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컬렉션
매트 졸러 세이츠 지음, 조동섭 옮김 / 윌북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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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스포일러 포함


영화 속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모습. 미니어처 호텔에 숲이 우거진 배경을 합성해 완성했다.


가상의 유럽 국가 주브로브카 산악지대에 있는 최고급 호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곳의 지배인인 구스타브(랠프 파인즈)와 로비보이 제로(토니 레볼로리)가 호텔과 감옥, 수도원을 넘나들며 펼치는 모험. 한 순간 한 순간 캡처하면 그대로 예술 작품이 될 정도로 아름다운 영상들. 이런 점들에 홀려 요즘 재개봉하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예전에 도서관에서 보아 두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아트북이 생각났다. 일부러 영화를 본 다음에 읽었는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본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었다.


제로(토니 레볼로리)와 아가사(시얼샤 로넌)이 빵 상자가 가득 쌓인 트럭 안에서 마주 보고 있는 장면. 화면 윗부분에 여백이 많이 남기 때문에 빵 상자들을 가득 쌓아 구도의 균형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미 있는 빵집 상자들을 참고하면서 8천여 개의 샘플을 만들어낸 끝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멘들 빵집의 빵 상자 디자인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화면 구도와 세트, 소품, 촬영 기법까지 정교하게 맞물리며 한 장면 한 장면이 완성되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열두 겹으로 된 결혼 케이크다. 신나게 먹으면서 그 안에 어떤 노력이 들어갔는지 생각할 필요 없이 오로지 맛있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저자 매트 졸러 세이츠가 서문에서 한 말처럼, 이 아트북을 읽으면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케이크 같다고 느껴졌다. 감독 웨스 앤더슨, 주연 배우 랠프 파인즈, 의상 제작자, 음악 감독, 프로덕션 디자이너와의 인터뷰와 영화의 의상, 음악, 프로덕션 디자인을 분석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완성된 영화인지 볼 수 있다. 제로와구스타브가 살고 있는 1932년의 주브로브카는 현실에 존재했던 세계가 아니라, 감독과 제작진이 여행과 옛 사진, 고전영화들에서 본 것들과 상상을 정교하게 짜 맞추어 만든 세계다.  미니어처, 세트, 연기, 의상, 음악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겹겹이 쌓여 완전히 현실적이지도, 완전히 비현실적이지도 않지만 정말 있을 것 같은, 있기를 바라게 되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아트북의 내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아트북에 실린 막스 달튼의 일러스트


  이 아트북은 영화의 축소판 같다. 풍부한 사진 도판들과 텍스트, 일러스트가 정교하게 짜여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이룬다. 영화가 각 부분의 오프닝 장면의 서체와 디자인을 각각 다르게 했듯이, 책도 텍스트의 내용에 맞추어 다양한 디자인을 활용했다. 아트북 자체가 하나의 작품 같다. 그리고 사진들과 함께 화면 구도와 촬영 기법을 설명해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픽 아티스트 막스 달튼의 귀엽고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는 중간중간에 한 페이지, 또는 몇 페이지, 또는 텍스트 옆의 한 구석을 차지하며 영화만큼 환상적이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영화에 영감을 제공한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위), 영화의 주인공 구스타브(랠프 파인즈)(가운데), 노년의 제로에게서 구스타브의 이야기를 듣는 젊은 작가(주드 로)(아래). 세 사람은 묘하게 서로 닮았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 1881~1942 에게서 영감을 받았고, 이 영화를 츠바이크에게 바친다고 말했다. 나는 츠바이크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기와 「낯선 여인의 편지」의 작가라는 것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영화와 츠바이크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몰랐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이 영화의 전반적인 정서가 츠바이크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정서는 
상실이다. 츠바이크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회화, 말러의 음악,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까지 혁신적인 예술과 학문이 꽃피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더 없이 아름다웠던 과거의 세계는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고, 츠바이크는 영국과 미국을 거쳐 브라질로 망명했다. 그가 그리워한 과거의 세계는 유럽의 고급 문화와 선한 인간성이 사라지기 직전의 시기, 영원히 사라진 순수였다.  

  제로와 구스타브는 온갖 고난을 이기고 부와 행복을 손에 넣지만, 그들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 구스타브는 제로를 지키기 위해 군인들에게 반항했다 총살당했고, 제로가 사랑하는 아가사는 결혼한 지 몇 년도 안 되어 갓난 아들과 함께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다. 화려하게 빛났던 호텔도 공산주의 정권이 집권하던 1980년대에 이미 쇠락해 버렸다. 노년의 제로는 잃어버린 것들, 1932년의 호텔과 구스타브, 아가사, 그 시절의 낭만과 순수를 그리워한다. 노년의 제로는 젊은 작가에게 구스타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작가는 제로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액자식 구성도 츠바이크가 자주 쓰던 구성이다. 화자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 이야기 속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과거는 더 멀게 느껴진다. 이런 효과까지도 츠바이크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건강한 것은 아니라는 것, 츠바이크와 제로가 그리워하는 유럽의 아름답고 순수했던 문화가 노동자들과 식민지 사람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생각하면 찜찜하다. 그러나 소중히 여겼지만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서다. 10페이지 분량이나 실린 츠바이크의 소설 속 구절들은 영화 속 상실의 정서를 어떤 텍스트보다 절절하게 전하고 있다. 영화는 츠바이크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 않았지만 츠바이크의 정서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렇게 시각적인 요소와 텍스트 모두 훌륭한 책이지만, 영어 원서의 판면을 그대로 유지하다 보니 글씨가 작고 빽빽해진 것은 아쉽다. 한글은 알파벳과 달리 여러 자음과 모음이 조합되어 한 글자를 이루기 때문에 글자 형태가 더 복잡하고,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텍스트보다 더 많은 여백이 필요하다. 그리고 번역문은 원문보다 길이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의 구성이 정교하게 짜여 있어 페이지를 더 늘릴 수 없으니, 글씨 크기와 간격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터뷰어가 감독과 배우, 제작진과 영화를 만드는 데 참고한 고전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영화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대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이런 단점들이 있지만 이 책은 영화를 되새겨보고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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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의 빛 : 시인이 말하는 호퍼
마크 스트랜드 지음, 박상미 옮김 / 한길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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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 <좌석차>, 1965.


 20세기 초 미국인들이 겪은 삶의 변화와 고독, 불안을 그린 화가.  많은 사람들이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1882~1967 를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시인 마크 스트랜드 Mark Strand 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의 그림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조금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고.  호퍼의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현실과는 다르다. 그의 그림 <좌석차> (1965) 속 열차에는 승객들의 머리 위 짐칸도, 문의 손잡이도 없다. 사람과 사물, 공간의 형태와 색채는 현실보다 단순화되어 있다.  시간이 멈춘 세상인 듯 그림 속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멈춰 있다. "호퍼의 그림은 현실이 드러내는 모습을 넘어서는 것으로, 어떤 '감각'이 지배하는 가상 공간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스트랜드는 호퍼의 그림과 당대 사회를 연결시켜서 보던 해석에서 벗어나, 그의 그림 속 공간을 읽는다.


에드워드 호퍼, <밤을 새는 사람들>, 1942.


  스트랜드는 호퍼의 작품 속 공간에 '나아가라'와 '머무르라', 이 상반된 두 명령어가 공존하면서 긴장감을 자아낸다고 이야기한다. <밤을 새는 사람들>(1942)에서 사다리꼴 모양 창문의 두 변은 서로를 향해 기울어 있지만 서로를 만나지 못한다. 두 선이 만나는 소실점은 캔버스를 벗어나 그림의 바깥쪽 어딘가에 존재한다. 사다리꼴은 그 점을 향해 계속 가라고 우리를 재촉하지만, 어두운 도시 속 식당의 환한 실내는 우리에게 머물라고 한다. 나아가고 싶은 마음과 머물고 싶은 마음은 팽팽하게 맞선다. 


에드워드 호퍼, <햇빛이 비치는 이층집>, 1960.


 호퍼 그림 속 공간에서 대비되는 또 다른 한 쌍은 시각적 요소 서사적 요소다. <햇빛이 비치는 이층집>(1960)에는 잡지를 읽고 있는 중년 부인과 발코니에 걸터 앉아 어딘가를 바라 보는 젊은 여자가 있다. 우리는 이 그림을 보면서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지,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우리가 상상하는 이야기가 제자리를 잃고 너무 멀리 가 버리면 그림 속 기하학적인 형태들(세모난 지붕과 네모난 벽, 나란히 평행하고 있는 집들)이 우리의 시선을 다시 그림 속으로 불러들인다.  눈에 보이는 것도, 이야기도 그림 전체를 지배하지 않고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 <뉴욕의 방>, 1932.


  호퍼의 그림 속 공간에서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그들은 함께 있어도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뉴욕의 방>(1932)의 두 남녀는 함께 있지만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다. 이들 사이의 소원함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림에서는 타인과 함께 있을 때 더욱 커지는 고립감이 표현되어 있다.


에드워드 호퍼, <빈 방의 빛>, 1963.


"...이 그림은 우리가 없는 세상의 모습이다. 단순히 우리를 제외한 공간이 아닌, 우리를 비워낸 공간이다." <빈 방의 빛>(1963)에서는 사람들마저 사라지고 공간과 빛만이 남는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빛은 한 순간 반짝이고 언젠가는 사라지는 빛이다. 그러나 호퍼의 빛은 반짝이지도 흐르지도 않는다. 어느 한 순간에 멈추어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호퍼의 그림은 현재진행 중인 사건을 보여주지 않고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이나 일어난 직후, 짧고 고립된 순간들만을 표현한다. 

  한 마디로 호퍼의 그림 속 공간은 낯익으면서도 낯선 공간이다. 그림 속 사람들은 우리가 추측할 수만 있는 어떤 비밀스러운 일에 몰두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마치 제목을 알지도 못하는, 대사를 알아들을 수도 없는 공연을 보는 관객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우리는 그림 속 공간과 그 안의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지만 개입할 수도, 침범할 수도 없다. 그 공간은 일상적인 공간으로 보이지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일상은 벗겨져 나가고, 우리가 알 수 없는 고립된 순간들, 고립된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스트랜드의 해석이 단 하나의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들을 통해 우리는 배경 지식이 아닌 작품 자체를 가만히 들여다 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작품 자체에 집중하면서 나만의 시각으로 그 작품을 바라보는 법. 그렇게 호퍼의 그림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가 보지 않았던 것들을 호퍼의 그림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P. S. 이 책의 원서 초판은 흑백 도판들이 실린 페이퍼백이었다고 한다. 한국판 번역자는 호퍼의 그림을 컬러 도판으로 싣기 위해 열 군데도 넘는 기관들에 그림 사용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몇 년만에 컬러 도판이 실린 한국판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다. 마크 스트랜드는 한국판 번역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름다운 책이네요. 미국판보다 훨씬 좋아요."라면서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렇게 애정을 가지고 책을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는 언제나 내게 용기를 주고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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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쉘터 공간 - 예술과 공학이 만나다 스마트 쉘터 공간 1
고경호 외 지음 / 미진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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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쉘터shelter'는 피난처, 은신처, 오두막, 수용소, 쉼터, 주거지, 보금자리 등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단어이다. '스마트 쉘터smart shelter'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더 기능적이고, 더 경제적이고, 더 안전하고 편안하며 지속 가능한 주거지를 말한다. 자연재해와 테러, 전쟁은 과학 기술이 발전한 지금도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고, 어떤 대책을 써 봐도 주택난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어느 때보다 우리를 지킬 수 있는 보금자리가 필요한 때다. 그래서 2015년 9월부터 스마트 쉘터 공간을 만들기 위한 철학, 건축, 예술, 공학 분야에서의 합동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책은 그 3년 동안 연구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작품 사보이 하우스. 벽이 아닌 기둥만으로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는 필로티 구조는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지진에 취약하다.


  1부에서는 미술을 통해 '더 좋은 공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고민하고 있다. "좋은 공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단 하나의 정답은 없다. 어떤 사람은 기능적이고 경제적인 공간이 좋은 공간이라고 할 것이고, 다른 사람은 보기에 아름다운 공간이 좋은 공간이라고 할 것이다. 모더니즘에서는 편리하고 합리적으로 기능하는 공간, 이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공간, 경쾌하고 명확해서 시각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있는 공간을 이상적인 공간으로 보았다. 그러나 기능과 아름다움 모두를 갖춘다는 것은 모순이다. 건물을 벽이 아닌 기둥만으로 지탱하는 필로티piloti 구조는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건물 전체에 투명하고 가벼운 느낌을 주지만, 지진에 의한 진동에는 취약하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모더니즘 건축의 획일성에 반발해 건물 하나 하나의 개성을 강조하고, 모더니즘 건물이 배제했던 장식을 다시 건물에 넣거나 한 구조가 한 가지 기능을 갖는 모더니즘 건물과 달리, 한 구조가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개성적으로 보였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도 그 장소가 가지는 개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비슷한 모습을 가진다. 두 건축 모두 인간의 실질적인 삶, 그 장소에서 사는 사람들 고유의 전통과 개성, 삶의 방식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 하우스>. 누나 마르가레테를 위해 비트겐슈타인이 건축 전 과정을 전담한 이 저택에서 현실의 문제를 가리는 전통 양식, 화려한 장식은 배제되어 있다. 


  미술가들과 건축가들은 인간의 삶이 공간에 반영되게 하려고 노력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누나 마르가레테가 살 저택 '비트겐슈타인 하우스'의 건축을 맡았다.(기초 설계는 비트겐슈타인의 친구였던 파울 엥겔만이 시작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설계 초안의 일부를 변경하고 내부 설비 디자인과 건물의 완공에 이르는 전 과정을 전담했다.) 집의 중심이 되는 지상 1층을 예술가들이 공연하고 교류하는 장으로 만든 것은 근대 이전부터의 가문의 전통을 따른 것이었지만, 전통적인 양식과 화려한 장식은 거부했다. 그에게 윤리는 삶에서 가치 있는 것, 진실로 중요한 것을 탐구하는 것이었고, 집을 짓는 것은 거주자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는 저택이 있던 빈의 심각한 주택난과 계급 갈등을 가리는 전통 양식과 장식을 배제했다. 그러나 이 공간조차도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거친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순수하고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곳 저곳을 떠돌다 낡은 오두막집에 머물며 철학을 연구했다. 


안드레아 지텔의 작품 <A-Z 이스케이프 비히클>에 사용자가 들어가 있는 모습


 한편 미국의 미술가 안드레아 지텔은 다양한 쉘터 작품들을 통해 사람들이 도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1997년 처음 전시되었던 <A-Z 이스케이프 비히클 A-Z Escape Vihicles>은 바퀴가 달린 욕조 모양의 스테인리스 통 두 개가 맞붙어 있는 형태의 작품이다. 작품 내부는 사용자의 취향에 맞게 꾸미고 변경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사회와 인간관계에서 겪는 스트레스, 억압, 구속에서 벗어나 한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현대인을 위한 쉘터이다. 그녀 밖에도 여러 미술가들과 건축가들, 디자이너들이 유목민들처럼 일시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공간, 누구나 조립하고 공유하고 배포할 수 있는 공간을 기획하고 있다. 주택 문제에 시달리는 서민들이나 전쟁으로 집을 잃은 난민들까지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에게 대안이 되어 주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2부에서는 공학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스마트 쉘터를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건축가 김덕수는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과 보행자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 공간, 통합정보센터가 도시에서의 정보 처리의 중심 역할을 하고, 대중교통의 환승 거점에 공용 사무 시스템, 다목적 문화 시설이 설치되며 외곽 지역에는 직접 농산물을 생산해 지하 구조물로 도시 곳곳에 농산물을 배송하는 실내 재배 시스템이 설치된 도시 공간을 제안한다. 건축가 송복섭은 스마트 쉘터에서 기능성, 경제성, 지속 가능성, 안정성, 편안함, 사회적 기능, 미학적 아름다움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고려되어야 할 특성들이다. 그리고 공간을 건물-가로-시설-지구-도시-광역 등의 단위로 분류하고 공간 단위에 따라 체계적으로 스마트 도시를 계획해야 한다고 말한다. 건축가 김언용은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전 세계의 도시가 개성을 잃고 획일화될 수 있고, 효율적인 도시 관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시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비판들을 이야기하면서, 스마트 공간이 가진 위험성 또한 잊지 않는다. 건축가 지승열은 아직은 사람의 뇌파(뇌세포가 활동할 때 일어나는 전류)가 전달하는 정보에 기반한 자동화 시스템이 스마트 쉘터에 적용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뇌파와 뇌파를 이용하는 자동화 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더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3년 동안의 연구 결과라지만 아직까지는 큰 그림을 제시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 큰 그림을 실질적인 세부 내용으로 채워나가는 것은 후속 연구에서 이루어질 일이다. 사람들이 주택난, 자연재해, 전쟁과 테러의 위협에서 벗어나 더 안전하고 편리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 고민하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이 책에서는 예술과 공학이 서로 접점을 가진다기보다는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서로의 접점을 찾으며 더 좋은 생각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도판이 작아서 본문 내용을 이해하는 데(특히 공학 파트의 스마트 쉘터, 시스템에 대한 도판들) 도움이 되지 못하고, 2부의 공학 파트가 공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이 읽기에 좀 어려운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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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노트 - 알고 싶은 클래식 듣고 싶은 클래식
진회숙 지음 / 샘터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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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대해 처음 알게 됐을 때 '책에 실린 QR 코드로 클래식 음악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갔다. 종이로 된 책 중에서 QR 코드를 활용하는 책은 처음 봤으니까. 음악은 백 번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직접 듣는 것이 더 나으니, 음악을 주제로 하는 책으로서는 음악을 직접 들려주는 게 큰 장점이 될 것이다. (이미 3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신기한 신제품을 처음 써 보는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

  친절하게도 책 서두에서부터 QR 코드 사용법을 가르쳐주고, QR 코드를 비교적 정확히 인식해 주는 앱들까지 추천해 준다. 사용법대로 QR 코드를 인식하니 정말 해당 곡의 유튜브 영상이 뜬다.


책에 실린 QR 코드를 QR 코드 앱으로 스캔하면 해당 곡의 유튜브 영상 링크와 연결된다.


실제로 책 속 QR 코드를 스캔하면 이런 영상 링크가 뜬다. 이 영상은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중 남주인공 카바라도시가 부르는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


  안타까운 것은 유튜브의 특성상, 해당 계정이 사라졌거나 저작권 문제로 영상이 삭제되는 등의 문제로 지금은 연결되지 않는 링크가 여러 개 있다는 것이다. 해당 링크가 보전되도록 수시로 점검, 업데이트하겠다지만, 출판사가 마냥 이 책만 관리할 수는 없으니 힘든 일일 것이다. 게다가 이 책에 실린 QR 코드는 320여 개나 된다. 그래서 링크가 연결되지 않는 경우에는 내가 직접 유튜브에서 곡 이름으로 검색해서 다른 버전을 찾아 들었다. 320여 개의 곡을 다 듣다 보니 이 책을 다 읽는 데 거의 한 달이 걸렸다. 덕분에 한 달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들었다. 


책에 실린 QR 코드로 볼 수 있는 영상 중 하나.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중 '올림피아의 아리아'. 기계 인형 올림피아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인데, 올림피아 역 소프라노의 기계 인형 연기가 인상적이다.


 QR 코드로 직접 해당 곡을 들으니 텍스트로 된 설명만 읽을 때보다 훨씬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프시코드 같은 옛 클래식 악기 연주를 직접 들으니 그 악기가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연주하며 어떤 음색을 지녔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들에서 피아노 멜로디 자체는 아름답지만 오케스트라 파트는 피아노의 반주 수준으로 빈약하다는 이야기도 직접 들으니 납득이 됐고. 아리아의 경우는 그 곡이 오페라 안의 어떤 장면에서 나오는지를 직접 볼 수 있어, 그 곡이 어떤 맥락에서 불리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오페라 속 성악가들의 연기와 의상, 무대를 함께 볼 수 있어 더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 책은 QR 코드라는 장치에만 기대지 않는다. 클래식 곡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이나, 클래식 음악가들의 사생활 이야기로 내용을 채우는 책들과 달리 이 책은 클래식 음악의 ABC부터 차근차근 알려준다. 클래식 음악의 역사부터 클래식 악기들, 음악 이론과 곡의 형식, 음악 상식들까지. 오케스트라에는 왜 지휘자가 필요한지, 왜 오보에의 A음으로 오케스트라 악기 전체를 조율하는지, 현대에 탄생한 12음 기법은 어떤 거인지, 실내악, 환상곡, 교향곡, 협주곡은 어떤 형식의 곡인지 등등. 초중고등학교 음악 시간 이후로 음악 이론은 잊어버렸어도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지식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다. 

 내용의 질에 있어서나 QR 코드라는 새로운 장치에 있어서나 다른 클래식 책들과 차별화되는 책이다. 
한 번만 본 지식은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지니 곁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읽으면 좋을 것이다. 워낙 많은 곡들이 소개되어 있으니 마음에 드는 곡을 종종 꺼내 들어도 좋을 것이고. 한 번 읽어보고 끝내기보다는 곁에 두고 오래 읽어 보고 싶다. 

P.S 1. 저자는 미술 비평가 진중권의 누나다. 가족이라고 해서 다 닮지는 않지만, 누나나 동생이나 각자의 분야를 대중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데 재능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멜라니 C가 부른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넘버 I Don't Know How To Love Him


정선아가 부른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의 한국어 버전 '어떻게 사랑하나'


P. S. 2. 오페라를 원어로 공연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넘버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의 원곡과 한국어 버전을 예로 들었는데, "...하나, ...했어, 라는 유아적인 뉘앙스의 종결어미 때문인지, 예수에 대한 사랑으로 갈등하는 마리아의 고뇌가 전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라는 말에서 한국어 버전을 깎아내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원어 공연의 중요성으로 든 근거들은 납득이 되지만 '유아적인 뉘앙스'의 종결어미라니. 

  오페라와 같은 이유로 수입 뮤지컬은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원어로 공연해야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는데, 라이센스 뮤지컬도 좋아하는 뮤덕으로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저자가 예시로 든 두 영상 중에서는 나는 오히려 한국어 버전에 더 공감하고 감동했다. 한국어로 개사되면서 원어 가사에 맞춘 리듬과 강세가 어그러지고 가사 속 미묘한 뉘앙스, 의미가 뭉뚱그려지는 것은 인정하지만, 모국어로 가사를 들었을 때 노래의 감정이 더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 의미 전달은 한국어 자막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했지만, 무대와 한국어 자막으로 시선이 분산되는 것보다 한국어로 바로 듣는 것이 의미를 전달하는 데 더 유리하다. 그리고 프랑스 뮤지컬의 라이센스인 <노트르담 드 파리>나 미국 뮤지컬의 라이센스인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넘버들처럼 의미 전달에 그치지 않고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음악적인 운율 모두를 살리는 번역이 있다. 이런 좋은 번역, 좋은 라이센스 공연도 필요하고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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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앉아 금琴을 타고 샘터 우리문화 톺아보기 2
이지양 지음 / 샘터사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즐겨듣는 음악의 범위는 아주 한정적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나 좋아하는 뮤지컬들의 넘버 외에는 아는 음악이 얼마 없다. 특히 국악은 중학교 때 수행평가 때문에 본 공연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국악 공연일 정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옛 글 속의 우리 음악 이야기를 모은 책 『홀로 앉아 금을 타고』를 알게 되었다. 우리 음악에 관심을 가져오진 않았지만 우리 역사에는 관심이 많았고, 그 동안 잘 몰랐던 것에 호기심이 생겨 읽어보기로 했다. 

  이 책은 한문학자 이지양이 고문헌 속의 우리 고전 음악 이야기에 대해 쓴 글들을 모은 책이다. 첫 번째 글이 우리 음악을 잘 모르는 지금 세대에게서 느끼는 안타까움을 담은 글이니, 저자의 목표가 우리 음악을 더 친숙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 이 책을 읽은 뒤에도 국악은 내 귀에서 아직 멀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초중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웠던 국악 지식은 기억 저 편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그러니 저자가 말하는 평조, 계면조가 어떤 조성이고 도드리장단, 중중모리장단이 어느 정도의 박자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런 국악 용어들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저자가 국악 전공자가 아니라 국악을 사랑하는 한문학자이기 때문에 서문에서부터 음악 이론에는 무식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출판사에서라도 용어 설명을 추가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음악은 글로 읽는 것보다 귀로 들을 때 확실히 아는 것인데, 이 책은 음악에 대한 책이라기보다 음악을 이야기한 글들에 대한 책이다.


  이 책에서 글로만 나오는 우리 음악이 궁금해 유튜브에서 찾아 들었다. 그런데 글로 읽는 노래와 직접 듣는 노래는 전혀 달랐다. 클래식 음악에서의 '라르고largo(느리게, 표현을 풍부하게)'가 빠르게 느껴질 정도로 느릿느릿한 가사와 시조창에 충격을 받았다. 책에 나온 가사가 '봄잠을 느지막이 깨어 중창을 반가이 걷으니'인데 실제로 들어보면 '보오오오오오옴자아아아암으으으을 느으으으으으지이이이이이이마아아악이이이이이 깨어어어어어어으 주우우우웅차아아아앙으으을 바아아아아안가이이이이이 거어어어얻으으으니'이다. 과장이 아니다. 그리고 한시를 우리말로 풀어쓴 게 아니라 한자음 그대로 읽는 가사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坐撫樹而終日 濯淸天而自潔'을 "앉아서 나무를 어루만지며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맑은 냇물에 몸을 씻어 스스로 깨끗하게 하기도 한다"고 풀어쓰는 게 아니라 '좌무수이종일하고, 탁청천이자결이라'라고 한자음 그대로 읽는 식이다.) 아직은 국악보다는 클래식이, 클래식보다는 가요가 귀에 익숙하고 편하다. 

  하지만 국악 속에 배어 있는 옛 사람들의 생활상은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배를 타고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을 보낼 때 부르는 노래 <배따라기>는 항구가 있는 고을마다 있다고 한다. 배를 타고 중국이나 일본으로 사신이 떠날 때도 <배따라기>를 불렀다고 하는데, 아예 떠나는 것도 아니고 잠시 여행을 다녀 오는데 이별이라며 슬퍼하는 게 언뜻 생각하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여행을 갔다 사고를 당해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만큼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는 여행길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그리고 판소리 <춘향가> 중 이몽룡이 과거를 보는 장면인 <춘당대시과> 부분은 조선시대 과거 시험 풍경을 어느 역사 기록보다 생생하게 전한다. 

  우리 옛 노래에 중국 한시와 고사에 관련된 가사가 왜 이렇게 많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문화는 그것의 의미를 알고 제대로 향유하는 사람들의 것이니, 처음에 누구에게서 나왔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저자의 말에 납득이 되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한자와 중국 문학은 널리 공유되던 문화적 자산이었을 테니까. 근대 이전의 유럽 문화권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한 예술을 공유했던 것처럼. 서민들이 즐기는 판소리, 민요에서도 중국 옛 고사와 한시가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중국 한시와 고사가 뿌리 깊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 같다. 


<무신진찬도병> 중 '선유락'이 그려진 부분.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불러주던 노래 <배따라기>는 외국 사신을 떠나보낼 때도 불렸다. 이 때 <배따라기>에 맞추어 기녀들이 추던 무용이 선유락이다.


신윤복, <서생과 아가씨>. 이 그림은 변방 지역의 거친 분위기를 그린 노래 '관산융마'에 대한 글과 함께 실려 있지만,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옛 노래들의 정서와 잘 어울린다.


그리고 책 중간중간에 들어간 옛 그림들이 이해를 도우면서 전통적인 분위기를 살렸다. 모든 그림이 책의 내용과 딱 맞는 것은 아니지만, 책에 소개되는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을 그린 그림을 보면서 그 음악이 실제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고, 가사와 어울리는 산수화나 풍속화를 보면서 그 노래 특유의 정취를 더 짙게 느꼈다. 

  우리 음악을 기초부터 제대로 알고 싶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책은 아니다. 나처럼 읽고 나서도 국악이 아직은 귀에 낯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옛 우리 음악 속의 마음들은 와 닿는다. "누군가 저 멀리 있는 이를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믿음이 가는 것이다. 자기와 직접 인연이 닿지 않아도 자기 내면의 온기를 늘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있는 사람은, 그리운 대상이 없어서 누구도 그리워하지 않고 삭막하게 살아가는 사람보다 미덥고 정이 가지 않나?"(「그녀와 놀고픈 봄날의 꿈-춘면곡」 중)
"...칭찬조차 다시 상처가 되고 마는 그런 때, 메시지는 없이 사람의 따뜻한 목소리만으로 얼러 주는 <구음 시나위>가 진정으로 마음을 달래줄 것이다."(「영혼을 얼러 주는 가락-구음 시나위」 중) 아직 국악이 귀에 낯설다 해도, 우리 옛 음악 속에 담긴 옛 사람들의 마음을 전해주었으니, 우리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의 씨앗은 심어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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