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지에서 생긴 일
마거릿 케네디 지음, 박경희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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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결말 스포일러 포함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살인이 벌어지고, 살인자를 찾는 데 주력하는 전개의 영화 장르를 '후던잇(Who done it)'이라고 한다. 관객은 '누가 죽였는지' 궁금해 '후던잇'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된다. 이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건 '누가 죽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다.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는 것을 책 도입부에서 이야기하고, 참사가 벌어지기 일주일 전 현장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생존자들이 있다고 서두에서 이야기했으니 몇 명은 살아남겠지만, 현장에 있던 20여 명의 등장인물 중 누군가는 분명히 죽을 것이다. 소설이 전개되는 내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에,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나 스릴러가 아닌데도 독자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사의 징후는 점점 더 선명해져 독자의 마음속 불안감은 더 커져간다.

참사가 일어난 현장은 1947년 8월까지 영국의 한 바닷가 절벽 아래 있었던 호텔이다.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절벽에 간 균열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는데, 마침내 절벽 한쪽이 무너져 내려 호텔 위로 쏟아졌다. 호텔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작가는 절벽이 무너지기 일주일 전으로 우리를 데려가, 그 일주일 동안 이 호텔에 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호텔 자체가 당시 영국의 축소판인 것처럼 호텔 안에는 노인부터 어린아이, 귀족부터 서민까지 다양한 연령과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서로 어떤 관계인지 드러나고, 평소라면 만날 일이 없었던 사람들이 서로 얽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면서 사람들은 평생 동안 갇혀 있었던 틀에서 벗어나 변화한다. 그런 변화가 어찌나 감동적인지 '이 사람들은 제발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제 막 새 삶을 시작했는데'라는 마음이 든다. 반면 자신의 이기심과 관성, 탐욕에 사로잡혀 조금도 달라지려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은 "못된 사람은 몇 명뿐이지만,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가고도 남아요."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과장이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다. 책 속의 등장인물이라고 해도 누군가가 죽길 바라는 것이 바람직하진 않지만,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그들이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현실에서도 픽션에서도 나쁜 사람만 죽지는 않으니, 비호감 캐릭터들만 죽을 리 있겠는가. 독자들의 마음을 울렸지만 목숨을 잃어 독자들을 더 안타깝게 할 등장인물들도 있을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는 정말 비호감 캐릭터들만 죽인다. 그것도 개연성 있게. 한국 고전소설만큼이나 권선징악을 확실히 보여주지만 그것이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뒤표지의 문구처럼 등장인물 모두에게 구원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구원의 기준은 단 두 가지다. 반성하고 스스로 변화하려 했는가. 그렇지 않다면 작은 선의라도 타인에게 베풀려고 했는가. 그중 한 가지라도 한 사람은 살아남지만, 한 가지도 하지 않고 원래의 상태 그대로 머문 사람은 살아남지 못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이라고 완전무결한 선인은 아니고 죽은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처참히 죽을 만큼 악독한 악인은 아니지만, 작품 속 세계의 신(그러니까 작가)의 결단은 단호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에, 결말은 더욱더 단호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희망적이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소설 속에서 구원에 이르는 길이 그렇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귀찮고 피곤하더라도 누군가 놓고 간 물건을 가져다주는 작은 선의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 그리고 작가는 용기를 내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 사람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준 사람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누가 죽을 것인가' 하는 의문은 결말에서 '누가, 왜 살아남았는가'로 바뀌고, 책을 덮고 나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바뀐다. 그것이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작가가 이 소설로 이야기하려는 메시지는 지극히 권선징악적이고 교훈적이지만,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고루하거나 도식적이지 않다. 20여 명의 등장인물들은 납작한 선역도 악역도 아니고 우리처럼 각자의 장점과 약점, 선한 면과 악한 면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변화해, 몇십 페이지 전만 해도 그들에게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끝내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들도, 변화하고 성장하는 사람들과 대조되는 대상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서사와 개성을 갖춘 캐릭터로서 살아 숨 쉰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드라마에 이들 중 누가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더해져, (한국어 번역판 기준) 5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결말이 궁금해 새벽까지 읽었을 정도다. 서스펜스와 감동을 모두 잡으면서도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하지 않도록 작가는 절묘하게 균형을 잡는다. 그래서 읽는 동안에는 즐겁고, 읽은 후에는 여운이 남는다. 단호한 결말 너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고단한 삶을 이어가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새롭게 만들어갈 것을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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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 조지 손더스의 쓰기를 위한 읽기 수업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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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국의 소설가 조지 손더스가 대학에서 맡고 있는 소설 창작 수업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될 생각이 없는 나는 왜 이 책을 읽었을까. 내가 인생작이라고 할 정도로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을 졸작이라고 혹평하는 사람들이 많아, 작품을 보는 내 안목에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작품 자체나 캐릭터(영화나 드라마의 경우 배우)의 매력에 눈이 먼 것일까. 그래서 제대로 작품을 읽는 법을 배워보고 싶었다.

이 책이 어쩌서 독자를 위한 책이기도 한지 저자는 나보다 좀 더 심오한 이유를 말한다. 독자들은 읽기가 자신을 더 포용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삶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안다고. 읽는 방식을 공부하면 다른 사람(즉 작가)의 정신을 읽게 되고, 더 나아가 현실을 더 예리하게 읽어낼 수 있게 된다고. 읽는 법을 훈련하면 타인과 세상을 읽는 우리의 능력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흠, 솔깃한데. 그러니 작가가 될 마음이 없더라도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히 확보했다.

독자는 저자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대문호들의 단편 일곱 편을 읽게 된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가 놓치기 쉬운 것들을 짚어주는 저자를 보면, 문학 작품을 낱낱이 분석해 주는 수능 국어 수업이 생각난다. 물론 수능 국어 수업과 달리 저자의 수업에서는 하나의 정답만 강요하지 않는다. 저자는 '나와 의견이 다르다면 그것은 당신의 예술적 의지가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니까. 그리고 작품의 어떤 것이 복선이고 어떤 것이 상징이며 주제는 무엇인지 해부하고 분석하는 수능 국어 수업과 달리, 저자는 작가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확장시켜 나가고, 뻔한 이야기가 될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서 이 이야기를 위대하게 만들었는지 차근차근 보여준다. 저자의 해설을 듣지 않았다면 '이 단편소설에는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게 없잖아', '이 작가는 왜 갑자기 사건을 전개하다 말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전부를 장황하게 소개하지', '이 단편소설은 왜 이렇게 황당하게 전개된담' 이 정도 생각에 그쳤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영어로 번역된 러시아어 단편을 한국어로 또 한 번 옮긴 것이니 원작과 좀 더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러시아인 동료를 통해 자신이 원문의 흐릿한 모방에 불과한 것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데, 한국어로 한 번 더 걸러서 읽게 되는 한국 독자들은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번역가가 유려하게 번역했고, 저자가 특정 부분의 각 영어 번역본별 번역을 비교해 주어 우리는 번역들 사이에서 원본의 뉘앙스와 의미를 조금이나마 손에 잡을 수 있다.

그리고 한국어로 한 번 더 걸러졌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작가와 그가 그려낸 인물들을 만날 수 있고, 저자의 수업을 통해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을 더 가까이 느낄 수도 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쓴 체호프,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고골 네 작가는 각각의 스타일과 개성을 지니고 있고, 이 책에 실린 단편들만으로도 그것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대문호라 불리는 그들의 작품에도 결점이 있고, 우리가 그 결점 있는 부분을 고쳐 써볼 수도 있다는 데서 우리는 그들과 우리의 격차가 생각보다는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들은 백수십 년 전 러시아 사람들이지만,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우리 자신도 갖고 있는 측면, 우리 자신도 느끼는 감정, 경험, 문제, 모순까지 보여주며 작품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이렇게 우리는 읽기를 통해 타자와 연결된다. 백수십 년의 세월과 수천, 수만 킬로미터의 공간을 뛰어넘어서.

그러나 소설을 읽으면서 타자와 연결됐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 실린 단편의 작가들이 활약했던 문화의 황금기 바로 뒤에 스탈린의 폭정이 이어졌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소설이 무언가에 효용이 있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고. 그럼에도 저자는 읽고 쓰기를 여전히 사랑한다. 소설은 우리의 마음을 아주 조금씩 바꾸고, 그 변화는 크지 않지만 진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픽션 작품을 보는 내 안목이나, 타인에 대한 내 이해력과 공감 능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요소와 원리를 조금은 알게 되었고, 그것으로 내가 어떤 작품을 왜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좀 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며, 그 이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그 사람 자체를 아주 조금이라도 더 깊이 이해하고, 타인들과 내가 발 붙이고 있는 현실을 더 예리하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 책을 읽기 전과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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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의 일곱 개의 달
셰한 카루나틸라카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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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1990년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이 한창이고 정부군도 반군도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있으며, 부패한 독재 정권은 납치와 고문을 자행하고 있다. 그렇게 피비린내 나는 시대에 30대 중반의 사진작가인 주인공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자신이 왜 죽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승과 저승 사이의 세계인 중간계에서, 그는 달이 일곱 번 뜨고 지기 전까지 망각의 빛으로 들어가 환생하지 않으면 영원히 구천을 떠돌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그가 찍은 사진이 세상에 남아 있고, 그 사진 때문에 그가 소중히 여기던 사람들이 위기에 처한다. 자신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고 그들을 지킬지, 모든 것을 잊고 환생할지 주인공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 책을 한 문단으로 소개하자면 이렇다. 독재 정권 시기를 거쳐왔고, <신과 함께> 같은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는 판타지에 익숙한 한국 독자로서는 이런 시놉시스에 끌리게 될 것이다. 나 또한 그랬고. 하지만 이 책의 초반부를 넘어가기는 쉽지 않다. 한국 독자에게는 낯선 스리랑카의 현대사와 그를 둘러싼 스리랑카 국내외의 갈등 구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이승에서는 인간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굴러다니고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고깃덩어리가 된 인간들의 혼령이 죽었을 때의 끔찍한 모습 그대로 배회하고 있다. 주인공은 정의감과 사명감에 불타는 인간이 결코 아니며, 마약, 섹스, 도박에 중독되어 있었고 사랑에 있어서도 지고지순하지 않다. 연인이 있는데도 가는 곳마다 마음에 드는 남자들과 관계를 갖고, 마음은 주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식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짝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선을 긋지 않고 방치한 채 애매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런 상황, 이런 주인공에게서 감동을 이끌어 내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가는 그 일을 해낸다. 주인공은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우유부단한 인간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진실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는 최소한의 양심,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사랑, 자신이 지키려던 진실이 다시 가려지더라도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는 인류애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산 사람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한계를 뚫고 닿으려 했던 곳에 닿아 현실을 움직였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극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그가 죽어서도 지키고 결국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사진, 정부가 민간인 학살을 조장했다는 증거가 된 사진은 생각보다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스리랑카의 내전은 그 뒤로도 2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원한에 찬 유령들이 산 사람을 조종해 일으킨 테러는 막지 못했고, 무고한 사람들까지 죽었다. 그런데도 가장 큰 원흉은 죽이지 못했다. 그의 몸부림은 현실이라는 견고한 벽에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균열을 남겼을 뿐이다.


하지만 미세하다고 해도 그가 죽어서도, 자신의 운명을 걸고 한 일은 현실을 변화시켰다. 누군가는 그의 사진을 보고 진실을 깨달았고 그가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대피한 사람들은 목숨을 건졌으며, 그가 자신의 운명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킨 사람들은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연인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웃으면서 들을 수 있었고,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현실은 아직도 잔혹하고 황폐하며 그가 다시 태어난 곳도 이곳 못지않게 잔혹한 세상일지 모르지만, 그가 선택한 대로 그는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곳으로 갔을 테니. 짧고 불행하고 세상의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 것 같아 보이는 생이더라도 분명 의미가 있었다는 깨달음을 안은 채.


이 소설처럼 독재 정권의 잔혹한 폭력을 그린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역사 연구자는 이런 질문을 받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 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이 책은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수천, 수만 번이나 반복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다. 삶은 결코 아무것도 아니지 않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삶도 역사도 계속된다. 


P. S. 1. 스리랑카의 근현대사와 언어, 문화를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번역자가 충실히 주석을 달아주었다. '왜 이런 사소한 단어까지 굳이 스리랑카어로 적고, 뜻을 각주로 달았느냐'는 이야기도 보이는데, 이 소설은 스리랑카인 작가가 영어로 쓴 것이다. 제3세계의 작가들은 모국어 대신 영어나 프랑스어처럼 전 세계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작품을 쓸 때,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작품에 모국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모국어 단어를 종종 삽입한다. 번역자와 출판사는 이 점을 충실히 살린 것이다. 주석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의 당시 상황과 주인공의 모델이 된 실제 인물의 이야기까지 해설로 실어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했다.


P. S. 2. 이 책의 쪽번호 아래에는 달 그림이 들어가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의 일주일을 따라가는 구성인데 한 챕터가 주인공의 하루에 해당한다. 달은 쪽번호 아래서 차오르다 다시 야위고, 마침내 완전한 빛이 된다. 쪽번호 아래의 달을 살펴보면 주인공과 모든 여정을 함께하고 결국 빛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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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고백들 에세이&
이혜미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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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다루는 콘텐츠라면 다 좋아한다.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예쁘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의 모습에 눈이 즐거워진다. 생생한 음식 묘사를 읽으면 아는 맛을 떠올리든 모르는 맛을 상상하든 행복해진다. 이 책도 글과 함께 실린 음식 사진들이 예쁘고 생생해 보여서 선택했다. 그런데 글을 읽어보니 단순히 '맛있겠다'는 느낌을 주는 게 아니라 감각을 깨우는 느낌이다.


물복숭아와 딱딱한 복숭아 중 고르라면 나는 '한 입 베어 물면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이 흐르는' 물복 중의 물복을 택하겠다. (중략) 어쩔 수 없이 끈적이고 흘러넘치는 여름 마음.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한겨울에 여름을 느꼈다. 복숭아의 맛과 흐르는 과즙, 복숭아를 먹을 때 느껴졌던 덥고 습한 공기. 연하디연한 색과 금방 물크러져 버리는 촉감까지. 단순히 음식 맛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이나 음식 재료의 색과 촉감, 경도, 그 음식을 만들거나 만들 때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햇살, 바람, 분위기들까지 전해준다. 그래서 미각뿐만 아니라 오감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시인답게 음식이나 음식들의 재료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비유나 상념들을 끌어내는 것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동그랗게 썬 야채들을 동그랗게 배치한 라타투이에서, 한 문장에 비슷한 다른 문장을 덧대며 글을 이어가는 글쓰기를 떠올린다. 라자냐를 한 겹 한 겹 쌓아 올리면서 고서나 파손된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다시 복원해 가는 제본사의 작업 같다고 생각한다. 가지는 "어둠으로 빛을 감싸 매끈하게 묶어둔 일인용 우울' 같다고 한다.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도 있었지만, 나만의 참신한 비유나 표현을 찾지 못하고 사실 위주의 단순한 문장밖에 쓰지 못하는 나로서는 신기하고 신선했다.

감각적이고 독특할 뿐만 아니라 다정하다. 좋아해요, 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마다 요리를 했고, 당신을 이렇게 많이 생각한다고 선언하는 마음으로 접시를 놓았다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드는 이야기에서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이 드러나는 장면에서도 작가의 다정함이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것은 다음 구절이다.


슬픔에 빠져 주위가 암담할 때 당근을 생각한다. 자신이 화려한 색을 지닌 것도 모른 채 땅속에 잠겨 있는 형광빛의 근채류 식물. (중략) 이해하기 어려운 이 세계의 비애 속에서 주홍 단검을 손에 쥐고 드리워진 우울을 가르며 가야지. 당근이 깊이를 알 수 없이 두려운 땅 속에서도 은밀하게 자신의 빛을 지키는 것처럼.

당근 자체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당근은 깊이도 알 수 없이 깊고 캄캄한 땅속에서도 자신의 빛을 지킨다는 구절이 와닿았다. 나도 그렇게 캄캄한 어둠 속에 있으니까. 내 빛이 얼마나 크고 밝은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묵묵히 내 자리에서 그 빛을 지키고 싶어진다. 단검처럼 단호한 마음으로.

책을 읽으면서 평생 먹는 것에서 행복만 느끼며 살아온 사람일 줄 알았는데, 작가의 말에서 거식증과 폭식증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었다는 이야기를 보고 놀랐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괴로운 시간들이 있었기에 음식 덕분에 느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더 실감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작가는 직접 화단을 가꾸고 요리를 배우고 시를 쓰면서, 음식을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면서 회복되어 가고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작가가 그렇게 스스로를 회복하고 치유했기 때문에, 힘내라고 직접 이야기하지 않아도 조용히 마음을 다독이는 듯하다. 작가의 글 마지막에서 '이 고백이 당신에게 무사히 가 닿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작가의 고백은 내게 무사히 와 닿았고 작은 온기를 전해주었다. 무뎌 있던 감각을 다시 깨워주었고, 일상에 작은 활기를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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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 배우는 시간 창비시선 483
송진권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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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백석, 윤동주 이후의 현대 시인 중에서는 정호승의 시집만 읽어봤다. 시도 한 권 읽으려고 도서관에서 아무 시집이나 꺼내 펼쳐봤다, 이해할 수 없는 비유와 상징들에 좌절했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한 사람이라 모호하고 난해한 글은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시집을 발견했다.

『원근법 배우는 시간』은 미술과 관련된 책인가 싶은 제목과 달리, 토속적인 시들로 가득찬 시집이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시인이 고향 마을 풍경을 노래한 시들을 모아놓았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살아본 적도 없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라고 하는데, 이 시집도 그렇다. 친가는 바다가 바로 앞에 있는 어촌 마을 집이었다는데, 두세 살 때 갔다 온 뒤로는 가본 적이 없어 기억에 없다. 외가도 시골은 아니었고, 그나마 외삼촌 댁이 소를 많이 키웠지만 이 시집에 나오는 것처럼 깊은 시골에 있진 않았다. 시골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어린 시절 어느 시골 시냇가에서 그 동네 아이들에게 산딸기를 받아 먹었던 기억뿐이다. 그것도 정확히 언제 어디서 있었던 일인지 기억도 안 난다.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인지 그냥 꿈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시집을 읽으면 있지도 않은 시골 마을에서의 추억이 떠오르는 듯하다.

평생 도시에서 살아왔고 도시 생활에 만족하기에, 사람들이 시골이 좋다고 이야기할 때 공감하지 않는다. 도시에서 쏟아져 나오는 볼거리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에 시골은 지루하게 느껴졌다. 시골을 다룬 글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현실에 지쳤는데 농촌의 팍팍한 현실, 농촌의 현실을 고달프게 만든 것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시들은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고. '아이고, 불쌍한 우리 어머니 아버지' 아니면 '그리운 내 고향' 이야기만 나오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지루하지 않다. 시골에 내려가서 어르신들 이야기를 옆에서 듣는데 듣다 보니 재미있는 기분이다. 현실의 아픔과 서글픔을 아예 그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더 없이 덤덤하게 풀어놓는다. 시의 어조는 느긋하고 평온하다. 마실 나온 동네 어르신처럼. 애끓는 그리움을 토해내는 대신 어제와 오늘의 정겨웠던 나날들을 노래한다. 처음 들어본 좀 오래된 말들과 충청도 사투리 때문에 사전을 찾아봐야 했지만, 오히려 새로운 말들을 알아갈 수 있어 즐거웠다. 구수하고 정겨운 이 시들에는 그런 말이 말맛을 더해주고.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시골보다 도시를 더 좋아하고, 내 고향인 도시, 내 2의 고향인 도시, 이 두 도시를 사랑한다. 그래도 이 시집은 내가 살아보지 않은 시간, 살아보지 않은 곳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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