌지꽃 젤리, 바질, 바닐라 크림을 곁들인 귤 그라니타(granita, 과일과 설탕, 와인을 혼합한 뒤 얼려서 만든 디저트)를 만드는 등 공감각적 맛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21세기 요리사들의 모습을 보면 흡족해할 것이다. "마리네티를 비롯한 미래주의 일당에게 미친 구석이 있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렇게 미친 자들 기운데 일부가 결국은 선구자가 되는 게 아닐까." 번역자의 말처럼 미래주의자들의 장광설에도 미래를 내다보는 선구안이 숨어있기는 하다. 미래주의자들의 방식 그대로 미래주의자들을 풍자하면서도 미래주의자들의 주장에서도 가치를 찾아내는 멋진 번역자 후기다. 이 후기가 이 책을 읽는 노고에 대한 보상이 되었다. 


미국의 요리사 맷 바인가르텐이 재현해낸 미래주의 요리 '직관적인 전채'. 오렌지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살라미 소시지, 버터, 버섯절임, 앤초비와 녹색 파프리카를 채운 뒤 

미래주의 격언을 적은 쪽지를 넣는다. 


P. S. 2009년 미국의 요리사 맷 바인가르텐은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미래주의 요리들을 재현한 정찬을 열었다. 바인가르텐의 말에 따르면 미래주의 요리들의 맛은 훌륭하다고 한다. 그러나 바인가르텐의 미래주의 정찬을 기사로 쓴 기자는 여전히 미래주의 요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했고, 네티즌들도 기사 댓글에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사에 실린 요리 사진만 보면 그럴 듯한 요리 같긴 한데. 


참고 기사: https://dinersjournal.blogs.nytimes.com/2009/02/23/the-future-arrives-on-park-ave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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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집 - 화가가 머물고 그림이 태어난 집을 찾아서
제라르 조르주 르메르 지음, 장 클로드 아미엘 사진, 이충민 옮김 / 아트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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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집은 우리 자신의 작은 세상이다. 사는 게 바빠서 자기의 취향이나 가치관에 맞게 집을 가꾸어 나갈 여유가 없다 해도, 집은 우리 삶의 흔적들로 인해 우리가 살기 이전과는 다른 공간이 되었다. 누군가의 집에 갔을 때 우리는 바깥 세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 사람이 만들어 온 내밀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각 예술을 업으로 삼고 자기만의 세계를 확고히 세우는 화가의 집에서는 그 화가의 삶뿐만 아니라 예술 세계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화가의 집』은 프랑스의 미술사학자와 사진작가가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19세기와 20세기 미술사를 빛낸 화가 열네 명의 삶과 예술 세계를 들여다 본 책이다.


프란티섹 빌렉의 집 내부. 빌렉은 이 집을 '지상에 옮겨 놓은 신의 사원'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의 의도대로 나무와 돌, 흰 벽으로 이루어진 집은 수도원처럼 절제되고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사진 출처: http://en.ghmp.cz/

제임스 엔소르의 고향 집 거실. 벽 하나를 가득 메운 그의 작품 <1889년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과 거실 곳곳에 놓인 온갖 골동품과 꼭두각시 인형이 기괴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방문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사진 출처: http://priscillasadventuresineurope.blogspot.com/


  화가에게 집은 번잡한 바깥 세상을 피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작은 세상이다. 때로는 그 작은 세상을 자신의 작품들을 보관하는 작은 미술관으로 쓰기도 한다. 화가의 집은 단순히 예술 작품을 만들고 보관하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화가의 캔버스가 되어 또 다른 예술 작품으로 남는다. 열네 명의 작가들의 작품 세계가 서로 다르듯 집도 각각의 개성이 뚜렷하다. 같은 체코의 예술가인데도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의 집이 그의 작품들처럼 화려하고 유려한 장식과 골동품들로 가득 찬 반면, 프란티섹 빌렉Frantisek Bilek, 1872-1941의 집은 조각 작품들만 치운다면 목사관이나 수도원처럼 보일 정도로 경건하고 절제된 분위기의 공간이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집이 그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온갖 꽃들로 방문객을 환영한다면, 벨기에의 화가 제임스 엔소르James Ensor, 1860-1949의 집은 기괴한 작품과 골동품으로 방문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지베르니의 정원 풍경. 모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연못과 그 위에 놓인 일본식 무지개 다리가 보인다.

사진 출처: https://sonurai.com/bingwallpapers/856

지베르니 집의 식당. 천장과 벽, 식탁, 청화백자 타일까지 푸른색 톤으로 맞추어져 있어 정갈하고 청결한 느낌을 준다. 모네는 미식가로서 부엌을 맛과 향의 실험실로 여겼다고 한다.

사진 출처: http://fondation-monet.com/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은 모네의 지베르니 저택이다. 두 개의 강으로 둘러싸인 지베르니의 아름다운 풍경은 물을 좋아했던 모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모네는 지베르니에 집을 지을 때 특히 정원에 정성을 쏟았다. 그는 회화의 구도에 따라 정원을 배치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품종의 꽃을 심었고, 지금도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어 다채로운 풍경들을 만들어낸다. 말년에 거동이 불편해져 외출하기 힘들어진 모네가 정원의 모습만으로도 수백 점의 작품을 그려낼 수 있었을 정도다. 저택 내부의 방들도 각각의 색에 맞추어 간결하고 소박하게 장식되어 있어, 생활하고 창작하기에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화가의 작품들이나 온갖 수집품으로 가득 차 상상력과 영감을 자극하는 집도 좋지만, 실제로 살아가고 활동하기에는 오래 머물기 편안한 집이 좋다. 


 화가와 그의 집에 대한 기록을 풍부하게 인용하면서 화가의 집과 예술 세계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글과, 현장감이 넘치면서 집안 곳곳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사진 덕분에 화가의 작은 세상에 잠시 머물렀다 온 기분이 든다. 벽에 걸린 그림 한 점, 장식품 하나에서도 화가의 흔적과 마음이 느껴진다. 원래 알고 있던 화가보다 모르던 화가들이 더 많지만, 알고 있던 화가의 더 깊은 내면을 알게 되었고 모르던 화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책에 나온 집들에 직접 가서 그 집에서 살면서 창작을 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느껴보고 싶다. 


 아쉽게도 인터넷 서점의 판매지수를 보니 이 책은 그렇게 많이 팔리지도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절판되어 중고도서로 사거나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밖에 없다. 홍보가 잘 되지 않았던 걸까,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 이야기가 많아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은 걸까. 글과 그림, 디자인, 구성부터 공을 많이 들인 아름다운 책인데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지금은 소장할 수도 없다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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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의 자코메티 - 예술과 예술가들 3
제임스 로드 지음, 오귀원 옮김 / 눈빛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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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알고 있는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 는 젓가락처럼 보일 만큼 마르고 길쭉한 조각상들을 주로 만들었던 조각가였다. 올해 초 열린 자코메티 전시에서 그가 조각가일 뿐만 아니라 화가이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그린 독특한 초상화들도 보았다. 그리고 자코메티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작년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8개월쯤 지나서 그 영화가 정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었다. 그 영화가 <파이널 포트레이트>다.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실제 제임스 로드(위)와 영화 속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제임스 로드 역의 아미 해머(아래)


 <파이널 포트레이트>는 자코메티(제프리 러쉬)가 미국인 작가 제임스 로드(아미 해머) James Lord, 1922~2009의 초상화를 18일에 걸쳐 완성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아무래도 18일 동안 그림을 그린 이야기가 영화의 전부이다 보니, 지루하다는 평이 많다. 원작인  『작업실의 자코메티』 를 도서관에서 빌려왔지만, 미리 읽으면 영화가 더 지루해질 것 같아 일부러 영화를 본 뒤 원작을 읽었다. 


(위) 영화 속에서 자코메티와 자주 갈등을 빚는 아내 아네트(실비 테스튀) 

(아래) 불륜 행각을 벌이고 있는 자코메티의 정부 카롤린(클레망스 포에시)과 자코메티(제프리 러쉬)


 원작을 읽으면서 처음 든 생각은 영화 쪽이 MSG를 쳤다는 것이었다. 자코메티와 아내 아네트(실비 테스튀) 사이의 갈등, 창녀 카롤린(클레망스 포에시)과의 불륜 행각은 원작에서 전혀 나오지 않는다. 자코메티와 아네트의 관계도 그저 평범한 부부로 묘사되고, 영화에서처럼 자코메티가 아네트를 냉대하는 모습은 원작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코메티의 정부 카롤린은 원작에서 그저 자코메티가 최근에 함께 작업하고 있는 모델이라고 몇 번 언급되기만 할 뿐 한 번도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자코메티가 카롤린과 불륜 관계를 가졌고 그것 때문에 아네트가 힘들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제임스 로드는 자신의 책에서 자코메티의 가정사를 시시콜콜히 파고들지 않는다. 


제임스의 초상화를 끊임없이 그렸다 지우면서 고뇌하는 자코메티


 영화 안에서 드라마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랬겠지만, 그런 자극적인 요소들이 들어가면서 원작에서 자코메티와 제임스가 나누었던 예술에 대한 대화들은 줄어들었다. 영화에도 자코메티가 세잔과 피카소에 대해 평가하는 대사가 나오기는 하지만, 원작에서 자코메티와 제임스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부터 현대 화가들까지 다양한 화가들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자코메티가 평생 동안 갈고 다듬어 온 예술관도 원작에서는 더 자세하게 설명된다.


"중요한 것은 그림이 어떻게 될 건지 생각하지 않고 어떤 선입견도 없이 작품을 하는 겁니다. ... 세잔은 자연 그대로를 그려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 하지만 모두들 노력해야 합니다. 마치 세잔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감각을 그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

 그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것들조차 매 순간 새롭게 보려고 했고,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일수록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점점 더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원작을 읽고서야 그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림을 지웠다 다시 그리는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 


캔버스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자코메티와 제임스


 자코메티가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만드는 괴팍한 인간이라는 것은 원작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영화와 달리 의외로 섬세한 면도 눈에 띈다. 


"작업을 조금만 더 합시다. 이 상태로 놓아둘 수는 없어요. 내가 밉죠?" 그가 물었다.
"바보 같은 소리를 하네요. 내가 왜 그렇겠어요?"
"당신을 이렇게 힘들게 하니까 그렇지요."
"그런 소리 마세요."

  자코메티는 초상화 때문에 제임스가 발이 묶여 있는 것을 은근히 의식하고 제임스의 눈치를 보기까지 한다. 영화 속 자코메티는 시종일관 "뭐, 자네가 가면 가고 머무르면 머무르는 거지."라는 식의 태도를 보여서 제임스의 눈치를 살피면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자코메티가 제임스에게 반말을 하는 영화 자막과 달리, 원작의 한국어판에서는 자코메티가 제임스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번역되어서 그렇지만, 자코메티와 제임스의 관계는 영화보다 더 정중하게 느껴진다. 자코메티에게 환멸감을 다소 느끼는 영화 속 제임스와 달리 실제 제임스는 발이 묶여 있는 처지가 달갑지는 않지만 초상화를 완성시키지 못하는 자코메티의 괴로움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를 존경한다. 

자신의 초상화를 사진으로 찍는 제임스(위)와 마침내 완성된 제임스의 초상화(아래)


  영화에서 제임스는 초상화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하기 위해 자코메티가 그린 초상화들을 사진으로 찍는다. 원작에서는 한 챕터에 하루씩, 하루에 한 장씩 제임스가 찍은 초상화의 사진이 실려 있다. 열여덟 개의 초상화 사진은 처음 봤을 때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르다. 자코메티 자신에게는 이 초상화들이 어떻게 다른지 더 뚜렷이 보였을 것이다. 제임스도 오늘은 얼굴이 기울어졌다, 오늘은 형태가 더 견고해졌다는 식으로 자신의 초상화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민감하게 포착한다. 18일 동안이나 계속되는 지루한 작업이었지만, 제임스도 자코메티만큼이나 초상화 작업을 진지하고 섬세하게 대했다는 것이 보인다.

  어느 날에는 아무 것도 그리지 못하고, 어느 날에는 꽤 진전을 보인다. 어느 날은 자코메티와 아네트가 싸우고, 어느 날에는 자코메티와 아네트가 화해하고 다정한 모습을 보인다. 어느 날은 카롤린이 제임스와 자코메티를 데리고 드라이브한다. 영화는 이렇게 단조로워지기 쉬운 18일의 하루하루를 조금씩 변주하면서, 자코메티의 예술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코메티의 예술과 예술관을 좀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원작을 읽어보는 것이 낫다. 자코메티와 제임스가 나누는 예술에 대한 대화는 원작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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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컬렉션
매트 졸러 세이츠 지음, 조동섭 옮김 / 윌북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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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스포일러 포함


영화 속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모습. 미니어처 호텔에 숲이 우거진 배경을 합성해 완성했다.


가상의 유럽 국가 주브로브카 산악지대에 있는 최고급 호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곳의 지배인인 구스타브(랠프 파인즈)와 로비보이 제로(토니 레볼로리)가 호텔과 감옥, 수도원을 넘나들며 펼치는 모험. 한 순간 한 순간 캡처하면 그대로 예술 작품이 될 정도로 아름다운 영상들. 이런 점들에 홀려 요즘 재개봉하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예전에 도서관에서 보아 두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아트북이 생각났다. 일부러 영화를 본 다음에 읽었는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본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었다.


제로(토니 레볼로리)와 아가사(시얼샤 로넌)이 빵 상자가 가득 쌓인 트럭 안에서 마주 보고 있는 장면. 화면 윗부분에 여백이 많이 남기 때문에 빵 상자들을 가득 쌓아 구도의 균형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미 있는 빵집 상자들을 참고하면서 8천여 개의 샘플을 만들어낸 끝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멘들 빵집의 빵 상자 디자인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화면 구도와 세트, 소품, 촬영 기법까지 정교하게 맞물리며 한 장면 한 장면이 완성되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열두 겹으로 된 결혼 케이크다. 신나게 먹으면서 그 안에 어떤 노력이 들어갔는지 생각할 필요 없이 오로지 맛있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저자 매트 졸러 세이츠가 서문에서 한 말처럼, 이 아트북을 읽으면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케이크 같다고 느껴졌다. 감독 웨스 앤더슨, 주연 배우 랠프 파인즈, 의상 제작자, 음악 감독, 프로덕션 디자이너와의 인터뷰와 영화의 의상, 음악, 프로덕션 디자인을 분석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완성된 영화인지 볼 수 있다. 제로와구스타브가 살고 있는 1932년의 주브로브카는 현실에 존재했던 세계가 아니라, 감독과 제작진이 여행과 옛 사진, 고전영화들에서 본 것들과 상상을 정교하게 짜 맞추어 만든 세계다.  미니어처, 세트, 연기, 의상, 음악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겹겹이 쌓여 완전히 현실적이지도, 완전히 비현실적이지도 않지만 정말 있을 것 같은, 있기를 바라게 되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아트북의 내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아트북에 실린 막스 달튼의 일러스트


  이 아트북은 영화의 축소판 같다. 풍부한 사진 도판들과 텍스트, 일러스트가 정교하게 짜여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이룬다. 영화가 각 부분의 오프닝 장면의 서체와 디자인을 각각 다르게 했듯이, 책도 텍스트의 내용에 맞추어 다양한 디자인을 활용했다. 아트북 자체가 하나의 작품 같다. 그리고 사진들과 함께 화면 구도와 촬영 기법을 설명해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픽 아티스트 막스 달튼의 귀엽고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는 중간중간에 한 페이지, 또는 몇 페이지, 또는 텍스트 옆의 한 구석을 차지하며 영화만큼 환상적이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영화에 영감을 제공한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위), 영화의 주인공 구스타브(랠프 파인즈)(가운데), 노년의 제로에게서 구스타브의 이야기를 듣는 젊은 작가(주드 로)(아래). 세 사람은 묘하게 서로 닮았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 1881~1942 에게서 영감을 받았고, 이 영화를 츠바이크에게 바친다고 말했다. 나는 츠바이크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기와 「낯선 여인의 편지」의 작가라는 것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영화와 츠바이크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몰랐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이 영화의 전반적인 정서가 츠바이크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정서는 
상실이다. 츠바이크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회화, 말러의 음악,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까지 혁신적인 예술과 학문이 꽃피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더 없이 아름다웠던 과거의 세계는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고, 츠바이크는 영국과 미국을 거쳐 브라질로 망명했다. 그가 그리워한 과거의 세계는 유럽의 고급 문화와 선한 인간성이 사라지기 직전의 시기, 영원히 사라진 순수였다.  

  제로와 구스타브는 온갖 고난을 이기고 부와 행복을 손에 넣지만, 그들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 구스타브는 제로를 지키기 위해 군인들에게 반항했다 총살당했고, 제로가 사랑하는 아가사는 결혼한 지 몇 년도 안 되어 갓난 아들과 함께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다. 화려하게 빛났던 호텔도 공산주의 정권이 집권하던 1980년대에 이미 쇠락해 버렸다. 노년의 제로는 잃어버린 것들, 1932년의 호텔과 구스타브, 아가사, 그 시절의 낭만과 순수를 그리워한다. 노년의 제로는 젊은 작가에게 구스타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작가는 제로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액자식 구성도 츠바이크가 자주 쓰던 구성이다. 화자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 이야기 속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과거는 더 멀게 느껴진다. 이런 효과까지도 츠바이크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건강한 것은 아니라는 것, 츠바이크와 제로가 그리워하는 유럽의 아름답고 순수했던 문화가 노동자들과 식민지 사람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생각하면 찜찜하다. 그러나 소중히 여겼지만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서다. 10페이지 분량이나 실린 츠바이크의 소설 속 구절들은 영화 속 상실의 정서를 어떤 텍스트보다 절절하게 전하고 있다. 영화는 츠바이크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 않았지만 츠바이크의 정서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렇게 시각적인 요소와 텍스트 모두 훌륭한 책이지만, 영어 원서의 판면을 그대로 유지하다 보니 글씨가 작고 빽빽해진 것은 아쉽다. 한글은 알파벳과 달리 여러 자음과 모음이 조합되어 한 글자를 이루기 때문에 글자 형태가 더 복잡하고,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텍스트보다 더 많은 여백이 필요하다. 그리고 번역문은 원문보다 길이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의 구성이 정교하게 짜여 있어 페이지를 더 늘릴 수 없으니, 글씨 크기와 간격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터뷰어가 감독과 배우, 제작진과 영화를 만드는 데 참고한 고전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영화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대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이런 단점들이 있지만 이 책은 영화를 되새겨보고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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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의 빛 : 시인이 말하는 호퍼
마크 스트랜드 지음, 박상미 옮김 / 한길사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에드워드 호퍼, <좌석차>, 1965.


 20세기 초 미국인들이 겪은 삶의 변화와 고독, 불안을 그린 화가.  많은 사람들이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1882~1967 를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시인 마크 스트랜드 Mark Strand 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의 그림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조금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고.  호퍼의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현실과는 다르다. 그의 그림 <좌석차> (1965) 속 열차에는 승객들의 머리 위 짐칸도, 문의 손잡이도 없다. 사람과 사물, 공간의 형태와 색채는 현실보다 단순화되어 있다.  시간이 멈춘 세상인 듯 그림 속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멈춰 있다. "호퍼의 그림은 현실이 드러내는 모습을 넘어서는 것으로, 어떤 '감각'이 지배하는 가상 공간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스트랜드는 호퍼의 그림과 당대 사회를 연결시켜서 보던 해석에서 벗어나, 그의 그림 속 공간을 읽는다.


에드워드 호퍼, <밤을 새는 사람들>, 1942.


  스트랜드는 호퍼의 작품 속 공간에 '나아가라'와 '머무르라', 이 상반된 두 명령어가 공존하면서 긴장감을 자아낸다고 이야기한다. <밤을 새는 사람들>(1942)에서 사다리꼴 모양 창문의 두 변은 서로를 향해 기울어 있지만 서로를 만나지 못한다. 두 선이 만나는 소실점은 캔버스를 벗어나 그림의 바깥쪽 어딘가에 존재한다. 사다리꼴은 그 점을 향해 계속 가라고 우리를 재촉하지만, 어두운 도시 속 식당의 환한 실내는 우리에게 머물라고 한다. 나아가고 싶은 마음과 머물고 싶은 마음은 팽팽하게 맞선다. 


에드워드 호퍼, <햇빛이 비치는 이층집>, 1960.


 호퍼 그림 속 공간에서 대비되는 또 다른 한 쌍은 시각적 요소 서사적 요소다. <햇빛이 비치는 이층집>(1960)에는 잡지를 읽고 있는 중년 부인과 발코니에 걸터 앉아 어딘가를 바라 보는 젊은 여자가 있다. 우리는 이 그림을 보면서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지,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우리가 상상하는 이야기가 제자리를 잃고 너무 멀리 가 버리면 그림 속 기하학적인 형태들(세모난 지붕과 네모난 벽, 나란히 평행하고 있는 집들)이 우리의 시선을 다시 그림 속으로 불러들인다.  눈에 보이는 것도, 이야기도 그림 전체를 지배하지 않고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 <뉴욕의 방>, 1932.


  호퍼의 그림 속 공간에서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그들은 함께 있어도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뉴욕의 방>(1932)의 두 남녀는 함께 있지만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다. 이들 사이의 소원함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림에서는 타인과 함께 있을 때 더욱 커지는 고립감이 표현되어 있다.


에드워드 호퍼, <빈 방의 빛>, 1963.


"...이 그림은 우리가 없는 세상의 모습이다. 단순히 우리를 제외한 공간이 아닌, 우리를 비워낸 공간이다." <빈 방의 빛>(1963)에서는 사람들마저 사라지고 공간과 빛만이 남는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빛은 한 순간 반짝이고 언젠가는 사라지는 빛이다. 그러나 호퍼의 빛은 반짝이지도 흐르지도 않는다. 어느 한 순간에 멈추어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호퍼의 그림은 현재진행 중인 사건을 보여주지 않고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이나 일어난 직후, 짧고 고립된 순간들만을 표현한다. 

  한 마디로 호퍼의 그림 속 공간은 낯익으면서도 낯선 공간이다. 그림 속 사람들은 우리가 추측할 수만 있는 어떤 비밀스러운 일에 몰두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마치 제목을 알지도 못하는, 대사를 알아들을 수도 없는 공연을 보는 관객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우리는 그림 속 공간과 그 안의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지만 개입할 수도, 침범할 수도 없다. 그 공간은 일상적인 공간으로 보이지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일상은 벗겨져 나가고, 우리가 알 수 없는 고립된 순간들, 고립된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스트랜드의 해석이 단 하나의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들을 통해 우리는 배경 지식이 아닌 작품 자체를 가만히 들여다 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작품 자체에 집중하면서 나만의 시각으로 그 작품을 바라보는 법. 그렇게 호퍼의 그림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가 보지 않았던 것들을 호퍼의 그림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P. S. 이 책의 원서 초판은 흑백 도판들이 실린 페이퍼백이었다고 한다. 한국판 번역자는 호퍼의 그림을 컬러 도판으로 싣기 위해 열 군데도 넘는 기관들에 그림 사용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몇 년만에 컬러 도판이 실린 한국판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다. 마크 스트랜드는 한국판 번역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름다운 책이네요. 미국판보다 훨씬 좋아요."라면서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렇게 애정을 가지고 책을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는 언제나 내게 용기를 주고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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