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요리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스탠리 엘린 지음, 김민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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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별 요리』를 처음 알게 된 건 러시아 문학 속 음식들을 분석한 책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를 통해서였다. 러시아 문학 중 미식에 탐닉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소설을 다룬 부분에서, 미국의 추리 작가 스탠리 엘린의 단편소설 「특별 요리」의 내용이 소개되었다. 이 소설은 러시아 문학은 아니지만 미식에 집착하느라 더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소개되었다. 전체 줄거리가 다 소개되는 바람에 읽어보지도 않은 소설의 스포일러를 당했지만, 그래도 직접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특별 요리」가 수록된 동명의 단편소설집을 찾아읽게 되었다.

직접 찾아 읽어보니, 장르 문학이지만 한 편 한 편이 순수문학 못지않게 문장력과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나다엘린의 문장력이 뛰어나서인지 번역가의 감각이 젊은 것인지 70여 년 전이 배경인데도 전혀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번역문의 문장도 자연스럽고 깔끔하다간결한 문장만으로도 소설의 분위기를 섬세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특히 「성탄 전야의 죽음과 「체스의 고수」, 「브로커 특급의 마지막 문장은 그 문장 하나만으로 반전을 제시하며 전율을 일으킨다.

엘린의 단편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난처한 상황더 심하게는 파국으로 치닫는데안됐다 싶다가도 따져보면 거의 전부가 자업자득인 경우다또 다른 소설이나 영화를 연상시키는 부분들이 중간 중간에 보이는데작품이 쓰여진 시기를 생각하면 엘린의 소설들이 원조가 아닐까 싶다. 엘린의 소설들이 이후에 나온 수많은 스릴러 소설, 영화들의 원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단편에 대한 단상은 이렇다.


특별요리

등장인물들은 식도락에 미학이니 예술이니 온갖 미사여구를 다 끌어들이지만 정작 이 작품의 결론은 인간들아적당히 미식에 탐닉해라.’코스테인은 식당의 비밀과 래플러의 운명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방관한 건 아니었는지 미심쩍다이미 스포일러를 당하고 읽었고스포일러를 당하지 않았어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의 반전은 뻔하다그런데도 맛의 섬세한 묘사와 인물들 사이의 묘한 긴장감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읽었다.


손발의 몫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로 일한 경험이 꽤 많아서 갑자기 낯선 곳에서 사무 보조 일을 하게 된 주인공에게 공감하면서 읽었다사람을 죽이고 나서도 어떻게 계속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생계를 생각하면 일을 그만두기는 쉽지 않다그리고 나쁜 짓을 하고도 인간은 생각보다 더 쉽게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인이라는 소재는 내 생계를 위해 다른 사람에 대한 죄책감과 양심도 버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비유이지만, 그저 비유로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아서,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기 두려워서 외면해 버릴 때가 많으니.


성탄 전야의 죽음

이 단편의 반전은 최근에 일어난 줄 알았던 의문사 사건이 무려 20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 20년 동안 찰리와 실리아변호사는 같은 지옥 안에 있었던 셈이다하지만 누구 하나 빠져나올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인간의 집착은 생각보다 더 집요하고 지독하다. 매일 다른 사람에게서 받았던 상처를 곱씹어 보고, 10년도 넘은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는 내 자신을 보니 남의 얘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애플비 씨의 죽음

체호프의 단편 「아내들」을 떠올리게 한 작품「아내들」의 주인공 라울 시냐보르다가 뻔뻔스럽게 사소한 이유로 아내들을 죽여온 자신의 살인 행각을 이야기하는 반면, 애플비는 이제껏 만난 적이 없던 강적을 만나 고전한다하지만 그 강적도 한 순간의 방심으로 목숨을 잃는다하지만 동시에 애플비를 지옥으로 보내버렸다. 짧은 마지막 부분만으로 효과적으로 반전을 묘사한, 깔끔한 블랙코미디.


체스의 고수

조지 허니커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체스에 집착한 것보다도 아내와 소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애초에 아내가 조지의 취미 생활을 존중해 줬더라면 그는 가상의 체스 상대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조지가 아내를 회피해 가짜 상대를 만드는 대신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했더라면 파국은 없었을 것이고소통과 존중이 없는 결혼생활이 이렇게 무섭다조지가 화이트에게 완전히 잠식당했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문장은 소름끼친다.


최상의 것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떠올리게 했던 단편. 불행히도 이 단편의 배경인 1940년대 미국과 2020년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다빈부 격차가 또 다른 계급 사회를 만들어냈다따져 보면 상류층들도 그렇게 대단한 인간은 아니고그들 사이의 규칙과 유행도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유치하기까지 하다엘린은 이 사실을 70여 년 전에 이미 간파했었다. 2020년대인 지금도 상류층에 대한 선망열등감증오상승 욕구로 가득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그러니 아서 같은 사람들의 비극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배반자들

주인공이 한 여자의 파란만장한 삶을 추적하다 마침내 그 여자와 마주치지만그 여자가 비참한 최후를 선택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는 점에서 영화 <화차>를 연상시킨다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좀 더 애정과 관심을 기울였다면남편이 에이미를 학대하지 않았다면그리고 에이미 자신도 친구 제니의 말에 귀 기울였다면 비극을 막지 않을 수 있었을까로버트의 말대로 그들 모두가 배반자들이었다아니면 로버트가 조금이라도 용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로버트도 배반자들까지는 아니어도 방관자였다로버트가 마지막에 의자를 부순 것은 그런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우스 파티

이 모든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오고 있다는 반전은 밝혀지지만왜 모든 일이 반복되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이 모든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마일스는 더더욱 진저리를 치고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새 연인과 도망치는 대신아내와 자신의 배역에 충실하기로 선택한다면 반복의 수렁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그가 매번 도망치기로 선택했기에 아내에게 총을 맞고 다시 정신을 차리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브로커 특급

영화나 드라마에서 악당들은 항상 자기 사정 다 말하다가 망한다이 단편의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다아내는 어차피 다 눈치 채고 끝까지 주인공까지 지옥으로 끌고 갔겠지만그나저나 아내는 어차피 돈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남편과 결혼한 거면서 남편한테 왜 그리 당당한 건지 모르겠다.


결단의 순간

정말 사소한 자존심 싸움이 사람을 잡을 때가 있다이 단편에서는 그런 사소한 자존심 싸움과 그에 따른 미묘한 심리를 날카롭게 포착한다이 자존심 싸움의 끝이 어떻게 될지 작가는 열린 결말로 남겨뒀지만나는 휴가 레이먼드가 갇힌 방문을 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오지 않는다는 자신의 의견이 이미 깨졌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를 얽매고 있던 감정이 생각보다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 한 번은 꼭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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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개츠비 웬일이니! 피츠제럴드 X시리즈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맥스웰 퍼킨스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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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H군 


코로나 때문에 요새 도서관엔 못 가고 있어. 대신 사 놓기만 하고 읽지 않았던 책이 여덟 권이나 돼서, 두 달 정도는 이걸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얼마 전 피츠제럴드의 여정을 따라가는 책을 읽고 났더니 피츠제럴드와 담당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가 나눈 편지를 모은 서간집도 읽고 싶어졌어. 작가와 편집자가 나눈 이야기니 이제 막 편집자가 된 나로서 더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사 놓은 지 몇 달 만에 이 책을 읽게 됐지. 


그런데 의외의 진입 장벽이 나를 가로막았어. 바로 돈 이야기. 피츠제럴드는 한때 작가로서의 명성과 부를 누렸지만, 사치스러운 생활과 아내의 병 때문에 자신이 번 돈을 탕진하고 평생 빚에 허덕여야 했어. "편집자님, 돈 좀 빌려 주세요.", "편집자님, 돈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책 전체에 걸쳐서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피츠제럴드가 아무리 재치 있는 문장으로 이야기해도 돈 빌려달라는 얘기는 유쾌하지 않아. 텍스트로만 보는 나도 짜증이 나는데 퍼킨스는 한 번도 짜증내거나 꾸짖지 않고 돈을 빌려주더라. 그걸 보면서 편집자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인내심이 아닐까 싶었어.  


그래서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었는데, 결국에는 나도 퍼킨스처럼 피츠제럴드의 돈타령에 익숙해지더라. 내가 지금 출판사에서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고민을 이 사람들도 하고 있으니 공감도 됐고. 표지는 어떤 색으로 하고 어떤 그림, 어떤 홍보 문구를 넣을 것인지. 어떤 단편을 싣고 어떤 단편을 싣지 않을 것인지. 어떤 장면을 살리고 어떤 장면을 버려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지. 책의 제목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 피츠제럴드는 이 표지 그림은 등장인물을 정말 정확히 표현했다, 이 홍보 문구는 너무 식상해 보인다, 이 제목보다는 저 제목이 좋겠다, 이 장면은 작품의 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에 절대 삭제할 수 없다는 식으로 자기 작품에 대해 퍼킨스와 함께 고민해 왔어. 서로 의견이 충돌할 때도 있지만 둘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 피츠제럴드는 퍼킨스의 글 보는 눈과 작품에 대한 통찰력을 신뢰하고, 퍼킨스는 작가의 소신을 자신이 꺾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노력해. 편집자로서 이렇게 함께 좋은 책을 만들어갈 수 있는 작가를 만나고 싶어. 


그런데 이들이 이야기하는 작품 중 내가 읽어 본 거라곤 '위대한 개츠비'와 '벤자민 버튼'밖에 없으니,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 아무래도 내가 읽어 봤기에 잘 알고 있는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부분에서 집중도가 높았지. 이들이 '위대한 개츠비'를 놓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있었고.(특히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을 둘러싼 둘의 의견 차이가 흥미로웠어. 피츠제럴드가 제안한 제목('트리말키오', '웨스트에그로 가는 길', '높이 뛰어오르는 연인' 등등)들은 정말 무슨 책인지 감도 안 오고 어려운데, 퍼킨스가 제안한 '위대한 개츠비'는 지금까지도 '개츠비가 정말 위대한가, 정말 위대한 거면 왜 위대한 건가'를 놓고 독자들이 끊임없이 토론하게 만들었거든.) 내가 영문학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피츠제럴드와 퍼킨스가 이야기했던 피츠제럴드와 당시의 다른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특히 피츠제럴드의 단편들. 피츠제럴드는 단편보다 장편이 가치 있다고 느끼고 단편을 생계 수단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장편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을 것 같아. 그리고 헤밍웨이의 에세이집 '호주머니 속의 축제'도 읽어볼 생각이야. 인터넷 서점에서 미리보기로 몇 페이지 읽었다 반해서 사 뒀거든.)


작품을 읽지 않았어도, 둘의 편지에서 서로와 동료 작가들에 대한 감정이 엿보여서 흥미로웠어. 출판사에 불만이 있을 때 퍼킨스에게 툴툴거리긴 했어도 피츠제럴드는 자신과 헤밍웨이, 토머스 울프를 퍼킨스의 '아들들'이라고 할 정도로 퍼킨스를 믿고 따랐어. 다혈질이고 욱하는 성격의 헤밍웨이와 자기중심적이고 제멋대로인 토머스 울프에 대한 마음의 앙금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래도 둘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하고 아끼는 피츠제럴드의 마음이 느껴지더라. 퍼킨스는 그들 중간에 서서 그들 모두를 존중하면서 그들에게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내가 볼 수 있는 건 편지 속 그들 인생의 단편들이지만, 그 단편들을 가지고 그들의 삶과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게 흥미로웠어.


나는 앞으로 어떤 작가들을 만나고 어떤 글들을 만나게 될까? 이렇게 좋은 작가들을 만나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가기는 쉽지 않겠지. 그들이 살고 있던 당시의 미국 출판계와 내가 몸 담고 있는 한국 출판계는 정말 많이 다를 거고. 환상을 가지지는 않으려고 해. 그래도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치열하게 함께 고민해 온 사람들이 있었고, 나도 함께 좋은 책을 만들어갈 작가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소망해. 좋은 편집자가 될게. 너도 좋은 작가가 되어줘.언젠가 좋은 편집자와 좋은 작가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너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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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드라마 방영 기념 한정판)
이도우 지음 / 시공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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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게 된 이유

솔직히 말하면 드라마 때문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런 드라마가 한다는데, 딱 내 취향인 이야기일 것 같았다. 시골 책방에서 시작된 사랑 이야기와 북클럽 사람들 이야기. 책이 많은 곳이라면 어디든 편안함을 느끼는 나는 책방과 북클럽이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게다가 지금은 사라진 내 단골 책방 때문에 책방 이야기는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만난 정말 마음에 드는 책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리뷰를 쓴 소설 중에 정말 마음에 드는 소설은 드물었다. 호평이 자자한 베스트셀러이고 나도 호평한 소설이어도 정말 좋아서 곁에 두고 종종 다시 꺼내 읽어보고 싶은 소설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새벽 세 시까지 한 호흡에 다 읽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종종 다시 꺼내 읽어보고 싶어졌다. 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나 북클럽 사람들의 이야기나 사랑스럽고 따뜻했기 때문이다. 다시 꺼내 읽어볼 때마다 그들이 나를 반겨줄 것 같다. 자리 하나를 내 주고 갓 구운 귤과 사과파이가 담긴 접시를 건네면서 같이 책 이야기를 하자고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책 속의 책 이야기

주인공 은섭은 블로그 일지에서 자신이 받은 독립출판 책들을 소개한다. 꽃마다 꽃말이 있으니 사물에도 꽃말('사물말'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지만)'을 붙여 그 말들을 모은 책 《사물의 꽃말 사전》, 도시마다 안전하게 노숙할 수 있는 장소를 소개하는 《죽지 말고 노숙》, 함께 여행을 준비하던 연인들이 이별을 선택한 후, 같은 여행지로 따로 떠난 기록 《이별하는 연인들의 여행》, 중학생 시절 오페라극장에서 샹들리에를 보고 반했던 저자가 세계의 유명한 샹들리에를 찾아 여행한 이야기 《나의 아름다운 샹들리에》까지. 정말 있는 책일 것 같아서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 본 건 안 비밀. 기성출판에서는 돈 안 된다고 받아들이지 않았을 기발한 기획들이다. 이 가상의 책들을 정말 하나씩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다만, 정말로 있는 책들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적은 건 아쉬웠다. 은섭과 해원이 일상을 공유하면서 사랑을 쌓아가는 이야기, 북현리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 북클럽 사람들이 모여서 책방 굿즈를 만들고 행사를 기획하는 이야기가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해서. 책 이야기보다는 함께 책을 읽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다. 책 이야기가 좀 더 많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눈 내리는 풍경을 함께 읽다

은섭이네 '굿나잇 책방' 사람들은 자신이 읽은 책 속 '눈 내리는 풍경'을 내리는 모습을 그린 구절을 돌아가면서 읽는다. 내가 함께 읽고 싶은 눈 내리는 풍경은 이거다.


"섣달 눈이 처음 내리니 사랑스러워 손에 쥐고 싶습니다. 밝은 창가 고요한 책상에 앉아 향을 피우고 책을 보십니까? 딸아이 노는 양을 보십니까? 창가 소나무가지에 채 녹지 않은 눈이 쌓였는데, 그대를 생각하다 그저 좋아서 웃습니다." 


김홍도(단원 김홍도 맞다.)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담담하지만 상대방을 깊이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배어나오는 편지. 내가 쓴 소설에서 나는 이 편지 구절을 약간 변형시켜서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로 넣었었다. 


#모든 고통이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굿나잇

"인생의 고통이 책을 읽는다고, 누군가에게 위로받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다 소용없는 건 아닐 거라고.... 고통을 낫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고통은 늘 거기 있고, 다만 거기 있음을 같이 안다고 말해주기 위해 사람들은 책을 읽고 위로를 전하는지도 몰랐다." p. 400-401.


이 책을 읽을 때는 행복했지만, 이 책은 내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한다. 당장 내일 겪어야 하는 싫은 일조차 안 해도 되는 일로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은 굿나잇, 쉽게 잠들지 못하는 굿나잇 클럽 여러분. 그리고 내일 '굿모닝'이라고 인사해요. 


Posted by 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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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 미국 문학의 꺼지지 않는 ‘초록 불빛’ 클래식 클라우드 12
최민석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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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반 고흐 투어'다. 네덜란드의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에서 시작해서 그가 새로운 미술을 접했던 파리, 가장 뜨겁게 창작열을 불태웠던 아를,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그림을 그렸던 생레미를 지나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오베르 마을까지. 그렇게 다른 누군가의 흔적을 따라 여행하고 싶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채워주는 시리즈를 만났다. 문인, 화가, 사상가, 학자 등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기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관심이 가는 인물을 다룬 편들부터 하나씩 읽어나갈 생각이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중 가장 먼저 읽게 된 편은 《피츠제럴드》 편이다.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를 며칠 뒤에 보려고 했는데, 원작은 이미 읽었으니 원작자인 피츠제럴드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피츠제럴드와 그의 담당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은 서간집 《디어 개츠비》 를 사 놓고 읽지 않았는데, 그 책과 함께 읽으면 피츠제럴드를, 《위대한 개츠비》 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을 읽으면서 《위대한 개츠비》 속 개츠비는 피츠제럴드와 참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보다 높이 올라가려고 했지만 결국은 저 아래로 추락해 버렸다는 점에서. 계급이라는 장벽을 넘으려고 몸부림쳤지만 결국은 넘지 못했다는 것. 가난했던 개츠비는 부유한 집안의 딸 데이지에게 다시 닿기 이해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데이지의 남편 톰에게 천박한 졸부 취급을 당한다. 부잣집 자제가 아니고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실연을 당하고, 유명한 작가가 되면서 사랑도 되찾고 부도 얻었지만, 결국 그 부를 탕진하고 잊혀진 작가가 된 피츠제럴드. 그들의 욕망과 좌절은 우리의 것과 다르지 않아서 더 씁쓸하다. 


피츠제럴드의 흔적을 찾아가는 작가마저 이런 계급의 장벽을 느낀다. 피츠제럴드가 다녔던 프린스턴 대학에는 '코티지 클럽'이라는 식사 동아리에서 작가는 오랜 계급의 장벽과 마주친다. 식사 동아리라고 해서 밥 한 끼 같이 먹는 소박한 동아리가 아니다. 식당뿐만 아니라 응접실과 독서실, 당구장까지 갖춘 건물 하나를 따로 가지고 있고, 그곳에 매일 출장 요리사가 와서 성대한 만찬을 차린다. 학생들은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만찬을 즐기면서 친교의 시간을 갖는다. 이들은 졸업 후에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상류 사회의 운명 공동체가 된다. 백인 상류층 자제들이 100여 년 동안 주도해 온 클럽이기에 21세기가 된 지금도 흑인 멤버는 두 명밖에 없으며 동양인 멤버는 한 명도 없다. 피츠제럴드는 이곳에서 보잘것없는 자신의 출신 성분을 자각하며 상처를 받았다. 역시 백인 남성인 클럽 학생회장은 취재하러 클럽에 온 작가를 예의바르게 대하지만, 작가는 그것이 겉치레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여러 번 경험했지만, 백인 남성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묻는 건, '어서 나가라'는 뜻이다.") 피츠제럴드가 즐겨찾았던 호텔 커피숍에서 웨이터들은 백인들에게 잘 웃어주고 메뉴도 친절하게 설명하지만, 동양인인 작가에게는 전혀 웃어주지 않고 메뉴 설명도 하지 않는다. 백인인 피츠제럴드와 달리 작가와 우리는 동양인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차별을 겪겠지만, 피츠제럴드가 살았던 시대나 우리가 사는 지금이나 계급은 존재한다. 지금의 계급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 교묘하고 잔인하게 사람들을 가른다. 


이렇게 씁쓸함을 남기지만 《위대한 개츠비》가 아름다운 문체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통찰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처럼, 피츠제럴드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 자체는 흥미롭다. 피츠제럴드의 인생 이야기와 얽힌 그의 작품 이야기,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만나는 멋진 건축물, 아름다운 풍경들까지. 그래서 이 여행기는 피츠제럴드의 작품처럼 달콤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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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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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세상은 어떤 색으로 채워져 있을까? SF 영화 속 미래의 세상은 은색의 기계들로 가득 차 있다지구 밖으로 나가면 까만색이 온 우주를 채우고 있다하지만 김초엽 작가가『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그리고 있는 미래의 세상은 곱고 영롱한 색들로 물들어 있을 것 같다그 안에도 여전히 괴로움과 슬픔이 있지만그것들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따뜻함도 함께 있다.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왔다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추위라는 고통에서 벗어났다하지만 과학기술이 우리의 모든 괴로움과 슬픔을 없애준 것은 아니다과학기술을 개발하고 이용하는 주체는 인간이고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은 여전히 괴로움과 슬픔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그려진 미래 세계는 놀라울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달한 곳이지만지금의 우리가 겪고 있는 괴로움과 슬픔이 여전히 남아 있다지구가 멸망하고 인류가 멸종될 정도로 암울한 디스토피아도 아니지만모든 것이 완벽한 유토피아도 아니다그저 과학기술이 지금보다 발전했을 뿐 지금의 우리가 겪는 문제와 같은 문제를 여전히 지닌 곳이다『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단편 속 인물들은 자본의 논리 때문에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출산으로 경력이 단절되고 나서 산후우울증에 걸렸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유능한 인재인데도 동양인이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편견과 억측에 시달린다과학기술은 이들의 괴로움과 슬픔을 없애주지 못한다.

작가는 이 괴로움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도 우리가 소통할 수 있음을 믿는다.「스펙트럼」의 주인공 희진은 우주 탐사를 갔다 불시착한 외계 행성에서 외계인들과 마주친다그 중 루이라는 외계인의 돌봄을 받으며 그곳에서 십여 년을 살아가게 된다루이와 희진은 말이 통하지 않지만 서로를 의지하고 마음 깊이 아낀다희진은 지구에 돌아와 루이가 남긴 기록들을 분석하다 자신을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라고 한 부분에서 미소 짓는다「관내분실」에서 주인공 지민은 임신하면서 생전에 소원했던 어머니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다지민이 살고 있는 시대에는 죽은 사람의 뇌 속 데이터를 재구성해서 생전의 그 사람을 재현해내는 마인드가 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다지민은 도서관에서 어머니의 마인드를 찾아보려 하지만어머니의 마인드를 찾을 수 있는 색인이 삭제되어 있다지민은 어머니의 마인드를 다시 찾는 과정에서 아이를 낳고 경력이 단절되고 산후우울증에 시달렸지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알게 된다마침내 어머니의 마인드를 다시 찾은 순간지민은 마인드 속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도용서해 달라는 말도 아닌 이해한다는 말을 한다그러자 마인드 속 어머니는 지민의 손을 잡는다희진과 루이의 소통도지민과 어머니의 소통도 언어와 죽음이라는 장벽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한다하지만 우리가 이 넓고 외로운 세상에서 혼자로 남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는 것은 사랑이다소통과 사랑은 괴로움과 슬픔 자체를 없애주지 못하지만우리가 괴로움과 슬픔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따뜻함을 준다「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아무런 괴로움도 없는 행성에서 지구로 순례 온 아이들 중 지구인과 사랑에 빠진 아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많은 괴로움을 겪을 것을 알지만그것을 이겨낼 만큼 사랑이 주는 행복이 클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김초엽 작가는 미래의 세상이 유토피아일 거라고 낙관하지도디스토피아일 거라고 비관하지도 않는다하지만 김초엽 작가가 상상하는 미래의 세상은 차가운 금속의 은색도 아닌광막한 우주의 검은색도 아닌곱고 영롱한 색으로 물들어 있을 것 같다서로 소통하고 사랑하려 하는소통과 사랑과 행복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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