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포함
1990년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이 한창이고 정부군도 반군도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있으며, 부패한 독재 정권은 납치와 고문을 자행하고 있다. 그렇게 피비린내 나는 시대에 30대 중반의 사진작가인 주인공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자신이 왜 죽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승과 저승 사이의 세계인 중간계에서, 그는 달이 일곱 번 뜨고 지기 전까지 망각의 빛으로 들어가 환생하지 않으면 영원히 구천을 떠돌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그가 찍은 사진이 세상에 남아 있고, 그 사진 때문에 그가 소중히 여기던 사람들이 위기에 처한다. 자신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고 그들을 지킬지, 모든 것을 잊고 환생할지 주인공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 책을 한 문단으로 소개하자면 이렇다. 독재 정권 시기를 거쳐왔고, <신과 함께> 같은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는 판타지에 익숙한 한국 독자로서는 이런 시놉시스에 끌리게 될 것이다. 나 또한 그랬고. 하지만 이 책의 초반부를 넘어가기는 쉽지 않다. 한국 독자에게는 낯선 스리랑카의 현대사와 그를 둘러싼 스리랑카 국내외의 갈등 구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이승에서는 인간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굴러다니고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고깃덩어리가 된 인간들의 혼령이 죽었을 때의 끔찍한 모습 그대로 배회하고 있다. 주인공은 정의감과 사명감에 불타는 인간이 결코 아니며, 마약, 섹스, 도박에 중독되어 있었고 사랑에 있어서도 지고지순하지 않다. 연인이 있는데도 가는 곳마다 마음에 드는 남자들과 관계를 갖고, 마음은 주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식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짝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선을 긋지 않고 방치한 채 애매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런 상황, 이런 주인공에게서 감동을 이끌어 내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가는 그 일을 해낸다. 주인공은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우유부단한 인간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진실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는 최소한의 양심,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사랑, 자신이 지키려던 진실이 다시 가려지더라도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는 인류애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산 사람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한계를 뚫고 닿으려 했던 곳에 닿아 현실을 움직였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극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그가 죽어서도 지키고 결국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사진, 정부가 민간인 학살을 조장했다는 증거가 된 사진은 생각보다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스리랑카의 내전은 그 뒤로도 2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원한에 찬 유령들이 산 사람을 조종해 일으킨 테러는 막지 못했고, 무고한 사람들까지 죽었다. 그런데도 가장 큰 원흉은 죽이지 못했다. 그의 몸부림은 현실이라는 견고한 벽에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균열을 남겼을 뿐이다.
하지만 미세하다고 해도 그가 죽어서도, 자신의 운명을 걸고 한 일은 현실을 변화시켰다. 누군가는 그의 사진을 보고 진실을 깨달았고 그가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대피한 사람들은 목숨을 건졌으며, 그가 자신의 운명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킨 사람들은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연인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웃으면서 들을 수 있었고,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현실은 아직도 잔혹하고 황폐하며 그가 다시 태어난 곳도 이곳 못지않게 잔혹한 세상일지 모르지만, 그가 선택한 대로 그는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곳으로 갔을 테니. 짧고 불행하고 세상의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 것 같아 보이는 생이더라도 분명 의미가 있었다는 깨달음을 안은 채.
이 소설처럼 독재 정권의 잔혹한 폭력을 그린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역사 연구자는 이런 질문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