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고생합니다
임수희 지음 / 수이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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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서가 아니고 사서가 될 계획도 없는 나는 왜 이 책을 읽었을까. 어린 시절 일주일에 한 번 이동 도서관이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대학교 시절에는 학교 도서관 3층 인문학 코너를 주요 서식지로 삼았으며, 지금도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것이 인생의 낙인 열성 도서관 이용자여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 책을 입수하고 보관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은 나와 입장이 어떻게 다를까 궁금해져서? 사실 좋아하는 사람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사서다.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떻게 일하는지, 일하면서 어떤 것에 보람을 느끼는지, 어떤 것이 힘든지 알고 싶었다. 


  도서관마다 책을 입수하는 기준, 책을 버리는 기준, 이용자를 응대하는 매뉴얼은 각각 다를 것이다. 근무하는 곳이 공공도서관이냐 사설도서관이냐, 자신이 정사서냐 계약직 사서냐에 따라서도 할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사서로서 공통된 업무들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보람과 애로사항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사람이 일할 때 이런 보람을 느끼겠구나, 이런 게 힘들겠구나 조금이라도 더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힘든 점을 이해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힘든 점을 가볍게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당사자 앞에서 쉽게 내뱉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 사람 앞에서, 그 사람과 같은 직업을 가진 사서 분들 앞에서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을 더 이해하고 싶다는 처음의 목적을 넘어서, 읽으면서 사서 분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됐다. 편집자인 나도 사서 분들도 책을 독자들과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서 한 사서 분이 "내가 건넨 책이 그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는데, 나는 "내가 만든 책이 그 책을 읽는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 가능성이 너무 희미하게 느껴질 때 힘들다는 것조차 공감했다. 사서 분들이 도서관에 어떤 책을 입수할지 치열하게 수서 회의를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그 수서 회의에서 내 책이 선택되도록 더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수서 회의를 지켜보면서 사서 분들이 파악하는 도서관 이용자들의 독서 경향은 어떤지 듣고 싶었다. 그 회의에서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 입장은 이렇다고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도서관에 십진분류법이 아닌 특정한 주제로 책들을 배치하는 '컬렉션'이 있다는 것이 특히 흥미로웠다. 이런 컬렉션은 한 사서의 고민이나 '이건 꼭 만들어야 해'라는 여러 사서들의 공감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사서들은 자신의 컬렉션 주제가 너무 좁거나 넓은 건 아닌지, 시의성이 떨어지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조사하면서 컬렉션의 주제를 다듬어간다고 한다. 편집자가 책을 기획할 때 어떤 책을 만들지 생각을 다듬어가는 과정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컬렉션들이 편집자가 책을 기획할 때 방향을 제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책을 만드는 사람이자 열성 독자, 도서관 이용자로서 도서관 컬렉션으로 이런 주제는 어떻냐고 의견을 내놓고도 싶었다. 


  이렇게 주제 자체로도 공감할 여지가 차고 넘치는데, 재기발랄한 문체여서 더 즐겁게 읽었다. 같은 것을 이야기해도 재미있게 말하는 사람이 있고 재미없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책의 작가는 전자다. 상황에 따라 뜻하지 않게 쏟아지는 업무와 공공 장소이다 보니 수없이 만나는 각종 민폐들마저 유쾌하게 이야기한다. 겪을 때마다 여전히 힘들긴 하지만 그런 힘든 일을 좀 더 쉽게 넘길 수 있게 된 내공이 느껴진다. 작가가 그런 힘든 일들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소소한 행복들을 이야기할 때 미소가 지어졌다. 


  작가가 동료 사서들 네 명과 나눈 인터뷰가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이 인터뷰가 사서라는 직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보다도 어린 사람들이 자기 직업에 대해 이렇게 깊이 생각하고 뚜렷한 직업관을 가진 것에 부끄러워졌다. 지금은 사서 일을 그만두었다는 작가나 인터뷰에 응한 이들 동료 사서 분들이나 '그림책에 나오는 할머니 안경을 쓰고 숄을 걸친 머리 하얀' 노인이 될 때까지 사서로 일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편집자로서나 이용자로서나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에세이와 직업 탐구의 중간에 있는 책이다 보니, 더 깊이 들어갔으면 하는 이야기도 스케치 정도로 가볍게 다룬다. 인터뷰가 직업 탐구로서의 깊이를 더해주긴 하지만, 워낙 작은 책인데다 페이지도 많지 않아 아쉽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은데. 책에서나 도서관에서나 사서 분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고,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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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의 옥중서신
로자 룩셈부르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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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H

 

잘 지내고 있어올해도 벌써 3분의 2는 지나갔네올해는 코로나뿐만 아니라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참 힘들었어그래도 나쁜 일은 다 지나갔고 조용히 내 시간을 보내고 있어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예전보다 책을 더 많이 읽게 돼요즘은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들을 묶은 책 로자 룩셈부르크의 옥중서신을 읽었어예전에 레드 로자라는 그래픽노블을 읽으면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는데그 책에서 읽었던 내용들을 떠올리면서 책을 읽었어.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인이지만 28세에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한 이후로독일에서 정치 활동을 해 왔어전쟁(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는 주장이 대세였던 당시 독일에서 로자와 동료 의원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켰고이 일 때문에 로자와 리프크네히트는 수감되었어그 때 로자가 리프크네히트의 아내 소피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게 이 책이야.


사적인 편지이다 보니 로자의 사상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많지 않아. “매일 조금씩 낡은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위대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될 거라고” 이야기하지만로자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더 깊이 알려면 다른 책들을 더 읽어봐야겠지이 책은 로자의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들을 다루고 있어.

 

편지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자연에 대한 사랑이야사방이 막힌 감옥에서 로자가 잠시나마 자유로움과 생기를 느낄 수 있게 한 건 주변의 자연 풍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식물들동물들이었으니까로자는 붓으로 그림을 그려나가듯이 해가 지고 노을이 물드는 하늘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는 모습을 묘사해식물학자처럼 주변의 식물들을 관찰하고밖에 있는 소피에게 식물원에 가서 어떤 식물들이 있었는지 보고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하지감옥 주변을 맴도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어떤 새들이 우는 건지어떤 감정으로 우는 건지도 구별해나는 로자만큼 새와 식물들의 종류를 많이 알지 못하지만코로나 때문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자연이 더욱 싱그럽게 느껴진다는 걸 알게 됐어그러니 로자에게 더 공감할 수 있었지.

 

자연에 대한 로자의 사랑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져로자는 욕실 창가에서 우연히 공작나비 한 마리를 발견하고 보살펴 주었지만나비는 며칠 만에 죽고 말았어로자는 나비의 죽음을 슬퍼했지그리고 수용소에 끌려온 루마니아 들소가 독일 군인에게 피가 날 정도로 심하게 매 맞는 것을 보면서 그 소와 동질감을 느껴자유를 빼앗기고 잔인한 폭력을 당한다는 점에서그리고 책 속에서 미국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에게 억압당하고 말살당하는 이야기를 읽고 분노하지로자는 그저 이념과 투쟁에만 몰두해 있는 게 아니라세상의 약하고 억압당하고 고통 받는 존재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했어.

 

로자는 평생 약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기 위해 싸워 왔어그러면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탄압당할 수밖에 없었고평생 동안 수차례 감옥에 갇혔지이런 삶이 고통스럽지 않았을 리 없지만그래도 로자는 삶을 사랑했어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고자신이 작은 고통에도 흔들린다는 걸 인정했지만그런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려고 했어그러면서 소피나 카를 같은 친구동지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들을 추억하며 그런 시간을 다시 누릴 수 있을 거라고 말해. 1918년 봄에 로자는 소피에게 내년 봄은 함께 보낼 수 있을 거라고 편지를 보냈는데로자가 이듬해 봄이 되기도 전에 살해당했다는 걸 생각하면 슬퍼져삶은 로자의 기대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로자는 삶을 사랑했고그 덕분에 보람 있고 행복하게 살아갔다고 생각해.

 

번역이 딱딱해서 로자의 편지가 부드럽게 읽히지 않은 게 아쉬워합쇼체를 덜 쓰고 해요체를 더 많이 썼다면문장에서 주어를 적당히 삭제했다면 문장이 좀 더 자연스러워졌을 텐데(우리말 문장에서 주어를 일일이 넣으면 오히려 어색해지고 번역체처럼 느껴지지). 하지만 로자의 맑고 부드러운 감성은 딱딱한 번역문에서도 느껴져로자가 언급하는 작가학자정치인문학 작품을 미주와 각주로 꼼꼼히 설명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고(그런데 어떤 걸 미주로 처리하고 어떤 걸 각주로 처리하는지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것 같아서 좀 아쉬워). 로자는 소피 말고도 남편연인동지 등 다양한 사람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데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들도 번역되면 좋겠어그만큼 로자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우리도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삶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더 약한 존재들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편지 속 로자의 표현을 빌려서 인사할게네가 더 많은 온기와 햇살을 가질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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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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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겁이 많아 독립운동은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조용히 내 할 일을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총독부에서 나에게 매 끼니마다 총독의 음식을 시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 않겠다고 하면 나뿐만 아니라 내 가족들까지 다 죽는다. 나는 총독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강제로 히틀러가 먹는 음식을 시식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 마르고트 뵐크라는 독일인 여성으로, 남편이 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고 나서 독일 동부에 있는 시댁에서 지내고 있었다. 시댁 근처에는 히틀러의 동부 전선(독일이 동유럽 지역에서 연합군과 싸운 전역) 지휘 본부가 있었다. 1943년 나치 친위대는 마르고트를 비롯한 10여 명의 젊은 여성들을 히틀러의 시식가로 뽑아, 히틀러가 지휘 본부에 머무르는 동안 매 끼니마다 독이 있는지 없는지 먼저 맛보게 했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이다. 


  실제 이야기를 먼저 찾아보면 소설의 주요 내용을 다 알게 될 정도로 이 책은 실화에 충실하다. 이탈리아인 작가가 독일인 화자를 내세워 독일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지만, 화자가 살았던 베를린과 독일 동부 지역의 자연, 풍습, 생활상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독일인 독자가 보기에는 고증이 맞지 않다 싶은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독일인 독자가 아닌 나로서는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다. 작가가 1978년생이니 전후 세대인데도 전쟁으로 인해 남루해지고 피폐해진 일상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덕분에 2차 세계대전 말이라는 불안한 시기의 독일에 와 있는 듯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실제 인물인 마르고트 뵐크를 직접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겪었을 복잡한 심리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매 끼니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겪지만, 몇 년째 버터와 설탕을 구경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좋은 재료를 쓰고 솜씨 좋은 요리사가 만든 음식은 군침이 돌게 만든다. 친위대에서는 독살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끼니마다 여러 가지 메뉴를 짜고 시식가들에게 두 명씩 짝을 지어서 한 메뉴씩 먹게 하니, 자신과 같은 메뉴를 먹는 동료에게 운명을 함께한다는 동지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 히틀러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한 역할을 하면서 나치 장교와 사랑에 빠지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느끼지만, 그러면서도 그 장교와의 관계는 끊지 못하고 그 관계 덕분에 얻는 이익은 다 누리고 있다. 마르고트 뵐크를 모델로 한 주인공 로자는 이렇게 피해자이면서 부역자라는 모순을 안고 있는 복합적인 캐릭터이다. 


  로자의 죄의식은 상상 속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뚜렷이 나타난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나치를 반대했던 아버지는, 상상 속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는 로자를 호되게 꾸짖는다. 


“정치와는 상관없어요. 저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 게다가 1933년에는 저는 고작 열여섯 살이었어요. 히틀러를 뽑은 건 제가 아니라고요.” 그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일단 용인하면 그 정권에 대한 책임은 네게도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가 속한 국가 체제 덕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은둔자조차 말이다. 알아들었니? 네게는 정치적 죄악에 대해 면죄부가 없다, 로자.”


  로자가 매일 죽음의 위험을 직면하면서 산다고 해도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학살당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녀는 나치에 부역해서 매일 호의호식하고 있는 부역자다. 게다가 자신의 남편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할지라도 나치 장교에게 처자식이 있는 걸 알면서도 그와 관계를 이어간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게다가 그 덕분에 유용한 정보를 얻었으면서도, 그와의 관계가 탄로 날까 봐 친정 부모처럼 자신을 돌봐줬던 시부모에게도 자매처럼 지내 왔던 동료들에게도 그 정보를 알리지 않고 혼자 살아남았다. 이러한 로자의 잘못들은 작품 속에서 정당화되지 않는다. 작가는 상상 속 아버지의 말, 즉 로자 자신의 죄의식을 통해 로자, 즉 평범한 사람들이 악을 뒷받침했던 것에 면죄부가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하지만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악에 동참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더 큰 악을 잊지 않는다. 히틀러와 나치가 아니었다면 로자를 비롯한 동료들은 히틀러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자는 남편과 헤어지지 않고 그렇게 바라던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갔을 것이고, 다른 동료들도 자신이 바라는 대로 살아갔을 것이다. 이들이 실험용 모르모트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들이 어느 날 식사를 하고 모두 쓰러지는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나치 친위대는 시식가들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서 이들에게서 어떤 증상이 나타났는지 지켜보기만 한다. 다행히 상한 음식 때문에 일어난 식중독이어서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실제로 독이 들어 있었던 거라면 주인공을 비롯한 시식가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악에 동참하면서 죽음의 위험을 직면할지, 악을 거부하고 그 대가로 죽임 당할지 선택하게 하고, 악에 동참해서 죽게 되더라도 내버려두는 거대한 악.

 

  작가는 이 거대한 악의 손아귀 안에서도 서로 연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지만, 그 연대와 사랑이 모두를 구원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로자는 동료들과의 연대와 우정 덕분에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로자를 제외한 모든 동료들은 목숨을 잃는다. 독일이 패전하고 소련군이 오고 있다는 소설 속 서술이나 실화에서 동료들이 맞은 운명을 생각해 보면, 동료들은 나치 부역자라는 이유로 소련군에게 처형당했을 것이다. 로자를 나치 친위대에게서 숨겨주지는 못했지만 따뜻한 가족이 되어주었던 시부모님도 전쟁 중에 돌아가셨을 것이고, 귀족이면서도 허물없이 로자를 친구로 대했던 마리아 남작부인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로자 본인은 살아남았고 남편을 다시 만났지만, 시식가로 살아가면서 남은 상처와 죄의식 때문에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헤어진다. 이들의 삶이 망가진 것은 전쟁과 그 전쟁을 일으킨 인간들 때문이었다. 이 모든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이런 거대한 악이 생기지 못하도록 평범한 사람들이 깨어 있어 힘을 모으는 것이 우선일까, 평범한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강요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우선일까.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으면 악은 평범한 사람들이 뒷받침해 지속되고 더 강해지면서 계속 악을 강요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악을 행하도록 강요당하다가 악에 무감각해져 악을 지속시킨다.『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이런 악순환이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뒤흔들고 망가뜨리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사랑과 연대로도 이렇게 망가진 삶을 완전히 회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 악순환을 막는 것 자체가 최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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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지음, 김도연.이선화 옮김 / 달콤한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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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서울과 인천에서 보냈고, 평생 동안 표준 한국어로 말하고 쓰면서 살아왔다. 두 개의 언어를 병행해서 써야 했을 때는 해외여행을 갔을 때뿐이었고, 그 여행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은 일행과 한국어로 이야기하면서 보냈다. 그러니 혼혈이라든가, 이민을 갔다든가 해서 두 언어, 두 나라, 두 문화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사람들의 마음은 책이나 방송을 통해 간접 경험할 수밖에 없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두 개의 언어와 문화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은 이란계 작가가 이란과 프랑스, 페르시아어와 프랑스어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를 버리지만, 성장해서는 자신의 뿌리인 페르시아어, 이란과 화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기승전결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기보다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과 상념들을 털어놓고 있기 때문에 소설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인 요소들이 섞인 에세이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찾아간다는 큰 이야기 줄기 아래 있지만, 이란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프랑스에서 보낸 소녀 시절, 성인이 되어 이란에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가 시간의 순서와는 상관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더욱 혼란스럽다. 게다가 시와 산문, 현실과 환상, 비유와 상징이 뒤섞여 있어,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모국어 찾기 이야기를 기대했던 사람들로서는 당황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머릿속을 들여다 본다고 생각하고 그 안의 상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작가의 부모님이 어린 딸(작가)을 데리고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치적 억압이었다. 1979년 부패한 팔레비 왕조를 몰아낸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은 서슬 퍼런 독재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임신한 몸으로 대학교 학우들과 시위를 하다 학생들이 경찰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되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도 경찰에게 쫓기다 3층에서 뛰어내려 유산할 뻔했다. 작가의 생일날마다 꽃을 선물하던 다정한 외삼촌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전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8년 동안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야 했다. 이런 정치적 억압은 우리에게도 낯선 것이 아니다. 


 고국을 떠나 망명한 프랑스도 작가 가족에게 마냥 따뜻한 곳은 아니었다. 같이 놀아주지 않는 학교 아이들에게 말도 못 붙이고 외로워하던 작가는 프랑스에 적응하기 위해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를 버린다. 부모님이 집에서는 페르시아어를 쓰라고 해서 여전히 페르시아어로 말할 수는 있지만, 페르시아어보다는 프랑스어로 읽고 쓰는 것이 더 편해져 버렸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프랑스어를 사용하면서,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크루아상이 고향 음식으로 느껴질 정도로 프랑스가 또 하나의 고국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민자라는 이유로 작가가 '진짜'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한다. 두 개의 언어와 문화를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이야기는, 평생 두 언어, 두 문화 사이에서 헤매면서 살아온 작가에게 속 편한 소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다시 이란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21세기가 되어서도 종교 경찰들이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게 옷을 입었는지, 정숙하지 못하게 외간 남자와 함께 있는지 감시하고 있는 곳이니까. 누구보다 손녀가 보고 싶었을 외할머니조차, 작가가 이란에 남겠다고 하자 만류할 정도다. 수십 년을 살았어도 온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프랑스와, 민소매 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탈 자유도 없는 이란. 어느 곳도 작가를 온전히 받아주지도, 이해해 주지도 않는다. 책에 실린 온갖 기억과 상념의 파편들은 두 개의 정체성 사이에서 분열돼서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작가의 혼란스러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작가는 두 언어, 두 나라, 두 문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익힌다. 다시 페르시아어를 익히면서 페르시아어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고, 이란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이란과 프랑스 두 곳에서의 삶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 연습하게 된다. 이란도 프랑스도 아닌 곳들에서 몇 년 동안 살아가는 것에도 익숙해진다. 테헤란의 교통 체증 속에서도 택시기사가 읊어주는 하페즈(14세기 이란의 시인으로, 페르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다.)의 시에서 행복을 느낀다. 마침내 묵묵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국어와 화해한 것이다. 


 그냥 모국과 지금 살고 있는 나라 모두의 언어와 문화를 누리며 살아가며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고국을 떠나 낯선 나라와 언어, 문화에 던져졌던 작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 어디서든 살 수 있는 지금에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두 개의 언어, 문화 사이에서 나름대로 균형을 잡았다 해도 다시 흔들리고 헤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묵묵히 그녀를 기다려준 모국어와 그녀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 많은 어려움과 시간을 겪으면서 단단해진 그녀 자신이 있기에 다시 굳건히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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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지 없는 여행 - 환타 전명윤 여행 에세이
전명윤 지음 / 사계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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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동안 수도권을 벗어나지도 못하다 작년에야 수도권을 벗어나 남쪽 지방으로 국내 여행을 갔는데, 올해 코로나가 터졌다. 그저 여행 에세이나 TV 여행 프로그램으로 간접 여행을 할 수밖에 없다. 예쁜 사진들로 글의 부실함을 가리는 여행 에세이, 그냥 떠나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여행 에세이는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런 여행 에세이들은 서점에 차고 넘치니까. 여행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여행 에세이를 읽고 싶었다.

『환타지 없는 여행』은 말 그대로 여행에 씌워진 환타지들을 걷어내는 여행 에세이다. 왜 '판타지'가 아니라 '환타지'냐 하면, 작가의 인터넷 닉네임 '환타'를 연상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여행에 대한 '상을 파'한다는 뜻의 닉네임처럼, 여행 가이드북 작가인 그는 사람들이 여행에 대해 품는 온갖 낭만적인 환상들을 걷어낸다. 그도 젊은 시절에는 다 버리고 무작정 떠나라고 사람들에게 추천했었지만, '떠나면 행복해진다'는 환상이 허상임을 깨달은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돌아와야 할 이유를 찾고, 돌아올 날짜를 정해야 여행입니다. 돌아올 길을 불태우고 떠나면 그때부터 국제 거지가 되는 거예요."(p. 20.)

작가의 친구들은 늘 여행을 하고 있는 작가를 부러워하지만, 그들에게는 작가에게 없는 안정적인 직장과 편안한 집, 큰 차가 있다. 여행이 끝나면 돌아올 일상이 있어야 여행은 현실이 된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무작정 떠나라는 말만 하지 않고, 삶을 지탱해 주는 일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그에게 신뢰가 간다.

"누군가에게 가이드북은 여행지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수평선 너머의 풍경을 꿈꾸게 하는 책일지 모른다. 그러나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고 제대로 안내해야 하는 나에게는 서바이벌 키트 혹은 만능 구급상자다. 그 책임감 때문에 내가 쓴 가이드북은 늘 잔소리로 넘쳐난다. 지도 밖은 위험천만한 곳이다. 현지인에게 당신이 특별한 이유는 당신의 지갑이 그곳의 지폐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환상이 아닌 현실을 거듭 이야기하는 이유다."

(p. 72~73.)

그가 가이드북을 쓰는 이유는 여행에 대한 환상을 품고 떠난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다. 여행 작가들이 심어준 환상 때문에 제대로 사전 조사도 해 보지 않고 여행을 떠났다 낭패를 본 사람, 낭패 정도로 그치지 않고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 『론리 플래닛』에서는 2019년 스리랑카를 '올해 여행해야 할 국가' 1위로 선정했지만, 그해 4월 스리랑카에서는 연쇄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해 여행을 온 외국인들이 여러 명 사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늘 여행지 추천에 신중을 기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가이드북이 관광 명소, 맛집을 찾기 위해 뒤적이는 정보 모음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잘 만든 여행책은 그 지역의 시대와 현실을 여행이라는 주제로 기록한 지역서이자 민속지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여행 에세이에서도 그는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보지 못한 진실들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인도에서 소를 신성시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인도의 지방 유지들이 목 말라 죽어가는 사람들 대신 신성한 소에게만 물차를 보내 자신의 신앙과 부를 과시한다는 것은 잘 모른다. 주말마다 홍콩 거리를 가득 메운 외국인 가사도우미들을 보지만, 그들이 주5일 노동이라는 근로기준법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주말에는 어쩔 수 없이 주인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에서 나와 거리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보지 못한다.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오키나와 흑당 음료에는 일본 본토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이용당하며 사탕수수 외의 다른 작물은 재배할 수 없었던 과거 오키나와의 아픔이 담겨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내가 우리나라 밖의 이야기에 얼마나 무지하고 관심이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나 자신이 다른 문화권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흥밋거리로만 외국 이야기를 소비할 뿐이었다.

코로나가 지나면 가까운 곳부터 하나씩 환상을 걷어낸 여행을 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곳에서 찍히는 사람 얼굴만 다른 사진을 찍으며, 여행지 하나하나가 해야 할 숙제인 듯이 여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책이나 TV로 보는 것만으로는 겪을 수 없는 것들을 겪으면서 더 넓은 세상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배우고 싶다. 지저분한 것도 고생스러운 것도 못 견디는 나는 실전에서는 결국 편안한 환상으로 돌아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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