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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창작 - 동시대 미술의 형식과 의미
테리 바렛 지음, 이지연.강주희 옮김 / 미진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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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늘 염려되었던 것은 내가 조형적인 측면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나는 미술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술 작품의 조형적인 측면보다는 작품과 관련된 배경 지식에 더 강했고명도와 채도도 구분하지 못했을 정도로 조형적인 측면에 무지했다미술가는 조형적인 요소들을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데 이렇게 조형적인 면에 소홀해서야 미술사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까그 미술가가 어떻게왜 이러저러한 조형 요소들을 사용해 작품을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그래서 미술 창작의 지침서인미술 창작을 읽게 되었다이 책은 미술을 창작하는 학생들을 위한 책이지만미술가의 창작 과정을 이해하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니비아 곤잘레스, <어린 천사>, 1995.

 "인물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가상의 선은 양쪽을 정확히 대칭하여 나눈다. ... 인물의 내리뜬 눈과 은은한 색조는 대칭 구성과 어우러지며 명상에 잠긴 고요한 느낌을 강조한다."(p. 187-188.) 이렇게 이 책은 작품의 의미를 표현하는 데 조형 요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실제 작품들을 예시로 들면서 설명한다.


  내가 바랐던 대로 이 책은 미술 작품의 조형적인 측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이 책의 열세 개 챕터 중 여덟 개가 조형 요소를 다루고 있을 정도로 이 책은 조형 요소에 많은 비중을 쏟고 있다작품의 소재와 물감돌 같은 재료와 회화조각 같은 미술 형식 모두를 포함하는 매체, 작품의 물리적 구조인 형식, 미술가에게 영향을 미친 개인적 경험시대적 배경 등을 뜻하는 맥락이 합쳐져 작품의 의미를 형성하는데이 요소들은 작품 속 조형 요소를 통해 표현되거나 조형 요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조형 이론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양감질감 같은 조형 요소들이 실제 작품들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고 표현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직접 보여주고 있다덕분에 미술 작품의 조형적인 면을 보는 눈을 좀 더 키웠다.


마틴 퓨리어, <부커 T. 워싱턴을 위한 사다리>, 1996. 부커 T. 워싱턴은 노예로 태어나 사회적 평등 운동의 지도자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시민권을 요구하기보다 교육을 통해 흑인들을 진보시키려고 했다. 워싱턴의 이러한 전략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고, 보기에도 위태로운 사다리와 같다고 퓨리어는 비판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더 높은 곳을 향하는 워싱턴의 의지를 찬양하는 의도일 수도 있다. 이렇게 미술 작품의 해석은 다양한 방향으로 열려 있다.

  그리고 미술가들이 어떤 태도로 창작과 비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들을 읽으면서미술가들과 미술 작품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미술가는 작품의 구성 요소들을 통해 작품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지만감상자 스스로 작품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해석의 폭을 열어놓아야 한다미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자신이 말하려는 것과 정반대로 해석되지 않도록 어느 정도 해석의 범위를 좁히지만아예 닫아두어서는 안 된다미술가의 역할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뒤집어보면 감상자인 내가 어떻게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된다그리고 학생들이 만든 실제 작품에 대한 다른 학생들의 비평을 보면서내 눈에는 그저 사물들의 집합처럼 보이는 미술 작품이 얼마나 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론적인 팁 외에도 선배 미술가들이 남긴 조언들을 한 챕터에 모아 놓았다이들의 조언은 미술 창작에 대한 것이지만 나에게도 동기를 부여하고 용기를 주었다. “여러분의 작품과 소통하는 사람이 단 두 명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불쾌해하지 마세요.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았는지얼마나 많은 리뷰를 받았는지로 인해 맘 상해하지 마세요여러분의 작품은 계속 존재할 것이고세상에 영향을 미칠 테니까요또한 여러분의 작품이 주목을 받든 받지 못하든끊임없이 세상이 변화하는 데 영향을 줄 겁니다.” 오노 요코의 이 말은 미술 작품뿐 아니라 뭔가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사람들각자의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용기를 준다그러니 내 자신이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꾸준히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물론 미술 창작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고그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 것이다하지만 미술 창작자가 아닌 감상자인 내게도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미술에 대한 내 눈을 조금은 더 넓혀주었으니. ‘이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책이야라고 생각되는 책들도 이렇게 종종 뜻하지 않은 선물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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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꼴라쥬 시네마 톡 - 영화가 끝난 뒤 시작되는 진짜 영화 이야기
김영진 외 지음 / 씨네21북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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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인도 영화 한 편을 같이 보고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에 나가고 있다. 그 모임의 호스트 분은 영화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해 블로그 포스트로 올리신다. 그렇게 정리된 이야기들을 엮어서 단행본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단행본을 만드는 데 참고가 될 만한 책들을 찾아보다 이 책을 발견했다. '시네마톡'은 2009년부터 CGV에서 진행해 온 행사로, 영화평론가와 관객들이 영화를 함께 관람한 뒤 영화평론가가 그 영화에 대해 해설하고, 관객들과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이 책은 그 중 30개의 시네마톡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30편의 영화 중 내가 본 영화는 세 편밖에 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된 영화들도 있다. 물론 내가 본 영화들의 시네마톡이 가장 이해하기 쉽고 읽기 즐거웠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남아 있던 의문점들이 해결되고, 내가 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보지도 않은 영화나 내 취향이 아닌 영화들의 시네마톡을 읽으면서도 즐거웠다. 영화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오가던 현장을 텍스트로 전해 듣는 것 또한 알차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관객들과 함께 하는 자리이다 보니 영화 이야기가 관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져 있는 점이 좋았다. 영화알못인 나도 시네마톡들의 내용을 거의 다 이해할 수 있었다.(마지막 시네마톡인 <까페 느와르> 편만 빼고. 이건 감독의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안됐다. 운동권 출신 몰락한 지식인(윤희석)이 왜 비가 오면 서울대공원에서 만난 여자(김혜나)를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일종의 부조리극인가.)

  1장 '시네마톡'에 실린 시네마톡들의 길이가 짧은 것은 아쉽다. 시네마톡에서 영화 관람 시간을 빼도 보통 한 시간 20분 정도 해설을 하고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시간 20분 동안의 이야기라고 보기에는 각 시네마톡의 내용이 너무 짧다. 관객들과 나눈 질의응답도 생각보다 적어서, 단행본에 싣기 적당한 내용만 추린 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법정 스님의 의자> 편이나 <소라닌> 편의 경우 영화의 소재가 된 인물(법정 스님)이나 게스트(가수 이상은) 개인에 대한 이야기에 치중되고,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이런 단점들이 있긴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내가 보지 못했던, 내 취향이 아니어서 관심이 없었던 영화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흥미롭고 풍성한지 몰랐다. 

  김영진 평론가는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시네마톡은 영화에게 손을 잡아주는 시간'이라고 했다. 화제작에만 관심이 쏠리는 지금, 세상에는 외로워서 손을 잡고 싶어하는 영화들이 너무 많다고, 그런 영화들은 진심을 품고 누군가 손만 잡아주면 감동으로 응답할 영화들이라고. 내가 지금 참여하는 모임도, 모임의 호스트 분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한 포스트도, 내가 만들고 싶어하는 책도 대규모 흥행작이 아닌 외로운 영화들에게 내미는 손이라고 생각한다. 시네마톡이나 내가 참여하고 있는 모임이 계속해서 그런 영화들의 손을 잡아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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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미술관 - 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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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크룩생크의 풍자화 <뉴 유니언 클럽>(1819). 클럽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흑인들의 모습을 통해, 흑인들의 인권이 신장되면 흑인과 백인이 맞먹게 될 것이라는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몸의 왼쪽 절반은 하얀색, 오른쪽 절반은 검은색인 흑백 혼혈 아기의 모습은 끔찍한 혐오표현이다. 이 그림을 통해 고민하게 된다. 혐오표현과 풍자의 정확한 경계선은 어디일까?(p. 174-176.)


  인권 문제를 다룬 미술 작품들을 이야기하는 책을 구상한 적이 있었다. 구상만 한 게 아니라 기획안도 만들었었는데, 지난 달에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놀랐다. 이 책 또한 미술 작품을 통해 인권 문제를 이야기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확인해 보니, 내가 기획안을 만들기 이전부터 기획된 책이었다. 운 나쁘게도 기본 컨셉트가 겹쳐 내 기획안 하나가 날아갔지만, 내 기획안이 책이 되었다면 이 책과는 어떤 면에서 비슷하고 어떻게 다를지 궁금했다. 미리보기로 몇 페이지를 봤을 때 괜찮은 책이라는 생각도 들어서, 이 책을 사게 되었다.

  내 기획안이 프란시스코 고야, 에드가 드가, 페르난도 보테로 등 각 화가별로 챕터를 나눈 반면, 이 책은 여성혐오 문제, 장애인 인권, 이주민의 인권, 성소수자의 인권 등 각 이슈별로 챕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미술'에 방점을 두었다면 이 책은 '인권'에 방점을 둔 셈이다. 아무래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책이니 그랬을 것이다.(기획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하고, 집필은 김태권 작가가 했다.)  인권 안에서의 다양한 이슈들을 다루기에는 이 책의 구성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책의 저자가 미술사학자가 아니라 만화가 김태권 작가라는 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김태권 작가는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한겨레, 2009)라는 미술사 만화를 출간한 적이 있지만 미술사 전공자는 아니고, 이 책도 만화가 아니다. 이 책은 그가 처음으로 만화가 아닌 줄글 형태로 쓴 책이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의 문장 중에는 줄글보다는 만화 지문에 가까운 짧은 호흡의 문장들이나 구어체에 가까운 문장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꽤 야해 보인다.", "크룩생크(헤르미온느의 고양이가 아니라 19세기 영국의 캐리커처 작가)를 만난다면, (영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치고) 어떻게 그를 설득해야 할까?" 등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쓴 듯 장난스러운 부분들도 많다. 김태권 작가의 유머 감각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허술하거나 진지하지 못한 건 아니다. 김태권 작가는 머리말에서부터 자신 또한 인권 문제에 있어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는 여러 모로 잠재적 가해자다. 남성이고 중산층이고 비장애인이며 이성애자다. 한국에 사는 한국 사람이니 국적 때문에 차별을 겪을 일도 없다. 이런 내가 조심하는 마음 없이 산다면, 여성이나 장애인이나 성소수자나 이주노동자나 북한이탈주민 앞에서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나는 내 언행도 주위 사람의 언행도 불편하다. 하나하나 고민하고 검토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p. 6.) 그  『삼인삼색 미학 오디세이』 , 『십자군 이야기』  속 무거운 주제와 발랄하고 유머러스한 만화 사이의 균형 감각을 줄글에서도 발휘한다. "왜 여성인권이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자기가 피해자라고 느끼는 남성들이 나타날까. 피해는 원래 여성의 몫이라고 생각해서 그럴까. 여성이 희생자의 위치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피해가 자기한테 떠넘겨진다고 믿는지도 모르겠다."(p. 209.) 그는 장난스러운 듯하면서도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한다.

  300페이지도 안 되는 얇은 책인데다, 각각의 주제만 하더라도 깊이 파고들면 책 한 권은 쓸 수 있는 주제인데 한 챕터만으로 다루다 보니 깊이 있게 다루지는 못한다. 특히 하나의 정답을 내놓을 수 없는 인권 이슈들에 대해 그는 문제 제기만 한다. 혐오표현과 풍자의 정확한 경계선은 어디일까? 히잡을 쓰자는 사람은 여성혐오에 빠진 근본주의자인가, 아니면 인종주의에 저항하는 무슬림 당사자인가? 히잡을 벗기려는 사람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중시하는 여성주의자인가? 아니면 이슬라모포비아에 찌든 인종주의자인가? 이러한 그의 '치고 빠지기'가 못마땅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문제 제기만으로도 자기 역할을 다했다. 정답이 없는 인권 문제에 대한 답을 찾고, 서로 다른 답들 사이에서 고민하고 합의점을 찾아내고 선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미술 작품들은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인권 이슈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저 아름다운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싶을 뿐인데 눈앞에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미술 작품들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들, 자신이 당연한 듯 누리고 있는 권리들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기울인다면 우리가 누군가의 인권을 침해하고 상처를 주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작가가 머리말에서 말한 것처럼 누구나 인권 문제에 있어서 잠재적 가해자다. 깊이 있는 분석까지 들어가지 못한다 해도, 이 책은 "불편함의 아주 작은 불씨'를 남겼다. 나는 기획안 하나를 잃은 대신 좋은 책 한 권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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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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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랜 친구 H군

  잘 지내고 있어? 직접 만난 지는 오래됐지만, 가끔씩이라도 메시지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아. 같이 이야기하면서 너한테 배우는 게 많아. 

  얼마 전에는 이중섭의 편지집을 읽었어. 화가의 글만큼 그 사람의 작품 세계를 솔직히 말해주는 글도 없을 거야. 고흐는 글로 그림을 그리듯이 주변 풍경과 앞으로 그릴 작품들을 묘사하는 편지를 썼어. 고갱은 원시적인 열대 지방에 대한 판타지를 자기 글에도 반영했고. 샤갈의 글은 자기 그림들처럼 환상적이고 한 편의 시 같아.


이중섭, <춤추는 가족>.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그래서 나도 이중섭의 편지에서 작품 이야기를 기대했어. 그런데 자기 아내와 아이들 이야기가 80퍼센트더라. 당신은 귀엽고 소중하다, 당신은 나의 천사다, 나만의 훌륭한 아내다 이런 말이 얼마나 많이 반복되는지 나중에는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어. 하지만 아내가 생활고 때문에 일본의 친정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많이 외로웠던 걸 생각하면 이해가 돼. 아내와 아이들은 바다 건너 일본에 있고, 6.25 전쟁 때문에 어머니, 형과도 헤어지고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살고. 이중섭을 살게 했던 건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림이었던 것 같아. 사실 그림을 그리게 하는 원동력도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어. 


이중섭, <돌아오지 않는 강>, 1956. 제목에서부터 이중섭의 절망감이 배어 있다.


  이중섭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들에서 굳세게 마음먹고 희망을 가지자, 나는 꼭 훌륭한 작품을 그릴 거라고 끊임없이 말해. 그런데 불안감 때문에 스스로 다짐하려고 더 자주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싶어. '사흘에 한 번 편지를 보내 달라고 했는데 왜 안 보내는 거요? 당신만 힘든 줄 아시오?' , '내가 그쪽(일본)으로 가든지 당신과 아이들이 이쪽(한국)으로 오든지 하지 않으면 헤어질 각오를 해야 할 거요.' 불안감을 못 견디고 이렇게 화를 내는 부분에서 무서웠어. 물론 다음 편지에서 바로 사과하긴 하지만.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쉴 새 없이 편지를 썼던 이중섭은 1956년부터 갑자기 편지를 쓰지 않았대. 이 책에 같이 실린 친구 구상의 글에서는, 이중섭이 "나는 세상을 속였어! 그림을 그린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다니며 훗날 무엇이 될 것처럼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자책했대. 자신이 세상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조차 욕심이라고. 그렇게 이중섭은 모든 생명력을 잃고 그 해 세상을 떠났어. 

        이중섭, <도원>, 1954. 춥고 외로운 삶을 살았지만 그의 그림은 밝고 따뜻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죽고 나서도 자기 그림으로 세상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 가족들과는 떨어져 지내고, 돈 문제는 도무지 해결이 안 되고 편히 지낼 집 한 칸 없는 삶이지만, 따뜻하고 다정한 그림들을 그려냈거든.  고흐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넘버 중에 '그림만은 남아서 다정하게 말을 걸 거야.'라는 가사가 나와. 그 가사처럼 이중섭의 그림들은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 돈이 없어 병든 친구에게 복숭아를 사 주지 못하지만 대신 복숭아 그림을 그려주었던 따뜻한 마음이 그림 속에 배어 있어서일 거야. 이 책을 곁에 두고 가끔씩 이중섭의 그림들을 들여다 보고 싶어. 

  꼭 그림이 아니더라도 네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 것들이 있었으면 좋겠어. 잘 지내.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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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화학자 1 - 이성과 감성으로 과학과 예술을 통섭하다, 개정증보판 미술관에 간 지식인
전창림 지음 / 어바웃어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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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섭(統攝)은 '서로 다른 것을 한 데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의미로,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서로 다른 분야의 학문을 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범학문적 연구를 말한다. 그런 통섭이 이루어지는 책을 만들고 싶어 참고할 만한 책들을 찾아보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미술사와 과학의 만남이라니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미술사 전공자이자 과학알못인 내게 이 책이 어떻게 다가올지도 궁금해졌다. 나는 미술사 전공자로서도, 과학알못으로서도 이 책에 만족했을까?


(위)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아래)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


  우선 미술사 전공자로서는 만족하지 못했다. 교양 서적에 전공 서적 수준을 바랐다가 실망한 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책이 교양 서적으로서 미술사 지식들을 잘 정리했고 재미있게 전달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다른 교양 서적들에도 나온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 책 내용 중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이 책에서는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1889)이 아를의 노란 집에서 그린 작품이라고 했는데, <별이 빛나는 밤>은 반 고흐가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린 그림이다. '아마도 그의 마지막 그림으로 여겨지는'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이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소개했는데, 최근의 미술사 연구를 통해 반 고흐가 <까마귀가 나는 밀밭> 이후에도 작품 몇 개를 더 그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화가의 생몰년도가 잘못 표기된 것도 몇 개 보인다. 책 내용을 좀 더 꼼꼼하게 교열했어야 했다.


(위) 렘브란트, <야경>, 1642.

(아래) 피에로 디 코시모, <프로크리스의 죽음>, 1486~1510년경.


그럼 과학알못으로서는 만족했을까. 과학알못으로서도 만족하지 못했다. 책의 내용 중 렘브란트의 <야경>이 그려졌을 당시보다 훨씬 어두워져 밤 풍경으로 오해받게 된 이유는 흥미로웠다. 18세기에 그림 보존을 위해 덧칠한 갈색 바니시(Varnish, 물감에 섞거나 그림 표면에 발라 윤기를 내고 내구성을 높이는 마감재. '니스'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와 납을 포함한 안료와 황을 포함한 안료가 만나면 검게 변색된다는 특징 때문에 그림이 원래 모습보다 훨씬 더 어두워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대부터 시작된 연금술이 화학에 어떤 기여를 했고,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화가 피에로 디 코시모의 그림 <프로크리스의 죽음>에 어떤 연금술적 상징들이 숨어 있는지 설명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이렇게 미술사와 화학이 제대로 만나는 챕터들은 흥미로웠지만, 기존의 교양 미술사 책에 나오는 내용에 과학 이야기는 아주 조금만 곁들여진 챕터들도 많았다. 전반적으로도 미술사와 과학이 적절한 비율로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사에 과학이 조금 곁들여진 정도다. 


 그리고 과학알못으로서 좀 더 알기 쉽게 설명되었으면 하는 부분들도 있었다.


"불포화지방산은 지방산 사슬 중에 불포화기를 포함하고 있어서 녹는점이 낮아 상온에서 액체 상태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표화기가 가교결합을 하며 굳어져 단단한 도막을 형성하는데, 바로 이 점을 그림물감에 이용한 것이다."

"기하이성질체에는 시스-트랜스 구조가 있다. 탄소에 각기 다른 네 개의 치환기가 결합되어 있을 때 그 탄소를 비대칭 탄소라고 하며, 비대칭탄소가 있어야 광학이성질체가 존재한다."


 불포화기? 가교결합? 시스-트랜스 구조? 치환기?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내가 정말 과학에 무지해서 모르는 것이긴 하지만, 이런 용어들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있어야 했고, 과학 원리에 대한 설명도 과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좀 더 자세해야 했다. 


『미술관에 간 화학자』의 목차. 목차에도 해당 챕터의 대표 이미지들을 넣었다. 

이미지 출처: https://blog.lgchem.com/2014/12/book-recommend/


『미술관에 간 화학자』는 즐겁게 읽으면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책이고, 목차에 텍스트만 넣지 않고 해당 챕터의 대표 이미지들을 넣는 등 책의 만듦새에도 공을 들인 책이다. 하지만 미술과 과학의 동등한 1 대 1 만남이라기보다는 기존의 미술사에 과학을 조금 곁들인 정도로 느껴진다. 과학 원리에 대한 설명도 아주 친절하지는 않다. 그래서 미술과 과학의 통섭을 이루었다고 하기에는 조금 아쉬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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