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지음, 김도연.이선화 옮김 / 달콤한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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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서울과 인천에서 보냈고, 평생 동안 표준 한국어로 말하고 쓰면서 살아왔다. 두 개의 언어를 병행해서 써야 했을 때는 해외여행을 갔을 때뿐이었고, 그 여행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은 일행과 한국어로 이야기하면서 보냈다. 그러니 혼혈이라든가, 이민을 갔다든가 해서 두 언어, 두 나라, 두 문화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사람들의 마음은 책이나 방송을 통해 간접 경험할 수밖에 없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두 개의 언어와 문화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은 이란계 작가가 이란과 프랑스, 페르시아어와 프랑스어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를 버리지만, 성장해서는 자신의 뿌리인 페르시아어, 이란과 화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기승전결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기보다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과 상념들을 털어놓고 있기 때문에 소설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인 요소들이 섞인 에세이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찾아간다는 큰 이야기 줄기 아래 있지만, 이란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프랑스에서 보낸 소녀 시절, 성인이 되어 이란에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가 시간의 순서와는 상관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더욱 혼란스럽다. 게다가 시와 산문, 현실과 환상, 비유와 상징이 뒤섞여 있어,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모국어 찾기 이야기를 기대했던 사람들로서는 당황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머릿속을 들여다 본다고 생각하고 그 안의 상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작가의 부모님이 어린 딸(작가)을 데리고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치적 억압이었다. 1979년 부패한 팔레비 왕조를 몰아낸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은 서슬 퍼런 독재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임신한 몸으로 대학교 학우들과 시위를 하다 학생들이 경찰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되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도 경찰에게 쫓기다 3층에서 뛰어내려 유산할 뻔했다. 작가의 생일날마다 꽃을 선물하던 다정한 외삼촌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전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8년 동안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야 했다. 이런 정치적 억압은 우리에게도 낯선 것이 아니다. 


 고국을 떠나 망명한 프랑스도 작가 가족에게 마냥 따뜻한 곳은 아니었다. 같이 놀아주지 않는 학교 아이들에게 말도 못 붙이고 외로워하던 작가는 프랑스에 적응하기 위해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를 버린다. 부모님이 집에서는 페르시아어를 쓰라고 해서 여전히 페르시아어로 말할 수는 있지만, 페르시아어보다는 프랑스어로 읽고 쓰는 것이 더 편해져 버렸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프랑스어를 사용하면서,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크루아상이 고향 음식으로 느껴질 정도로 프랑스가 또 하나의 고국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민자라는 이유로 작가가 '진짜'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한다. 두 개의 언어와 문화를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이야기는, 평생 두 언어, 두 문화 사이에서 헤매면서 살아온 작가에게 속 편한 소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다시 이란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21세기가 되어서도 종교 경찰들이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게 옷을 입었는지, 정숙하지 못하게 외간 남자와 함께 있는지 감시하고 있는 곳이니까. 누구보다 손녀가 보고 싶었을 외할머니조차, 작가가 이란에 남겠다고 하자 만류할 정도다. 수십 년을 살았어도 온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프랑스와, 민소매 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탈 자유도 없는 이란. 어느 곳도 작가를 온전히 받아주지도, 이해해 주지도 않는다. 책에 실린 온갖 기억과 상념의 파편들은 두 개의 정체성 사이에서 분열돼서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작가의 혼란스러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작가는 두 언어, 두 나라, 두 문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익힌다. 다시 페르시아어를 익히면서 페르시아어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고, 이란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이란과 프랑스 두 곳에서의 삶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 연습하게 된다. 이란도 프랑스도 아닌 곳들에서 몇 년 동안 살아가는 것에도 익숙해진다. 테헤란의 교통 체증 속에서도 택시기사가 읊어주는 하페즈(14세기 이란의 시인으로, 페르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다.)의 시에서 행복을 느낀다. 마침내 묵묵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국어와 화해한 것이다. 


 그냥 모국과 지금 살고 있는 나라 모두의 언어와 문화를 누리며 살아가며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고국을 떠나 낯선 나라와 언어, 문화에 던져졌던 작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 어디서든 살 수 있는 지금에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두 개의 언어, 문화 사이에서 나름대로 균형을 잡았다 해도 다시 흔들리고 헤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묵묵히 그녀를 기다려준 모국어와 그녀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 많은 어려움과 시간을 겪으면서 단단해진 그녀 자신이 있기에 다시 굳건히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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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지 없는 여행 - 환타 전명윤 여행 에세이
전명윤 지음 / 사계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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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동안 수도권을 벗어나지도 못하다 작년에야 수도권을 벗어나 남쪽 지방으로 국내 여행을 갔는데, 올해 코로나가 터졌다. 그저 여행 에세이나 TV 여행 프로그램으로 간접 여행을 할 수밖에 없다. 예쁜 사진들로 글의 부실함을 가리는 여행 에세이, 그냥 떠나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여행 에세이는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런 여행 에세이들은 서점에 차고 넘치니까. 여행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여행 에세이를 읽고 싶었다.

『환타지 없는 여행』은 말 그대로 여행에 씌워진 환타지들을 걷어내는 여행 에세이다. 왜 '판타지'가 아니라 '환타지'냐 하면, 작가의 인터넷 닉네임 '환타'를 연상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여행에 대한 '상을 파'한다는 뜻의 닉네임처럼, 여행 가이드북 작가인 그는 사람들이 여행에 대해 품는 온갖 낭만적인 환상들을 걷어낸다. 그도 젊은 시절에는 다 버리고 무작정 떠나라고 사람들에게 추천했었지만, '떠나면 행복해진다'는 환상이 허상임을 깨달은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돌아와야 할 이유를 찾고, 돌아올 날짜를 정해야 여행입니다. 돌아올 길을 불태우고 떠나면 그때부터 국제 거지가 되는 거예요."(p. 20.)

작가의 친구들은 늘 여행을 하고 있는 작가를 부러워하지만, 그들에게는 작가에게 없는 안정적인 직장과 편안한 집, 큰 차가 있다. 여행이 끝나면 돌아올 일상이 있어야 여행은 현실이 된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무작정 떠나라는 말만 하지 않고, 삶을 지탱해 주는 일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그에게 신뢰가 간다.

"누군가에게 가이드북은 여행지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수평선 너머의 풍경을 꿈꾸게 하는 책일지 모른다. 그러나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고 제대로 안내해야 하는 나에게는 서바이벌 키트 혹은 만능 구급상자다. 그 책임감 때문에 내가 쓴 가이드북은 늘 잔소리로 넘쳐난다. 지도 밖은 위험천만한 곳이다. 현지인에게 당신이 특별한 이유는 당신의 지갑이 그곳의 지폐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환상이 아닌 현실을 거듭 이야기하는 이유다."

(p. 72~73.)

그가 가이드북을 쓰는 이유는 여행에 대한 환상을 품고 떠난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다. 여행 작가들이 심어준 환상 때문에 제대로 사전 조사도 해 보지 않고 여행을 떠났다 낭패를 본 사람, 낭패 정도로 그치지 않고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 『론리 플래닛』에서는 2019년 스리랑카를 '올해 여행해야 할 국가' 1위로 선정했지만, 그해 4월 스리랑카에서는 연쇄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해 여행을 온 외국인들이 여러 명 사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늘 여행지 추천에 신중을 기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가이드북이 관광 명소, 맛집을 찾기 위해 뒤적이는 정보 모음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잘 만든 여행책은 그 지역의 시대와 현실을 여행이라는 주제로 기록한 지역서이자 민속지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여행 에세이에서도 그는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보지 못한 진실들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인도에서 소를 신성시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인도의 지방 유지들이 목 말라 죽어가는 사람들 대신 신성한 소에게만 물차를 보내 자신의 신앙과 부를 과시한다는 것은 잘 모른다. 주말마다 홍콩 거리를 가득 메운 외국인 가사도우미들을 보지만, 그들이 주5일 노동이라는 근로기준법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주말에는 어쩔 수 없이 주인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에서 나와 거리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보지 못한다.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오키나와 흑당 음료에는 일본 본토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이용당하며 사탕수수 외의 다른 작물은 재배할 수 없었던 과거 오키나와의 아픔이 담겨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내가 우리나라 밖의 이야기에 얼마나 무지하고 관심이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나 자신이 다른 문화권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흥밋거리로만 외국 이야기를 소비할 뿐이었다.

코로나가 지나면 가까운 곳부터 하나씩 환상을 걷어낸 여행을 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곳에서 찍히는 사람 얼굴만 다른 사진을 찍으며, 여행지 하나하나가 해야 할 숙제인 듯이 여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책이나 TV로 보는 것만으로는 겪을 수 없는 것들을 겪으면서 더 넓은 세상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배우고 싶다. 지저분한 것도 고생스러운 것도 못 견디는 나는 실전에서는 결국 편안한 환상으로 돌아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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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구기담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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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 중 한 편인 「특별 요리」가 스탠리 엘린의 특별 요리」(*스탠리 엘린의 특별 요리」서평 https://blog.aladin.co.kr/797871198/11830161)를 오마주한 작품이라고 해서 빌려 봤는데흔한 일본 괴기소설일 뿐이다스탠리 엘린의 특별 요리」가 날카로운 풍자와 통찰력촌철살인인 문장을 갖추고 있는 반면, 이 단편집 속 단편들에는 음습함과 중2병 정서끈적끈적하고 뒤틀린 에로티시즘만 있다.

 

재생 

근친 성폭력의 피해자인 유이가 사실은 본인도 아버지와의 변태적인 성관계를 즐기고 있었고남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봤기 때문에 남편을 선택했다는 설정이 찜찜하다성폭력 가해자들을 정당화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상대도 같이 즐겼다이니까유이의 잘린 머리에서도 새 몸이 나오고머리 없는 몸에서도 새 머리가 나와서 주인공을 당황하게 하는 설정이었다면 더 섬뜩하지 않았을까 싶다.

 

 요부코 연못의 괴어

전 지구급 재앙이라도 불러올 것 같은 괴생명체의 최종 진화 형태가 겨우 예쁜 새였다니 김이 빠진다그나마 중2음습함이 덜하고 밝은 내용의 단편이다.

 

 특별 요리 

스탠리 엘린은 음식에 개똥철학을 부여하는 사람들을 풍자했는데주인공은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개똥철학을 늘어놓고아내는 또 거기에 넘어간다이것도 나름의 풍자라고 할 수 있지만결국 낳자마자 잡아먹기 위해 아이를 가지자고까지 하게 되는 주인공. 엘린의  특별 요리」가  미식에 탐닉하는 사람들을 풍자한 반면 이 소설은 내가 이렇게까지 기괴하고 엽기적으로 쓸 수 있다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더 강한 것 같다.

 

 생일 선물

주인공이 남자친구를 죽이고 기억을 잃었던 것까지는 알겠다하지만 주인공이 왜 남자친구를 죽였는지동아리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준 토막시신의 정체는 무엇인지동아리 사람들은 왜 토막시신을 주인공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는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는다그냥 생시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몽환적인 분위기와 상자를 열어볼 때마다 동아리 사람들이 주문처럼 뇌까리는 섬뜩한 문장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철교

괴담에서 일어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흔한 설정어떤 때는 지어낸 이야기라도 그 이야기 자체가 실제와 같은 힘을 얻는 것 같다.

 

인형

진짜 주인공이 소멸되고 인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인형은 자신이 진짜 주인공인 줄 알다가 또 다른 인형에게 소멸당하는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지금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이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분열된 자아 사이에서 헤매는 이야기.

 

안구기담

주인공이 진짜 후배 아버지의 눈을 희생해서 눈을 뜨게 된 소녀였는지아니면 후배가 그저 주인공을 놀리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다그래서 더 찜찜함이 남는 이야기후배 아버지로 추정되는 액자 속 주인공이 겪는 끈적끈적한 에로티시즘과 유이의 어머니가 벌이는 행각의 기괴함은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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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팡도르
안나마리아 고치 지음,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정원정.박서영 옮김 / 오후의소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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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나오려다 신착 도서 서가를 한 번 더 돌아봤다. 맨 위 칸에 눈에 띄는 그림책이 있었다. 눈 덮인 벌판 위에서 빨간색의 무언가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는 할머니와 검은 형체. 도대체 저 검은 형체의 정체는 무엇이고, 둘은 추운 겨울에 밖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제목으로 책의 내용을 짐작해 보려고 해도 '팡도르'라는 단어에서 막힌다. 무슨 책인지 잠깐 앉아서 읽다 가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책 한 권을 다 읽는 데 길어야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테니까.


크리스마스에 먹는 이탈리아의 전통 빵, 팡도르

이미지 출처: https://www.insidetherustickitchen.com/pandoro-christmas-cake/


내 호기심을 자극했던 단어 '팡도르'는 정확히 발음하자면 '판도로(pandoro)'이고, 크리스마스에 먹는 이탈리아의 전통 빵의 이름이라고 한다. 강가에 있는 어느 시골 마을 외딴 집에 살고 있던 할머니는 '죽음도 나를 잊어버렸다'고 할 정도로 오랜 세월 혼자 외롭게 살아왔다. 직접 빵을 만들어 마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할머니의 낙이다. 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둔 어느 겨울, 할머니를 잊어버린 줄 알았던 사신(死神)이 할머니를 데리러 찾아왔다. 할머니는 크리스마스 때 마을 아이들에게 나눠줄 팡도르를 만들어야 하는데, 빵 반죽을 숙성시키고 빵 안에 들어갈 소를 준비하려면 일주일이 걸리니 일주일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단칼에 거절하려던 사신의 입에 할머니는 빵에 들어갈 달콤한 과일 소를 쏙 넣어주고, 처음 보는 달콤한 맛에 당황한 사신은 할머니를 데려가지 못한다. 그렇게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줄 팡도르를 준비해야 한다며 몇 번이나 죽음을 미룬다. 사신은 과연 할머니를 저승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


기지를 발휘해서 저승에 끌려가는 것을 피한 사람은 우리 옛 이야기에도 나온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할머니는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직 사람들에게 나눌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이다. 할머니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이웃뿐만 아니라 사신에게까지 달콤한 빵을 나누어준다. 외딴 집에서 홀로 사는 할머니의 처지와 추운 겨울날은 마음을 쓸쓸하게 하지만, 그 속에는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림은 오직 하얀색, 검은색, 빨간색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하얀 눈밭과 대비되는 검은 사신, 빨간 불빛. 잘 구워져 황금빛이 된 빵과 상큼한 귤 소, 달콤한 밤 절임은 빨간색 동그라미로만 표현되지만, 이 동화 속 따뜻함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하다. 글에서 사신은 검은 망토 대신 할머니가 준 숄을 둘렀더니 우아한 인간 여성처럼 보였다고 묘사되지만, 그림에서는 커다란 검은 자루로 보인다. 그래서 사신이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것이 더 직접적으로 와 닿고, 그런 존재와도 소통하고 정을 나눌 수 있는 할머니의 따뜻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림책이지만 아이보다는 어른, 그것도 인생의 황혼을 맞고 있는 어른이 더 공감할 수 있는 책이다. 어린 시절이었으면 할머니의 쓸쓸함과 그 속에서도 따뜻한 정을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 속 할머니만큼 나이가 들면 할머니에게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이 '어른을 위한 그림책'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는데, 생각해 보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보다는 인생의 쓴 맛 단 맛을 다 겪고 조용히 삶을 관조할 줄 알게 된 어른에게 더 맞는 책이다. 


눈 오는 겨울날에 읽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한여름에 읽게 되었다. 한여름에 하얀 눈밭과 그 위에서 빛을 발하는 빨간색 빵들과 불빛을 보면서 잠시 겨울을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겨울에 다시 읽으면 난로에 손을 쬐듯이 마음에 온기가 퍼져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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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가 웃는 순간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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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홍콩의 추리 작가 찬호께이의 소설을 읽는 건 이번이 네 번째다첫 번째로 읽은『13·67』은 한 경찰의 46년을 돌아보면서 그의 삶과 홍콩 현대사를 엮어서 거대한 서사로 만들어가는 솜씨가 감탄스러웠다두 번째로 읽은 『망내인』은 주인공이 지나치게 전지전능하다는 감이 있었지만 주인공이 사용하는 IT 기술의 디테일에 압도당했다세 번째로 읽은 『기억나지 않음형사』는 앞의 두 책보다 가벼운 느낌이었지만 예상을 몇 번이나 뒤엎는 전개 덕분에 흥미진진하게 읽었다이렇게 작품마다 서로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작가이기에 이번에 읽은 『염소가 웃는 순간』도 기대감을 갖고 읽었다.

『염소가 웃는 순간』은 앞서 읽은 세 권의 소설과 달리 공포소설이다추리 작가가 쓴 소설답게 과학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도그 진상을 알고 보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일 것 같았다다른 공포소설들처럼 원인을 모르니 해결책도 찾을 수 없는 공포를 다룰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공포물을 무서워하는 편인데도 긴장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공포라면 해결할 방법도 있을 테니 덜 무섭다.

내 선입견일지 모르겠지만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그런데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기 전까지 공포감은 팽팽하게 유지된다대학 신입생인 주인공들이 그냥 재미로 들었던 기숙사 7대 괴담은 주인공들의 눈앞에 그대로 재현되어한 명 한 명을 희생시켜 간다잔혹한 부분이 꽤 많지만 공포감은 잔혹함만으로 생기지 않는다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할 때희망이 있다고 믿었지만 그 희망이 헛된 것임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우정과 생존 본능 사이에서의 갈등모든 게 해결됐다 싶었는데 더 참혹한 일이 생길 때의 경악스러움하나하나 뜯어보면 공포물의 클리셰이지만 작가는 이런 클리셰들을 영리하게 활용해독자들까지 공포에 압도당하게 만든다.

그런데 결말 부분에서 한 캐릭터가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면서 공포감은 사라져버린다사실 이 모든 끔찍한 일들이 누군가의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환상이기 때문이다이 환상을 깨기만 하면 모두가 무사한 현실로 돌아갈 수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친구들이 눈앞에서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갔는데도 살아남기 위해남은 사람들이나마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는데그게 다 환상이었다니 허탈하기까지 하다공포감이 결말까지결말 이후에도 이어지길 바라는 사람들로서는 이런 전개가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인물 설정이나 사건 전개에서 일본 라이트노블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자기 입으로는 평범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평범하지 않은 남주인공(그는 이 모든 상황이 실제라고 생각했을 때도 놀라운 희생정신과 용기로 친구들을 지켜내고결국 사건을 해결해낸다.)과 꾸미면 예쁜 여주인공은 일본 라이트노블만화의 클리셰이고 나머지 친구 캐릭터들도 일본 만화에서 자주 보았던 전형적인 캐릭터 유형들이다주인공이 실수로 여자 가슴을 만지는 장면에서는 일본 만화에서 독자들을 끌기 위해 일부러 넣는 선정적인 장면들이 떠오른다한 캐릭터가 닌자술을 활용해 친구를 구하는 장면에서는 내가 지금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사건의 배경과 주요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처음 100여 페이지를 읽고 나면 나머지 400여 페이지는 순식간에 읽힌다공포 영화에서 많이 보던 소재들과 공포물의 클리셰들이 등장하지만 그런 요소들을 잘 엮어내고긴장감과 공포감을 낮추었다 다시 끌어올리는 솜씨도 뛰어나다사건의 참상 묘사도 생생해마치 등장인물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모든 일들을 겪고 있는 것 같다모든 게 너무 쉽게 해결되는 감이 있지만아무도 죽지 않아 다 읽고 나서 기분이 찝찝하지 않다덥고 이런저런 걱정도 많아 잠 못 드는 여름밤에 읽기 좋은 소설이다읽는 내내 등골이 서늘해지게 하고걱정거리를 잊어버리게 할 만큼 재미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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