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안 나이트 - 러시아 전문가의 시베리아 이야기
박대일 지음 / 미래터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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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스포일러 포함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데카브리스트. 나는 이 둘에 마음에 끌린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모스크바까지 가 보는 것이 내 오랜 꿈이었고, 톨스토이의 소설『전쟁과 평화』덕분에 데카브리스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시베리아 평원을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달린다. 9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달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 가로지르는 것이다. 데카브리스트들은 농노제 폐지와 입헌군주제 실시를 목표로 1825년 혁명을 일으켰다 실패하고 시베리아로 유배 간 혁명가들이다.『전쟁과 평화』의 결말에는 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가 데카브리스트가 될 수 있다는 암시가 숨어 있다. 이 둘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 책에 호기심이 갔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노선도. 이르쿠츠크는 횡단철도의 중간지점이다.

출처: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04443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중간까지만 다루고 있다. 작가가 살고 있는 지역이 이르쿠츠크이고 자주 오가는 지역이 이르쿠츠크부터 그 동쪽에 있는 지역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르쿠츠크 서쪽의 역들이 궁금하다면 다른 책들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 책들에서는 다루지 않는 작은 역들까지 이야기하고 있고, 그 역에 얽힌 이야기들도 흥미롭다. 특히 항일 독립운동과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에 얽힌 이야기가 많아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게 된다. 작가가 횡단열차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 이야기도 다채롭고 생생하다. 


 데카브리스트들의 이야기도 내가 만족할 만큼 잘 정리되어 있었다. 톨스토이는 원래 데카브리스트들에 대한 소설을 쓰려고 했다 그들의 젊은 시절에 해당하는 시대의 이야기『전쟁과 평화』를 쓰게 되었다. 정작 데카브리스트들에 대한 소설은 미완성으로 남겨 두었지만,『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가 데카브리스트가 될 수 있다는 암시도 결말에 남겨 두었다. 톨스토이 작품의 주인공들 중에서도 내가 제일 사랑하는 피에르가 데카브리스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데카브리스트들이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가공인물 때문에 실존인물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다니 뭔가 주객전도된 느낌이지만, 이게 문학의 힘이 아닐까 싶다.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즉위에 반대해서 봉기를 일으켰다 실패한 데카브리스트들은 머나먼 시베리아에서 유배되어 그곳에서 수십 년 동안 유배되어 살아간다. 아직 횡단철도도 깔리기 전인 그 시대에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은 시베리아까지 남편을 찾아갔다. 정부에서는 국가 반역 죄인인 데카브리스트들과 혼인 관계를 파기하지 않는다면 모든 귀족 칭호와 특권을 박탈하고 시베리아에서 낳는 아이는 농노 신분이 될 것이라고 협박했지만, 아내들은 끝까지 남편의 곁을 지켰다. 데카브리스트들과 그들의 아내들, 그들이 시베리아 곳곳에 남긴 흔적들을 보면서 피에르와 그의 아내 나타샤가 어떻게 시베리아에서 지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바이칼 호수의 풍경. 이 책에서는 한 챕터에 걸쳐 바이칼 호수와 그 주변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출처: BK 투어서비스. BK 투어서비스는 작가가 운영하는 시베리아 지역의 여행사이다.


  이 책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데카브리스트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사람들의 생활, 시베리아에서도 가장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바이칼 호수 등 다양한 시베리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작가의 필력이 아주 뛰어나지는 않고, 신선한 시각이나 깊이 있는 통찰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컬러 도판을 담고 있고 특히 바이칼 호수의 풍경을 비롯한 시베리아의 자연 풍경 사진들은 마음을 사로잡지만, 너무 작은 도판들도 많다. 특히 데카브리스트들의 유형지 현황을 담은 지도들은 도판이 너무 작아 정보 전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베리아를 다룬 다른 책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여행하면서, 아니면 집 안에서 광활한 시베리아를 상상하면서 읽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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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그림일기
이새벽 지음 / 책공장더불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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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모바일 버전과 앱 버전에서는 숨은글 기능이 적용되지 않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시는 분들은 스포일러 표시 전 부분까지만 읽으시면 됩니다.


  도서관에 갔을 때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이 생각지 못한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이다. 지난 주에 내가 사는 지역 중앙도서관에 가서 고른 책을 가지고 나오다가 서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고양이를 키우고 나서부터 고양이에 대한 책이라면 너무 사족을 못쓰는 게 아닌가 싶어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책을 펼치고 몇 페이지를 살펴보고 나서 나는 이 책과 사랑에 빠졌다. 주인공이 집 밖에서 외출고양이(집 밖을 자유롭게 외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고양이) 흰둥이를 만나 반가워하고, 정답게 손을 잡고 집까지 같이 왔다가 정작 집에 도착하니 서로 뻘쭘해져서 다시 헤어지는 장면을 본 순간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고른 책들에 이 책 한 권을 더 얹어서 도서관을 나왔다.


『고양이 그림일기』의 표지. 찬장에서 캔을 꺼내고 있는 사람이 작가이고, 찬장 위의 줄무늬 고양이가 장군이, 바닥에서 뭔가를 먹고 있는 얼룩무늬 고양이가 흰둥이이다.


  이 책은 일러스트레이터인 작가가 고양이 장군이와 흰둥이와 함께 보낸 날들을 그림일기로 기록한 것이다. 노란 수컷 고양이 장군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작가의 손에서 자란 집고양이이고, 얼룩무늬 수컷 고양이 흰둥이는 작가의 집 마당에 드나들던 길고양이였다 외출고양이로 작가네 집에 정착했다. 장군이는 뱃속에서부터 까칠한 성격을 타고 났지만 섬세하고, 흰둥이는 무던하고 생존력이 강하다. 작가는 입맛부터 성격, 습성까지 서로 다른 두 고양이와 함께 한 날을 담담하고 소탈하게 그려나간다. 


7월 7일의 일기. 비가 들이친다고 누군가 창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흰둥이는 작가가 그림 그리는 책상 옆 창문까지 올라와서 울었다. 


  고양이들과 함께 한 날들은 소소한 추억들로 채워진다. 어느 날은 투닥거리던 두 고양이가 같이 밤 외출을 하고 똑같이 오른쪽 귀가 까매져서 왔다든지, 올해 들어 처음 익은 멍석딸기를 장군이에게 먹였다든지. 어떤 날은 단 한 줄만, 어떤 날은 여러 문단에 걸쳐 하루를 기록한다. 그림체도 글도 간결하고 담백하다. 분량이나 형식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더 흥미진진하거나 더 화려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다. 그래서 작가가 고양이와 함께한 일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이 그림일기에서는 고양이들뿐 아니라 집 안팎의 식물들 또한 섬세하게 그려진다. 


  작가가 보낸 나날들은 고양이들뿐만 아니라 식물과 함께한 나날들이기도 했다. '고양이와 식물을 기르며 기록하는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소개에 걸맞게 작가는 식물에도 많은 애정을 쏟는다. "4월 6일. 따뜻한 봄, 여러해살이풀이 올라오는 속도는 무척 빨라 아침에 나가면서 봤던 키와 들어오면서 보는 키가 다르다. 그 중 둥글레가 유독 빠르다. 흰둥이는 그것을 앞발로 톡톡 쳐 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 없던 자기 영역의 땅에 갑자기 솟아난 무언가가 신기한가 보다." "7월 3일. 매년 이맘때면 꽃나무를 번식시킨다. 번식시켜 1-2년을 키운 뒤 나눔을 한다. 가지를 잘라 깨끗한 흙에 꽂고, 줄기 아랫부분에 뿌리가 날 때까지 매일매일 물을 주면 기다린다." 작가가 고양이뿐만 아니라 식물의 생태에 관심이 많고 식물에 대한 지식과 애정이 유달리 크다는 것이 보인다. 작가가 고양이들과 식물과 함께한 날들은 고요한 듯하면서도 소소한 변화로 가득차 있다. 그런 소소한 변화를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작가의 따뜻한 시선과 유머감각이 배어 있어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를 짓게 된다.


스포일러

 따뜻하고 소박한 일상만 계속될 줄 알았는데, 슬픈 사건이 생긴다. 장군이가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때 장군이는 여덟 살이었다. '장군이가 사고당하기 전날 밤'이라는 말만으로도 불안했는데, 그 다음날 일기에 장군이의 죽음이 적힌 것을 보고 먹먹해졌다. 그림과 함께 실린 다른 날의 일기와 달리 장군이가 죽은 날은 아무 그림 없이 글로만 장군이의 죽음을 전한다. 장군이의 죽음을 담담히 털어놓고 있지만 그 때 작가가 겪었을 슬픔은 헤아릴 수 없다. 

  그 이후는 남겨진 작가와 흰둥이 둘의 이야기다. 장군이가 떠난 뒤로도 씨앗에서는 새싹이 돋아난다. 장군이 귀신이 흰둥이에게 "쟤(작가)는 원래 아무 일 없어도 징징거리는 놈이었어"라고 투덜거리는 장면이 잠시나마 위안이 됐지만, "8년이 정말 순식간이었어."라면서 장군이의 무덤을 목도리로 덮어주는 작가의 모습에 다시 먹먹해진다. 

 

 

펼친 부분 접기 ▲


  책의 만듦새도 깔끔하다. 사람들은 하얗고 매끄러운 종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재생용지로 만든 책은 잘 읽지 않는다. 이 책은 재생용지로 만들었는데도 산뜻한 느낌이다. 하얗고 매끄러운 새 종이보다 가볍고 오래된 느낌이 일기장이라는 컨셉트에도 잘 어울린다. 1년에 한두 번씩 이 책의 수입금에 따라 사료를 적립해 유기동물 보호소에 보낸다는 취지도 좋다. 곁에 오래 두고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진다. 책 마지막에 다음 책을 예고했는데, 다음 책이 나온다면 역시 곁에 두고 싶다. 


* 작가의 블로그. 이곳에서 작가의 근황과 이후에 쓴 그림일기들을 볼 수 있다. 

https://blog.naver.com/ohmygene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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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지만지 희곡선집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안영옥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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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B의 방. 책이 가득 꽂힌 책장. 책상 위 책더미와 필기도구, 온갖 잡동사니 가운데 노트북이 놓여 있다. B가 노트북 앞에 앉아

망연자실한 채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A가 노크한 뒤 방문으로 들어온다. A가 B 쪽으로 다가와 노트북 화면의 예매창을 본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예매창이다.)


A: 이번엔 성공했어?

B: 아니, 어느 자리로 잡을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다 나갔더라. 

A: 일단 한 자리 잡고 봤어야지. 고민할 시간이 어디 있어.

B: 그러니까. 간신히 예매대기 하나 잡아놨는데 터질진 모르겠다. 

A: (책상 위의 책을 보고) 이거 보려고 원작까지 읽었어? 

B: 응, 몇 년 전에 이미 번역됐더라. 

A: (책을 펼치고 훑어보며) 되게 얇네. 앞의 해설 빼면 한 100페이지는 되려나. 금방 읽고 책상 위에 올려놓을게.

B: 그래. 


(A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다.)


A: (책을 덮고 침대에 앉아 B에게) 이거 내가 생각했던 거랑은 좀 다르다.

B: 어떤 게?

A: 여자들만 나오고 여자들이 이끌어나가는 극이라고 들어서 난 굉장히 페미니즘적인 작품일 줄 알았거든. 그런데 실상은 여자들이 남자 하나한테 목매는 이야기잖아.

B: 그렇긴 하지. 

A: 작가가 남자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건가? 여자한테 인생의 탈출구가 남자밖에 없다고 생각하나. 어차피 베르나르다의 딸들 중 한 명이 페페랑 잘됐다고 해도 또 다른 감옥 안에 들어가는 거잖아. 애 낳고 키우고 집안일 하고 남편 시중이나 들게 되겠지.

B: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 봐. 20세기 초 유럽에서도 여자들한테 선택지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 거야. 베르나르다 알바네 가족들이 사는 시골이라면 더 보수적이었을 거고.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와 만나는 것만으로도 권위에 저항한 거지. 아델라가 베르나르다의 지팡이를 빼앗아 두 동강 내는 거 봐. 베르나르다의 권위에 정면으로 맞선 거야.

A: 그러면서 "저한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페페뿐이에요!"라고 말하잖아. "누구도 저한테 명령할 수 없어요!"가 아니라.

B: 남편은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너무 뿌리 깊었으니까. 누구도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와 시대의 인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어. 

A: 시대상을 감안한다 해도 자기랑 사귀고 있다가 돈 많은 언니한테 청혼하는 남자한테 왜 이렇게 집착해? 페페가 아델라를 정말 사랑했다면 돈 때문에 다른 여자랑 결혼하려고 했겠어?

B: 스무 살이면 사랑에 눈이 멀어서 앞뒤 안 가릴 나이야. 게다가 그 시대의 스무 살이면 사랑하는 사람을 죽는 날까지 사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을 거고. 그리고 페페는 아델라에게 사랑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문 밖의 세상, 자유 그 자체였을 거야.

A: 나라면 페페 따윈 차 버리고 새로운 사랑을 찾았을 거야. 아니, 굳이 누군갈 사랑해야 할 필요도 없지.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데. 그게 진짜 자유지. 

B: 아델라한테는 자기 마음과 욕망을 따라가는 게 진정한 자유였어. 

A: 아델라뿐만 아니라 네 명의 언니들도, 심지어 늙은 마리아 호세파까지도 결혼이 집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기잖아. 어쩜 다들 그렇게 남자랑 결혼에 집착하는 건지. 

B: 좋아하는 남자가 생겨도 베르나르다가 우리 집안의 격에 안 맞다고 사이를 갈라놨었잖아. 남편이 죽었을 때 3년상도 아니고 8년상을 치르자고 하면서 그 더운 여름에 문이랑 창문을 다 걸어잠그고. 딸들이 바깥 소식을 듣기만 해도 혼을 내고. 그렇게 자연스러운 욕망을 억눌러 놓으니, 딸들이 더 간절히 사랑과 결혼을 바랄 수밖에 없지. 


A: 난 베르나르다가 『토지』의 서희처럼 강인하게 한 집안을 이끌어나가는 멋진 여자일 줄 알았거든. 그런데 이 여자는 성별만 여자일 뿐이지 그냥 가부장이야. 여자가 권력을 잡아봤자 결국 같은 여자를 억압할 뿐이라는 건가?

B: 베르나르다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야. 집안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질서가 필요하다고 배워 왔겠지.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가부장적 질서로 통제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어. 

A: 그 고집 때문에 오히려 베르나르다네 가족들은 더 큰 비극을 맞은 거야. 

B: 그래. 결국 막내딸이 죽는 지경까지 왔는데도 울기 않겠다면서 "베르나르다 알바의 막내딸은 처녀로 죽었다."고 선언하잖아. 자기 막내딸이 자기가 그렇게 손가락질하고 죽어 마땅하다고 했던 여자들과 같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A: 지독한 여자야. 언니들이 막내 동생을 잃고 슬퍼할 틈도 주지 않아.

B: 베르나르다가 그렇게 하고서 예전과 같이 살 수 있었을까? 아무리 완고한 사람이었어도 그러지는 못했을 거야. 

A: 가부장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만들어.

B: 딸들뿐만 아니라 베르나르다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되어버린 거지. 


(B,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한다.)

B: 이 대사들 슬프지 않아? 폰시아가 큰아들한테 돈을 줘서 창녀한테 보냈다고 했잖아. 남자들한테는 창녀가 필요하다고. 그러니까 베르나르다의 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눠. "남자들은 모든 것이 용서되지." "여자로 태어난 게 가장 큰 벌이야." "우린 우리 눈조차도 우리의 것이 아니니까."

A: 거의 백 년 뒤인 지금도 그 말에 공감하게 된다는 게 슬프다. 

B: 여자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이런 괴로움을 직접 말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여자들이 누군가의 어머니, 딸, 아내, 연인이 아니라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고 욕망하고 꿈꾸는 존재라는 걸 보여주잖아. 

A: 하지만 페미니즘적인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가부장제가 나쁘다, 까지 말하는 건 좋은데, 가부장제를 벗어나는 방법이 결국은 예비 가부장에게 가는 거잖아. 그것마저 좌절되고. 세상의 질서에 맞서면 결국 이 꼴이 된다는 거잖아.

B: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적인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겠지만, 여성 서사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지금도 이렇게 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개성을 보여주고 피와 살로 된 인간으로 느껴지는 작품이 필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내가 본 영화랑 연극 중에서도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작품이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고, 여자주인공이 그저 남자주인공의 로맨스를 보여주려고 나오는 작품도 많아.

A: 이 극이 처음 나온 지 80년도 넘었는데 아직 갈 길이 멀구나.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아쉽지만, 더 나아갈 단초를 던져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벡델 테스트: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앨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남성 중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계량하기 위해 고안한 테스트. 영화 속에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둘 이상 나오는가, 그들이 서로 대화하는가,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 외에 다른 내용이 있는가, 이 세 개의 문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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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카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5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민용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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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 1898~1936는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스페인에서는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다그는 자신의 고향 안달루시아의 자연과 사람들그들의 정서를 자신의 시에 녹여내 '민요 시인', '집시 시인', '국민 시인'이라는 칭송을 받았다그러나 그의 시의 신비로움과 맑은 서정성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이 책은 그의 시들 중에서 안달루시아의 자연과 정서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면서지나치게 스페인안달루시아의 역사와 전통문화에만 치우친 시가 아닌 누구나 그 아름다움과 신비향기를 느낄 수 있는 시들을 가려내어 모았다

  그가 안달루시아의 자연과 정서를 그린 시들은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가득하지만그 바탕이 되는 정서는 더없이 맑고 서정적이다그가 그리는 안달루시아 집시들의 한의 정서는 우리의 한()의 정서와 통하기도 해우리에게 묘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소리를 하면 사람이 노래하는 게 아니라/한이 스스로 노래를 하는 듯..."이라는 시구(플라멩코 삽화들-유명한 플라멩코 가수 마누엘 토레스에게」 중 '플라멩코 말라게냐 소리꾼 후안 브레바')는 소리로 한을 풀어냈던 우리의 소리꾼들을 떠올리게 한다그의 시에서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환상적인 이미지와 김소월을 떠올리게 하는 맑은 서정한의 정서가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낸다.

  로르카는 맑은 서정과 신비롭고 환상적인 이미지만을 그리는 시인이 아니라, 현실을 날카롭게 직시하고 시로써 현실을 비판했던, 옳지 못한 현실에 저항할 줄 알았던 시인이었다.  그는 2년 동안 뉴욕에서 유학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뉴욕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실상은 매우 삭막하고 차가운 도시였다. 그와 같은 이민자, 유학생들에게는 더욱 더 냉혹한 곳이었다. 로르카는 뉴욕에서 지내던 시절에 쓴 시들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짓밟는 자본가들의 이기심과 비정함을 비난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고발한다,
다른 절반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자기들의 시멘트 산을 일으키는
구제할 길 없는 다른 절반.
...나는 너희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다른 절반의 사람들이 내 말소리를 듣는다
삼키며노래하며그들의 순수 속에서 날아가며,
...사무실의 숫자 속을 헤엄치는 너 자신도 흙이다.
...나는 고발한다.
나는 이들 텅 빈 사무실들의
음모를 고발한다.
그들은 밀림의 계획을 지우는
어떤 고민이나 고뇌도 전달하지 않는다
- 「도시로 돌아오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이 대도시에서 사랑을 되찾아야 한다고 외친다.

그리고 사랑은 베개 밑에서 나누는
뼛속까지 아파 오는 어둡디 어두운 입맞춤에 있다.
말갛게 비치는 손을 가진 노인은
죽어 가는 수백만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말하리라
사랑사랑사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성스러운 나날의 빵을 원하니까,
오리나무 꽃과 낟알을 털고 난 뒤의 영원한 사랑을 원하니까,
두 편의 송가」 중 '로마를 향한 절규-크라이슬러 빌딩의 탑으로부터'

  그의 작품 곳곳에서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튀어나와 시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주기도 하고스페인안달루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잘 모르기에 스페인안달루시아 사람들만큼 그의 시에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한계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의 시에 담긴 맑은 서정과 신비함, 비정한 현실에 맞서 사랑을 되찾으려는 따뜻한 마음은 삭막한 현실을 뚫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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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에서의 일 년 - 칼리프의 집 동방문학총서 2
타히르 샤 지음, 알이따르 옮김 / 훗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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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카사블랑카> 때문에 카사블랑카는 많은 사람들에게 낭만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실제로 그곳에 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영국의 작가 타히르 샤는 영화보다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떠났던 모로코 여행에서 영향을 더 받기는 했지만, 그 또한 카사블랑카에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곳에서라면 "아치와 주랑이 있고 향기로운 참죽나무로 만든 높은 문과 숨겨진 정원이 있는 안뜰, 마굿간과 분수, 과일나무가 있는 과수원, 그리고 수십 개의 방이 있는 제대로 된 집으로의 탈출"이 가능할 거라고. 그래서 주변의 동료, 지인들의 만류도 듣지 않고 카사블랑카의 대저택 다르 칼리프(Dar Khalifa, 아랍어로 '칼리프(이슬람 사회에서 상당한 정치 세력을 거느린 지도자)의 집'이라는 뜻)를 사고 가족들과 그곳으로 이사한다. 그러나 이사 온 첫날 밤 환상은 박살난다. 


  이사 온 첫 날 밤, 오래 전부터 저택을 관리해 온 관리인들은 진(Jhin, 알라가 불에서 만들었다는 정령으로, 무슬림들이 진들이 인간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들을 노엽게 하지 않기 위해 화장실에도 가지 않고 한 방에 석탄 덩어리로 원을 놓고 그 안에서 자야 한다고 말한다. 첫 날 밤을 무사히 보낸 뒤로도 관리인들은 툭하면 진을 핑계대면서 말을 듣지 않는다. 심지어 작가의 가족들이 사는 것을 진들이 원하지 않으니 퇴마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말한다. 근처에 사는 조폭 두목의 아내는 작가가 다르 칼리파의 집 문서를 찾아내지 못한 것을 알고 가끔씩 찾아와서 협박한다. 집안 관리를 위해 데려왔던 비서 조흐라는 작가가 자신을 테러리스트로 모함했다고 자신의 수호 정령이 말해줬다며 작가의 계좌에서 4천 달러를 인출해서 도망친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저택을 보수하기 위해 건축가에게 보수공사를 의뢰하지만, 건축가가 보낸 인부들은 공사를 개판으로 하고 있고, 건축가에게 따져도 건축가는 나 몰라라 한다. 


  작가는 아버지 쪽으로 아프가니스탄 혈통이고 어린 시절 아버지와 모로코를 여행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문화와 전통을 조금이나마 체험했다. 그러나 영국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쭉 생활해 왔기 때문에 다른 영국인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다. 현대 서구인인 작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환장스러운 상황의 연속에서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두 번째 비서 카말이다. 카말은 미국에서 여러 해 살다 와서 영어에 능통하고 업무 처리에 있어서도 유능하다. 그러면서도 모로코인으로서 같은 모로코인들의 사고 방식, 삶의 방식을 훤히 꿰뚫고 있기 때문에, 작가와 가족들이 모로코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를 유연하게 해결해 간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법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세상 물정 모르는 주인공에게 혀를 끌끌 차면서도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때로는 어둠의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 캐릭터는 소설이나 영화, 만화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현실에도 있었다. 작가와 카말이 모로코 생활을 하면서 닥쳐오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모습(더 정확히는 카말이 문제를 해결하고, 작가가 카말의 수완에 감탄하거나 경악하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낸다.


 "자신이 간 장소를 여행자보다는 밀접하게 현지인보다는 낯설게" 바라본다는 작가 소개처럼, 작가는 여행자보다는 더 가까이서, 현지인보다는 더 멀리서 카사블랑카와 모로코를 바라본다. 카말이 건축가를 해고하고 새로 데려온 건축공들은 놀랄 만큼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저택을 탈바꿈하지만, 저택 공사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관리인들은 툭하면 진 핑계를 대면서 말을 듣지 않지만, 자신들이 받은 월급의 3분의 1을 작가의 이름으로 근처 학교에 기부해 마음을 찡하게 한다. 클럽에서 만난 모로코 여자에게 반해 이슬람 이단 종파의 일원이 된 미국 청년의 모습에 혀를 차다가도, 할아버지와 친하게 지냈던 모로코 사람들에게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추억에 잠긴다. 아름다운 풍경과 따뜻한 인정, 속물 근성과 뒤틀린 자본주의가 뒤섞인 모로코에서 좌충우돌하며 일 년을 보낸 뒤, 작가는 마지막으로 말한다. "무엇보다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우리가 모로코와 관리인들에게 그리고 칼리프의 집에서 마침내 인정받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작가의 블로그와 홈페이지, 페이스북을 찾아보니 작가는 지금도 다르 칼리파에서 살고 있다. 관리인들과도(심지어 돈을 들고 튀었던 조흐라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나름의 애로사항이 있겠지만, 이 모든 상황들을 감당할 가치가 있었다고 할 만큼 다르 칼리파는 아름답다. 작가와 가족들, 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다르 칼리파에서 앞으로도 오래도록 행복하게 지냈으면 한다. 


다르 칼리파의 문패가 걸려 있는 하얀 담장


모자이크로 장식된 음수대. 숙련공들이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도자기 조각 수천 개로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완성했다.


타히르 샤의 서재. 시더나무로 만든 24미터 길이의 책장이 들어서 있다. 현대적인 가구들과 아랍 전통무늬가 새겨진 저택의 문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주황색 양탄자와 커튼, 우아한 곡선의 가구들로 꾸며진 거실


푸른색 타일과 모자이크로 장식된 욕실


사진 출처: 타히르 샤 블로그(http://www.tahirshah.com/blog/)

http://artnlight.blogspot.com/2008/09/dar-khalifa-caliphs-house-in-casablanca.html

http://digma.lt/interjero-dizainas-interjeras/kalifo-rumai/dar-khalif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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