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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 배우는 시간 ㅣ 창비시선 483
송진권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평점 :
부끄럽지만 백석, 윤동주 이후의 현대 시인 중에서는 정호승의 시집만 읽어봤다. 시도 한 권 읽으려고 도서관에서 아무 시집이나 꺼내 펼쳐봤다, 이해할 수 없는 비유와 상징들에 좌절했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한 사람이라 모호하고 난해한 글은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시집을 발견했다.
『원근법 배우는 시간』은 미술과 관련된 책인가 싶은 제목과 달리, 토속적인 시들로 가득찬 시집이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시인이 고향 마을 풍경을 노래한 시들을 모아놓았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살아본 적도 없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라고 하는데, 이 시집도 그렇다. 친가는 바다가 바로 앞에 있는 어촌 마을 집이었다는데, 두세 살 때 갔다 온 뒤로는 가본 적이 없어 기억에 없다. 외가도 시골은 아니었고, 그나마 외삼촌 댁이 소를 많이 키웠지만 이 시집에 나오는 것처럼 깊은 시골에 있진 않았다. 시골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어린 시절 어느 시골 시냇가에서 그 동네 아이들에게 산딸기를 받아 먹었던 기억뿐이다. 그것도 정확히 언제 어디서 있었던 일인지 기억도 안 난다.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인지 그냥 꿈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시집을 읽으면 있지도 않은 시골 마을에서의 추억이 떠오르는 듯하다.
평생 도시에서 살아왔고 도시 생활에 만족하기에, 사람들이 시골이 좋다고 이야기할 때 공감하지 않는다. 도시에서 쏟아져 나오는 볼거리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에 시골은 지루하게 느껴졌다. 시골을 다룬 글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현실에 지쳤는데 농촌의 팍팍한 현실, 농촌의 현실을 고달프게 만든 것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시들은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고. '아이고, 불쌍한 우리 어머니 아버지' 아니면 '그리운 내 고향' 이야기만 나오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지루하지 않다. 시골에 내려가서 어르신들 이야기를 옆에서 듣는데 듣다 보니 재미있는 기분이다. 현실의 아픔과 서글픔을 아예 그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더 없이 덤덤하게 풀어놓는다. 시의 어조는 느긋하고 평온하다. 마실 나온 동네 어르신처럼. 애끓는 그리움을 토해내는 대신 어제와 오늘의 정겨웠던 나날들을 노래한다. 처음 들어본 좀 오래된 말들과 충청도 사투리 때문에 사전을 찾아봐야 했지만, 오히려 새로운 말들을 알아갈 수 있어 즐거웠다. 구수하고 정겨운 이 시들에는 그런 말이 말맛을 더해주고.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시골보다 도시를 더 좋아하고, 내 고향인 도시, 내 2의 고향인 도시, 이 두 도시를 사랑한다. 그래도 이 시집은 내가 살아보지 않은 시간, 살아보지 않은 곳을 그리워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