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알고 싶은 건축물이 너무도 많아 - 역사와 문화가 보이는 서양 건축 여행
스기모토 다쓰히코나가오키 미쓰루.가부라기 다카노리 외 지음, 고시이 다카시 그림, 노경아 / 어크로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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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제목은 '세상엔 알고 싶은 건축물이 너무도 많아'이지만 사실은 '서양엔 알고 싶은 건축물이 너무도 많아'이다. 원제는 '건축 용어 도감 서양편'이고 '서양편'이라는 제목대로 서양 건축사에 이름을 남긴 걸작 건축물들을 소개하는 책이니까. 아쉽지만 타지마할이나 아야 소피아, 앙코르 와트 같은 아시아의 건축물이나 테오티우아칸의 피라미드, 마추픽추 같은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건축물은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없다. 그래도 괜찮은 번역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건축 용어 도감 서양편'보다는 '세상엔 알고 싶은 건축물이 너무도 많아'를 더 읽고 싶으니까(물론 취향에 따라 반대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부터 현대에 루브르 박물관에 설치된 유리 피라미드까지 69개의 서양 건축물을 65개의 꼭지를 통해 소개한다. 대부분의 경우 한 꼭지에 한 건축물을 다루는데 3~5페이지 정도의 분량에 그 건축물의 역사와 그 건축물이 속한 건축 사조, 그 건축물의 특징을 꽉꽉 채워 넣었다. '한 권으로 읽는 OO' 유의 책인데도 꽤 세세한 건축 사조까지 다루고 있다. 건축 양식과 건축물을 이루는 각각의 구조물, 그것을 가리키는 용어까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경어체로 이야기를 하듯 설명해 더 부드럽고 친근하게 내용을 전달한다. '기독교는 일신교인 유대교의 교리를 이어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신으로 숭배합니다.(p. 44)'처럼 지나치게 뭉뚱그린 부분도 있고(기독교와 유대교에서 공통적으로 숭배하는 유일신은 여호와(야훼)이고,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예수를 성부(여호와), 성령과 일체로 보지만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미술사에서의 선후 관계를 잘못 설명한 부분도 있지만('...눈에 보이는 것을 자신의 감각으로 해석하여 표현하는 '회화 기법'은 피카소의 큐비즘에서 시작되어 인상파까지 이어집니다.(p. 211-212) 서양미술사에서 자신의 감각, 즉 '눈에 보이는 그대로' 해석하고 표현한 것의 시초는 19세기 후반의 인상파이고, 큐비즘은 피카소의 1907년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을 시초로 한다.) 건축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종교적 배경과 건축사와 연관된 미술 사조까지 충실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사진 대신 일러스트로 각 건축물의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는 것이다. 건축물의 전경과 평면도, 독특한 특징이 드러나는 부분들을 일러스트로 그려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굵은 선으로 대략적인 특징을 알아보기 쉽게 그리고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주는 일러스트라 본문에서 설명하는 특징들을 알아보기 쉽다. 다만 그 건축물을 더 자세히 보고 싶거나 특유의 색채(다채로운 색채가 특징인 건축물인 경우는 더더욱)를 보고 싶은 독자들로서는 사진을 넣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러스트에는 이렇게 장단점이 함께 있다.



본문 뒤에는 서양사와 서양 건축사의 흐름을 대조한 연표와 각 건축물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서양사와 함께 서양 건축사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살펴볼 수 있어 유용하다. 지도에서는 이 책에 실린 서양 걸작 건축물들의 분포를 알 수 있다. 부록까지 공을 꽤 많이 들였다.


이 책에 실린 서양 건축 사조와 건축 용어가 제법 많아 한번에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서양 건축사의 흐름을 훑어보면서 각 시대와 사조를 대표했던 건축물로는 어떤 것이 있고, 그 건축물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 대략적으로 알아보는 데 좋다. 깊이 있게 건축사를 공부할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코로나가 지난 뒤) 여행을 가서 이 건축물은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지어졌고 이런 특징이 있구나, 하고 더 유심히 들여다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니까. 교양을 쌓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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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도시 - 뉴욕의 예술가들에게서 찾은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올리비아 랭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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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가 나오기 전 "지금 외롭다면 이건 당신을 위한 책이다"라는 제사題辭가 나를 맞는다. 내가 지금 외로운 건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서문 대신 실린 첫 번째 글 「외로운 도시」에서 "사람은 어디서든 고독할 수 있지만, 도시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면서 느끼는 고독에는 특별한 향취가 있다"(p. 13.)고 작가는 말했다. 인구 수백만의 대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교외 지역이라 대도시라기보다는 지방 소도시 같은 느낌이고, 거의 평생을 지낸 곳이라 내겐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혼자 산 적은 한 번도 없고 늘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또 다른 조건으로 봤을 때는 어떨까. "…물리적으로만 고립되어야만 고독해지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오히려 서로 연결되고 가깝고 연대한다는 감각의 부재와 결핍, 즉 어떤 이유에서건 원하는 만큼의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고독의 여건일 수 있다."(p. 14.) 가족과 함께 살고 사이도 좋은 편이니 친밀감을 전혀 느낄 순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별일이 없으면 내가 가족들보다 수십 년은 더 살 테니 나는 혼자 남겨질 것이고,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공동체는 없으며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관심이 없다. 무엇보다 내가 일하고 싶은 분야에는 다시 발도 들여놓지 못한 채 가난 속에서 고립된 채 나이만 먹어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크다. 뼈저리게 외로운 건 아니지만 문득 외로움을 느끼거나, 앞으로 견딜 수 없이 외로워질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 점에서는 나를 위한 책까지는 아닐지라도 내가 읽어도 괜찮을 책일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이 내게 맞는지 미리 생각해 봤다. 


  이 책은 영국의 비평가 올리비아 랭이 뉴욕과 그곳의 예술가들, 그들을 둘러싼 고독에 관해 쓴 여덟 편의 에세이를 모은 것이다. 이 에세이들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겹은 작가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대도시 뉴욕에서 느끼는 고독을 털어놓는 에세이다. 작가는 남자친구와 함께 살기 위해 무작정 뉴욕으로 왔지만, 남자친구는 이미 변심했다. 영국에서 살던 집은 이미 세를 줬으니 한동안은 뉴욕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뉴욕에 친구나 지인이 한 명도 없지는 않았지만, 사람들과 교류하기보다는 집에 혼자 멍하니 있거나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 서핑을 하고, 혼자 이리저리 시내를 거니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허름하고 주변의 소음과 네온사인에 그대로 노출된 집. 불안정한 경제 상황. 사소한 언어 차이에서 느끼는 이질감. 누군가 자신을 따뜻하게 봐주길 바라지만 관음적인 시선에 노출되는 것은 두려운 마음. 이런 것들이 대도시에서 혼자 살아간다는 감각을 더욱 생생하게 했다. 


  작가가 뉴욕에서 느끼는 고독은 뉴욕의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그리는 비평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에워싼 고독에 저항했고, 작가는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과 작품 세계로 고독에 대응했는지 들여다 본다. 에드워드 호퍼는 훤히 들여다 보이는 유리창 안에 혼자 있거나 함께 있어도 대화하지 않는 그림 속 인물들을 통해, 고립되어 있으면서 수많은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고독과 불안을 표현했다. 앤디 워홀은 이주민인 데다 성소수자였고 남들보다 튀는 옷차림과 언행을 하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에게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상처 입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고 같다는 것은 무시당하거나 거부당할 위험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똑같은 이미지들을 무수히 만들어냈고, 그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살아갔다. 사진작가 데이비드 워나로위츠는 부모에게 학대당하고 방치된 채로 자랐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성소수자이자 에이즈 환자로서 편견과 억압과 부딪혀야 했다. 워나로위츠는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 몸을 팔거나 성관계를 가질 사람을 찾아 나서던 뉴욕의 거리들에 랭보(19세기 프랑스의 시인) 가면을 쓴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뉴욕의 아르튀르 랭보 Arthur Rimbaud in New York> 연작을 통해, 뉴욕이라는 화려한 도시 이면에 숨겨진 장소들, 배제된 사람들을 드러냈다. 예술 창작뿐만 아니라 정부의 에이즈 환자 처우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하는 등의 사회 활동을 통해, 자신과 같은 소수자들을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사회에 맞섰다. 헨리 다거는 가족과 유일한 친구가 죽은 뒤로는 이웃과도 거의 교류하지 않으면서 50여 년을 골방에서 살았지만, 그가 요양원으로 떠난 뒤 그가 남긴 300점의 그림과 수천 페이지의 회고록, 15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의 원고가 골방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평생 고립된 삶을 살면서 거대한 또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냈고, 현실과 자신이 만들어낸 우주를 완전히 구분하지 못했다.


  그들이 힘겹게, 치열하게 고독과 맞서는 모습은 연민과 감동을 자아내지만, 작가는 연민하거나 감동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그들의 고독이 그들 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지 않고, 더 큰 사회적 상황이 그들을 더욱 고독으로 몰아갔다고 본다. 이런 성찰이 에세이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또 다른 한 겹이다. 1950년대에 아동이 양육자와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해야 이후에 감정적, 사회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는 애착 이론이 개발되기 이전, 애정 표현은 아이를 망칠 수 있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헨리 다거의 유년기도 그런 믿음이 지배적인 시대에 속했다. 그는 가정에서도, 보호소에서도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한 채 자라났고, 성인이 되어서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갔다. 에이즈의 원인과 치료법이 밝혀지기 전까지 에이즈 환자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족에게 거부당했으며, 의료진조차 치료를 거부했고 장의사들은 시신을 매장해 주지 않았다. 보수적인 정치인들은 에이즈의 원인을 성소수자들의 '부도덕한' 성행위 탓으로 돌리고 정책 결정권자들은 에이즈 환자들에게 필요한 교육과 자금원을 고의로 차단했다. 많은 성소수자 예술가들이 걸어 다니는 병균 덩어리인 양 취급받고 쓸쓸히 죽어갔다. 데이비드 워나로위츠는 병든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사회 운동 단체 '액트 업Act Up'에 가입해 에이즈 환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 힘썼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고독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서의 낙인과 배제가 낳은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이런 낙인과 배제에 저항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세 겹의 층은 지층처럼 뚜렷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섞이며 글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만든다. 그 모든 층에 녹아 있는 것이 뉴욕이라는 도시 자체다. 뉴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나는 구글 지도 중 뉴욕 시의 지도를 모니터에 띄워 놓고 책을 읽었다. 구체적인 지명이 나올 때마다 검색을 했고, 그곳을 클릭하면 화면 왼쪽에 그 장소의 사진과 그 장소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나왔다. 그 사진과 설명으로 그곳이 어떤 곳인지 짐작했다. 책 속에서 작가와 뉴욕의 예술가들이 머물거나 방문했거나 활동했던 장소들은 생각보다 서로 가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을 따라 뉴욕 시내 곳곳을 걸어 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가는 고독에 관한 이 책을 쓰면서 오히려 놀랄 만큼 많은 관계를 맺었다고 했는데, 나는 고립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통해 오히려 저 멀리 있는 뉴욕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됐다. 


  뉴욕이라는 공간 자체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고독과 마주하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과 예술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 보고 나왔다.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고독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고독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는 대신, 고독을 자신의 삶과 예술 세계의 일부이자 원동력으로 끌어안았다. 작가는 고독이 고쳐야 할 문제점이나 누구를 만나서 치유되어야 할 병이라기보다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 낙인과 배제라는 더 큰 힘이 낳은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 속의 예술가들은 고독 속에서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 보고 고독에 대응하는 예술 세계를 만들어내거나, 자신을 더 고독하게 만드는 사회의 낙인과 배제에 맞서고 서로 유대했다. 누구나 고독을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독을 끌어안거나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고독과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을 더 외롭게 만드는 세상에 저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에 대한 이런 성찰과 행동이 세상을 더 다정하게 만들 것이다. 세상이 더 다정해진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언젠가 떠난다 해도 나는 덜 외롭고 더 따뜻한 마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P. S. 1. 원문을 읽어 보지 못했지만 번역본만 봤을 때도 세밀한 감정의 결까지 살아 있는 훌륭한 번역이었다. 번역자 후기는 단순한 번역 후기가 아니라 이 책을 온전히, 깊이 이해하고 쓴 좋은 서평이다. 


P. S. 2. 텍스트 자체는 뛰어나지만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작품들 중 책에 실린 도판은 몇 점밖에 안 되는 것이 아쉽다. 작가가 작품 각각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창의적으로 해석하지만, 독자 자신이 작품을 직접 보고 각자의 감상과 해석을 내놓는 것도 중요하다. 저작권이 아직 안 풀린 현대 미술 작품들이라 저작권료 부담이 있었을 것이고 원서 자체에 도판이 많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욕심을 내서 도판을 더 찾아 넣었다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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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7 23: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바스티안 2021-07-08 00:18   좋아요 1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90일 밤의 미술관 - 하루 1작품 내 방에서 즐기는 유럽 미술관 투어 Collect 5
이용규 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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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출판사 면접에서 ‘요새 미술 분야 베스트셀러 1위가 뭔지 아느냐’, ‘그 책을 읽어 봤느냐’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 이후로, 지금 미술 분야에서 인기가 있는 책들을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사 책을 만들고 싶다고 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책에만 관심이 있었지 독자들이 좋아하는 책에는 너무 관심이 없었다. 여러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들을 훑어보면서 공통적으로 미술 분야 베스트셀러로 꼽힌 책이 『90일 밤의 미술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평소에는 읽지 않는 ‘하루 1페이지 OO’ 유의 책이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좋아하는지 직접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읽게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외국은커녕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도 망설여지는 이 때, ‘하루에 한 작품 내 방에서 즐기는 유럽 미술관 투어’라는 이 책의 콘셉트는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이 책은 유럽 곳곳의 유명 미술관에서 가이드 투어를 진행해 온 현직 도슨트docent(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관람객들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엄선한 작품 90점을 90일 동안 한 점씩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각 나라별로 챕터가 나누어져 있고, 각 나라별 챕터 안에는 각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한다고 추천하는 작품들이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런 구성이 각 나라, 각 미술관을 차례대로 방문하면서 미술 작품들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챕터 앞에는 그 나라에 있는 주요 미술관들이 어떤 곳인지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고, 챕터 마지막에는 미술관 전경을 담은 사진이 들어가 가이드북을 들고 여행하는 느낌을 더한다. 외국 여행이 그리운 독자들은 간접적으로나마 유럽 미술관 기행을 하는 셈이다. 


  유럽 미술관들에서 직접 가이드 투어를 진행해 온 도슨트들이 각 작품을 해설한다는 데서 독자들은 신뢰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쓴 다섯 명의 도슨트들은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 동안 유럽 각지의 유명 미술관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여행자들에게 미술 작품을 설명해 왔다. 특별히 독창적인 시선으로 각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지는 않지만, 그 작품을 볼 때 알아두면 좋은 배경 지식과 그 작품 자체의 특징 모두를 충실하게 설명한다. 해설이 존댓말로 쓰여 있어 도슨트들의 해설을 옆에서 바로 듣는 듯한 느낌이 든다. 도슨트들이 각 작품의 해설 끝마다 붙여 놓은 감상 팁들도 그림을 감상하는 데 좋은 힌트가 된다. 


  한 작품에 대한 해설은 4, 5페이지 정도이다. 4, 5페이지면 출퇴근 시간이나 점심시간, 자기 전에 잠깐 짬을 내어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다. 하루에 그림 하나와 4, 5페이지의 글. 그만큼의 위로와 교양이 지친 하루의 끝에 마음을 달래줄 수 있다. 많은 그림을 보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림 하나에 집중하며 그 그림이 전해주는 아름다움과 감정에 위안을 얻는다. 아주 적은 양이어도 지식을 쌓았다는 것 자체가 작은 성취감을 준다. 하루치씩 작품 해설을 읽을 때마다 목차와 찾아보기의 체크박스에 체크를 할 수 있게 해, 이 작은 성취가 눈으로 보이게 한다. ‘사는 게 쉽지 않을 때 이 노래를 꺼내 먹어요’라는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지치고 힘들 때 이 책을 꺼내 교양 한 스푼, 위안 한 스푼씩 떠먹게 하는 게 이 책의 의도가 아닐까. 그 의도가 독자들에게 와 닿기에 호응을 얻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이 요즘 서점에 넘쳐나는 ‘하루 1페이지 OO’, ‘365일 OO’ 유의 책 중에서 군계일학이라고 할 만큼 특출나지는 않다. 도판의 화질도 도슨트들이 설명하는 디테일을 볼 수 있을 만큼 좋지는 않다. 직접 그 미술관에 가서 작품 실물을 보고 확인하라는 의도라 해도 코로나든 재정 상황이든 미술관에 직접 가기 어려운 독자들을 위해서, 본문에 설명된 디테일을 포착한 세부 도판을 넣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좀 더 깊이 있게 미술사 지식을 쌓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가볍고 얕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하루에 필요한 만큼의 위로와 지식을 주는 것도 책이 할 수 있는 소중한 역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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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우리를 꿈꾼다 - 예술적 인문학 그리고 통찰 : 심화 편
임상빈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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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은 우리를 꿈꾼다』라는 알쏭달쏭한 제목과 '예술적 인문학 그리고 통찰'이라는 거창한 부제, 그 뒤에 붙은 '심화 편'이라는 말, 꽤 두꺼운 책의 두께까지 이 책이 어렵고 심오할 것이라는 인상을 굳힌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정반대다. 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어렵고 멀게만 느꼈던 예술을 더 가깝게 느끼게 되는 것, 일상에서도 예술을 누리게 되는 것. 그러기 위해 저자는 '예술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까', '어떻게 예술 작품이 만들어질까', '우리는 예술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차근차근 풀어간다.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지 않고 상호 간의 생산적인 자극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설명과 대화 형식을 모두 사용했다고 하니, 나도 내 친구 H와의 대화를 통해 이 책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 미술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수장고 안에만 넣어두고 전시는 하지 않는다면, 그 작품에는 의미가 있을까?


H: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나: 그렇지. 예술 작품은 보여주기 위한 거니까. 이 책에서는 예술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전시, 재현, 표현이 있다고 해.


H: 그 셋은 어떻게 다른 거야? 


에드 루샤, <스탠더드 주유소 연작>, 1960년대.


나: 우선 전시는 '이건 내 작품이다, 봐' 하는 거지. 겉으로 보이는 걸 그대로 전달하는 거. A는 A다. 이 그림들은 미국의 팝아트 화가 에드 루샤 Ed Ruscha 가 그린 <스탠더드 주유소> 연작인데, 서로 비슷비슷한 미국의 주유소들을 비슷한 구도로 특색 없이 그려놨어. 


H: 의미라고는 딱히 없다, 그냥 미국에 널리고 널린 주유소일 뿐이다, 이 얘기네. 관람객들이 괜히 의미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그럼 재현은?


필립 드 샹파뉴, <바니타스 정물화>, 1671.


나: A는 B다. 이 작품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다.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 해골은 죽음의 상징, 이런 식으로 널리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약속된 상징들을 가지고 의미들을 나타내는 거지. 17세기 서양에서는 '바니타스vanitas'라는 정물화가 유행했는데,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공허함'이라는 뜻이야. 이 세상의 무상함을 시들어 버리는 꽃,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시간의 유한함을 뜻하는 모래시계 같은 정물들을 모아 재현한 거지. 


H: 꽃이든 나무든 사람이든 그리려는 대상을 똑같이 그려내는 게 재현인 줄 알았는데.


나: 물론 그것도 재현이지만 이 책에서 정의하는 예술의 재현은 그래. 


H: 그럼 표현은?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1889)의 세부


나: 이 사진을 봐.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일부를 클로즈업한 건데, 물감 덩어리를 짓이겨 놓은 것처럼 강렬한 붓질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을 자기가 그리고 싶은 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타내는 게 표현이야. 


H: 그럼 표현은 재현보다는 개인적인 거네. 화가 A와 B가 재현은 비슷하게 할 수 있어도 표현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나: 그렇지. 이 책에서는 예술가가 그 표현을 어떻게 해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우선 다양한 도구로 표현해 볼 수 있다고.


H: 유화 물감을 붓에 묻혀서 캔버스에 그리는 거 말고 다양하게? 수채화도 있고 아크릴 물감도 있고.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있더라.


임상빈, <가정용 랩 1>, 2001.


: 그것뿐만 아니라 기술이 발전되고 현대 미술에서 '예술'로 규정하는 것의 폭이 넓어지면서, 별에 별 재료들이 다 미술 재료로 사용될 수 있대. 이 책을 쓴 작가는 2D 스캐너로 자기 몸이나 여러 가지 물건을 스캔한 이미지로도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 이 작품은 집안에서 쓰는 랩을 스캐너로 스캔해서 만든 거래.


H: 캔버스에 검은 칠을 하고 하얀색 물감으로 물결이나 외계 행성을 그린 거 같은데. 추상화 같기도 하고. 현대 미술에서는 이런 재료로도 예술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구나. 


: 응, 그래서 작가는 요즘 미대에서 전통적인 도구만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해. 


H: 입시 미술에 길들여진 애들한테 갑자기 자유를 주니까 그렇지. 정해진 공식에 맞춰 그림을 그리다 이제 와서 마음대로 해 보라면 당황스럽지. 그리고 취업을 하려면 요즘 트렌드에 맞춰서 그림을 그려야 되지 않을까?


: 응, 그건 작가도 인정하지. 전통적인 도구로 전통적인 재현 방법을 익히는 건 일종의 보험이라고. 하지만 관습은 깨라고 있는 거고 모든 게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해. 


H: 그 부분은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위한 부분이네. 일반 독자들보다는. 


: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긴 했는데, 전공자만 미술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취미로 미술을 하는 사람도 관습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작품을 만들 수 있지. 미술 하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엿볼 수도 있고. 


'우리는 어떻게 예술 작품을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이 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해. 우선 도상 해석. 


'도상 해석'은 특정한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이 그 문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지식을 바탕으로 그림을 읽어내는 거야.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있으니까 젊은 여자가 아기를 안고 있는 서양 명화를 보면 그게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거라는 걸 알잖아. 그런데 시대가 지날수록 아기 예수는 그냥 몸만 작은 어른처럼 권위 있어 보이는 모습에서 그냥 인간 아기처럼 연약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변화한대. 이렇게 여러 시대에 걸쳐서, 아니면 같은 시대의 여러 화가들이 그린 그림 속 한 도상의 변천사를 살펴보는 건 도상 해석이라고 할 수 있지. 


H: 그건 우리 같은 일반 관람객이 아니라 미술사학자들이 연구하는 방법인 거 같은데. 


나: 또 다른 방법인 '지표 찾기'는 미술사학자보다는 탐정이 추리하는 방식에 가까워. 다른 사람들이 놓친 단서를 미술 작품 속에서 찾는 거지?


H: 예를 들면?


산드로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1475-1476.


나: 이 그림은 산드로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인데, 이 그림 속에 보티첼리 자신의 자화상을 숨겨뒀어.


H: <프리마베라>로 유명한 그 화가? 이 많은 사람 중 누가 보티첼리인지 어떻게 찾아내?


나: 이런 경우 화가는 보통 관객과 눈을 맞추는 모습으로 자기를 그려넣는 경향이 있대. 


H: 그럼 그림 왼쪽에 빨간 옷을 입은 갈색머리 남자?


나: 아니. 맨 오른쪽에 누런 옷을 입은 남자. 


H: 이런 단서를 모르는 보통 관람객한테는 불리한데. 


나: 그림들을 많이 보고 미술에 대한 책도 많이 읽다 보면 이런 단서들을 얻게 돼. 이렇게 작가들이 카메오마냥 자기를 그림에 끼워넣는 것 말고도 작가 특유의 필치로 누가 그렸는지 알아내는 것도 지표 찾기고. 이 그림은 반 고흐 그림이다. 이 그림은 모네 그림이다. 붓 터치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표상. 표상은 누군가의 생각과 바람, 목적이 반영된 기호인데 그걸 읽어내는 거지. 표상에는 상징과 알레고리가 있어. 상징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A는 B다, 하고 딱 정해 놓는 거. 하트는 사랑이고 해골은 죽음이다 이런 식으로. 


H: 알레고리는 어떤 건데? 안 그래도 상징이랑 알레고리가 헷갈리더라고. 


나: 자기만의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 도상들을 조합해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거. 아까 봤던 바니타스 정물화도 알레고리야. 허무함을 상징하는 여러 도상들을 모아놔서 '인생의 허무함을 알고 인생의 유한함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거지. 


H: 자신만의 의미라기에는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거 같은데?


나: 응. 사실 상징에 가깝기도 하고. 이런 걸 전통적인 알레고리라고 해. 


H: 그럼 화가가 독창적으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낸 알레고리로는 어떤 게 있어?


왕광이, <샤넬 No.5>


나: 중국의 대표적인 현대 미술 화가 중 왕광이라는 사람이 있어. 위에서 보다시피 이 사람은 공산당을 선전하는 사람들과 서구 자본주의 거대 회사의 로고를 한 화면에 그려. 


H: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뒤섞여 있는 지금의 중국을 나타낸 건가?


나: 그렇지.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지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적용되는 지금 중국 사회의 모습. 절대 공존할 수 없었던 두 가지가 섞여 있는 현실을 사회주의를 나타내는 단체 인물화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거대 회사 로고를 합쳐서 나타낸 거야. 


H: 이렇게 예를 들면서 얘기하니 좀 이해가 된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예술에 대한 얘기를 꽤 많이 담고 있는 책인가 보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너의 감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 개인사가 많이 섞이고 좀 더 가벼운 『미학 오디세이』?


H: 네 설명에서는 작가 개인사 얘기가 별로 없던데?


나: 작가 개인사는 걷어내고 책에서 설명하는 몇 가지 개념들만 얘기했으니까. 일상적인 개인사에 빗대서 얘기하니 이해에 도움이 되긴 하는데, 좀 더 정리됐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거지. 작가의 너무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들여다보는 느낌? 


H: 난 굳이 듣고 싶지 않은데 상대방이 자기 애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오늘은 걸음마를 했어요, 오늘은 엄마라고 했어요 뭐 이런 얘기를 하는 느낌? 자기한테 제일 친숙한 거에 빗대서 설명하는 것도 이해되는데 읽는 네 입장도 이해되긴 해. 


나: 뭐, 일상과 연관시켜 설명하니 이해는 잘 되긴 했어. 작가와 부인이 티격태격하면서 생각을 주고받는 것도 나름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됐고. 제목이나 부제만큼 엄청 심오한 책은 아니지만 예술이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지고 감상되는지 알아두면 좋은 개념들은 깔끔하게 잘 정리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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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그림과 서양명화 - 같은 시대 다른 예술
윤철규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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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미술사가 전공이지만 한국미술사 과목들도 들었는데,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릴 때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궁금해했던 적은 없다. 서양미술사도 한국미술사도 각각 공부할 내용이 많아 공부하기에 바빴을 뿐. 그런데 이 질문에서 시작해 우리 옛 그림과 서양 그림의 대조표를 만든 사람이 있다. 동양 미술 전공자인 그는 그림의 소재와 주제, 화가 자신의 개인사, 그려졌을 당시의 시대상, 미술사에서의 위상 등을 연결고리로 삼아 60쌍의 조선 그림과 서양 그림을 엮어냈다. 그렇게 엮은 조선과 서양의 명화들을 이야기한 책이 『조선 그림과 서양명화』다. 


  책을 읽기 전 가장 염려되었던 것이 ‘아무리 봐도 서로 연관성이 없는 조선 그림과 서양 그림을 짝지어서 억지로 비교하는 경우들이 있지 않을까’였다. 저자 자신도 조선 그림과 서양 그림을 어떻게 짝 지을지 고심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우선 현재 남아 있는 우리 그림이 서양 그림들에 비해 너무 적어 짝을 지을 그림을 찾기 쉽지 않고, 동서양의 미술관이 너무 달라 섣불리 연관시키고 비교할 수 없다.


 (위) 정선, <금강전도>, 18세기. (아래) 카날레토, <대운하 입구>, 1730년경.

정선과 카날레토는 18세기 조선과 유럽에서 일어난 여행 붐 속에서 실제 풍경을 토대로 자신들만의 기법을 활용한 풍경화를 그려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소재와 주제가 겹치는 조선과 서양의 그림들이 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림에는 화가와 주문자와 얽힌 인간사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 그림이 그려진 시대와 사회의 사상과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저자는 같은 소재를 그린 두 그림(불교의 지옥을 그린 작자 미상의 <지장시왕18지옥도>와 기독교의 지옥을 그린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최후의 심판>)을 엮기도 하고 같은 주제를 그린 두 그림(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구원을 주제로 한 이자실의 <도갑사 관음32응신도>와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을 엮기도 한다. 둘 다 봄 풍경을 그렸지만 말년의 운은 서로 정반대였던 조선의 화가와 서양의 화가(<탐매도>를 그렸다고 전해지는 신잠과 <프리마베라>를 그린 산드로 보티첼리)를 비교하기도 하고, 여행 붐의 시대에 실제 경치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더한 풍경화를 그려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두 화가(<금강산도>를 그린 정선과 <대운하 입구>를 그린 카날레토)를 비교하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그림들을 찾으려다 보니 다른 미술사 책에서는 많이 언급되지 않았던 작품들(조선 불화나 행사 기록화들)이 담기게 되어, 독자들에게 다소 낯선 작품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저자는 한 쌍의 조선 그림과 서양 그림을 깊이 있게 비교 분석하기보다는, 조선 그림을 먼저 설명한 뒤 그와 비교되는 서양 그림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한 주제당 4, 5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니 한 작품당 2, 3페이지 정도의 설명이 들어가는 셈이다. 조선에서 이런 그림을 그렸을 때 서양에서는 이런 그림을 그렸구나, 이런 면에서 두 그림이 한 쌍으로 엮였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이다. 하지만 각 작품의 조형적 특징과 그 작품이 그려진 시대상이 충실하게 설명되어 있어 미술사뿐만 아니라 역사도 함께 공부하는 느낌이다. 저자가 동양 미술 전공자이기 때문에 서양 미술사 쪽 설명이 상대적으로 부실할까 걱정했는데, 서양 쪽 작품들도 작품의 특징과 배경 모두를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조선 미술 부분과 서양 미술 부분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조선 미술과 서양 미술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도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저자는 조선 미술이 서양 미술보다 우월하다고도 자랑하지도 않고, 서양 미술보다 못하다고 열등감에 빠져 있지도 않다. 그저 조선의 화가들이 이 시기에 이런 그림을 그렸고, 동시기에 서양 미술가들은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설명할 뿐이다. 독자들이 우리 것과 남의 것 모두를 잘 알기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균형 잡힌 시선이다.


각 주제의 첫 페이지에는 각 그림이 그려진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던 그림들의 제작 연도가 정리된 연대표가 있어, 조선 미술사와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나란히 볼 수 있다. 

출처: 인터넷 서점 해당 도서 상세 이미지

 

  독자들이 우리 미술과 서양 미술 모두를 잘 알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각 주제 첫 페이지의 연대표이다. 이 연대표에는 그 주제 안에서 비교되는 한 쌍의 조선 그림과 서양 그림, 비슷한 시기의 그림들이 시각적으로 정리되어 있어, 두 그림뿐 아니라 두 미술사의 흐름까지 나란히 비교해 볼 수 있다. 다만 각 시기(고려 말과 조선 전기, 조선 중기, 조선 후기)별로 나눠진 각 챕터 앞에 각 시기의 조선 미술사와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는 글이 있었다면 두 미술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독자들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또 한 가지는 풍부한 도판이다. 너무 어둡게 인쇄되어 디테일이 잘 보이지 않는 <수월관음도>, 해상도가 작은 도판을 확대해서인지 네모난 픽셀이 그대로 보이는 <독조도>를 제외하면 도판들의 화질도 좋은 편이다. 책 자체의 판형이 크고 도판도 큼직큼직하게 배치해 그림을 감상하기에도 좋다. 본문에서 설명하는 부분만 따로 클로즈업한 세부 도판도 함께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조선 그림과 서양 그림의 심도 깊은 비교 분석을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아쉬울 수 있다. 하지만 서양  화가들이 이런 그림을 그릴 때 우리 화가들은 이런 그림을 그리며 한국 미술사를 이루어갔다는 것을 확인해 보는 것만으로 흥미롭다. 각 그림이 그려질 때의 시대상도 충실하게 설명되어 우리 역사의 흐름과 서양 역사의 흐름도 비교해 볼 수 있다. 책을 읽고 나서 독자 스스로 또 다른 주제나 연결고리로 조선 그림과 서양 그림을 짝지어 보고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P. S. 정작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된 <모나리자>는 본문에서 조선 그림과의 비교 분석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모나리자>가 1503년에서 1506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니 이 책에 실린 조선 그림들 중 이상좌의 <나한도>나 신잠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탐매도>가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둘 다 <모나리자>와 짝을 짓기에는 성격이 너무 다른 작품들이다. 비슷한 시기에 <모나리자>와 짝지을 만한 조선 그림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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