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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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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사람들에게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하자분명 같은 이야기인데도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표현이 달라질 것이다그리고 사람마다 이야기에서 읽어내는 의미도 다를 것이다어떤 사람은 나무꾼을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으로 볼 것이고또 다른 사람은 나무꾼을 파렴치한 결혼사기범으로 볼 것이다지어낸 이야기뿐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도 마찬가지다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건의 진상은 제각각이다그리고 그 사건이 지니는 의미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과연 유일한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최제훈의 단편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의 단편들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기존의 이야기를 패러디한 단편들과 평범한 주인공이 일상 속에서 겪는 혼란을 다룬 단편들이 두 종류의 단편은 서로 성격이 전혀 다른 것 같지만이들이 말하는 주제는 같다명명백백한 단 하나의 진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패러디 단편의 예로 표제작퀴르발 남작의 성을 살펴보자이 단편은 하나의 이야기가 얼마나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는지그리고 얼마나 다양한 의미들을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프랑스의 귀족 퀴르발 남작이 어린 아이들을 잡아먹었다는 가상의 설화는, 17세기 말 프랑스에서 21세기 초 한국까지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서 소설과 영화블로그 포스트, TV 뉴스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된다사람들이 퀴르발 남작 이야기에서 찾아내는 의미도 제각각이다. 1950년대의 미국 기자는 퀴르발 남작 이야기에서 공산주의의 폐해를 읽어내는 반면, 2000년대의 일본 감독은 정반대로 자본주의의 폐해를 읽어낸다그리고 작가는 이 모든 변형들을 낳은 실제 퀴르발 남작의 진실을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단편들 또한 유일한 진실을 찾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지어낸 이야기세월이 흐르면서 변형되는 이야기들과 달리 일상 속에서 우리가 겪는 일들에는 수수께끼나 모호한 구석이 전혀 없을 것 같다그러나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기에진실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그녀의 매듭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만 선택적으로 기억에서 지워버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알지 못한다.그림자 박제에서는 주인공이 말하는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진실인지 주인공의 또 다른 인격 톰이 말하는 학대당하던 어린 시절이 진실인지 모호하게 처리된다.마리아그런데 말이야에서 주인공과 후배의 이야깃거리가 됐던 마리아의 정체도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고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로 추측될 뿐이다.

 

  디테일한 설정을 토대로 허구의 이야기를 실제처럼 묘사하는 작가의 서술 기법 또한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호하게 한다.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가상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대학 강의감독 인터뷰리뷰 기사는 실제 대학 강의와 리뷰 기사의 특징을 디테일하게 살리고 있어,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영화가 실제로 있을 것 같은 착각까지 불러온다.마녀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고찰에서는 실제 마녀사냥에 대한 역사 자료들을 활용해 실재감을 높인다.


  독자들은 이 책 속 단편들을 읽으면서 허구와 진실을 구별할 필요도이야기의 명명백백하고 유일한 진실을 찾아낼 필요도 없다소설 속 진실의 파편들을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해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을 자유롭게 만들어내면 된다그렇게 재구성된 진실은 마지막 단편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속 시체 조각들을 이어 붙여 재조립한 시체와 닮은 모습일 것이다모순되고 충돌되는 요소들로 재구성된 진실은 단 하나의 명명백백한 진실보다 오히려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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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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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리 포터』에서는 기차역 한쪽 벽 너머에 마법의 승강장이 숨어 있고, 『나니아 연대기』에서는 옷장 속에 환상의 세계 나니아로 가는 통로가 있다.『위저드 베이커리』는 우리나라 어느 도시의 어느 골목에 있는 빵집 너머에 있는 마법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해리 포터』와 『나니아 연대기』에서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주로 마법의 세계 안에서 펼쳐지는 반면,  『위저드 베이커리』 속 주인공은 현실의 공간 안에서 현실과 부딪치는 마법을 본다. 현실은 말할 것도 없이 가혹하고, 마법도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청소년 소설이면서도 어른을 위한 잔혹동화이기도 하다. 

  제목 그대로 마법사의 빵집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 책은 마법의 빵보다는 마법의 빵을 둘러싼 사람들의 욕망과 실수, 그로 인한 가혹한 대가, 그리고 주인공 소년의 어두운 성장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소년은 위저드 베이커리에 숨기 전에도 후에도 아동성폭행, 아동학대, 자살, 스토킹 등 현실의 어두움과 마주친다. 사람들은 마법이 자신의 소망을 이루어지고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라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를 만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인간에 비하면 전지전능한 것 같은 마법사 점장도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마법과 환상은 소년도 손님들도 마법사 자신도 구원하지 않는다. 소년과 마법사에게 위안과 구원을 준 것은 서로를 아끼는 마음과 자신 앞에 놓인 고난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이 타임 리와인더 쿠키로 시간을 되돌리지 않았을 때의 결말 속에 작은 희망이 숨어 있을 것이다. 소년이 가족들이나 손님들의 어두움을 다시 마주친다고 해도, 다시 만난 마법사, 파랑새와 함께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이 본 열 가지가 넘는 마법의 빵 중 그 효과가 손님들에게 나타난 이야기가 생각보다 적은 것은 아쉽다. 시험이나 출장 때 마인드 컨트롤을 돕는 마인드 커스터드 푸딩, 화해하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메이킹 피스 건포도 스콘(개인적으로 가장 쓰고 싶은 빵이다.), 학교나 회사에 자기 대신 도플갱어가 나가게 만드는 도플갱어 피낭시에까지 실제 효과가 나타난 이야기를 좀 더 썼다면 이야기가 더 풍성해졌을 것이다. 체인 월넛 프레첼을 산 여성이 경솔했던 것은 맞지만, 헤어진 남자친구의 스토킹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방어 수단조차 주지 않고 혼자 책임지라고 한 것(마법사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일어난 살인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었고, 적어도 자신을 방어할 수단들을 갖추고 있었다.), 여성 캐릭터들은 희생자(주인공의 친어머니, 주인공의 이복여동생)가 아니면 조력자(파랑새), 악역(진상 손님들, 배선생)일 뿐이라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환상과 현실을 엮어나가는 솜씨와 잔혹한 현실과 마법 속에서 작게나마 빛나는 희망은 여전히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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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구두당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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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20여 년 전 일본의 작가 키류 마사오는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에서 백설공주의 왕비는 계모가 아니라 친어머니였다, 백설공주는 부왕과 근친상간 관계였고 왕비는 친딸을 질투한 것이다, 라는 파격적인 동화의 재해석을 보여주었다. 그 이후로 동화의 재해석, 잔혹동화들은 수없이 반복되어서 이제는 식상할 정도다. 그래도 표제작 「빨간구두당」의 내용 소개를 듣고 신선한 내용일 것 같아서 이 책을 읽었는데,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친숙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직소처럼 다 아는 이야기임에도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갖추지도 못했고,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이미지들은 한 조각 한 조각 순간적으로만 빛난다. 동화들에 살을 붙여 종이인형 같은 인물들과 틀에 박힌 이야기에 현실감을 불어넣으려고 했지만, 소설 속 환상과 현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겉돌 뿐이다. 그래서 내게 이 책의 재해석은 신선하지도, 매혹적이지도 않았다. 


1. 빨간구두당 

  색이 사라진 세상, 개인의 개성과 감정이 철저히 억압받는 세상, 그 속에서도 색에 눈을 뜨는 주인공은 이미 영화 <플레전트빌>과 미국의 작가 로이스 로리의 소설기억 전달자에서 등장한 설정이기 때문에 그렇게 신선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처음에 책 소개만 봤을 때는 '빨간구두당'이 색채를 통해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우는 단체의 이야기로 흘러갈 줄 알았다. 그 대신 빨간색을 세상에 혼란을 가져오는 존재로 보고, 사람들을 빨간색을 볼 수 있는 '빨간구두당'으로 몰아 발목을 잘라버리는 마녀사냥이 등장한다. 이런 마녀사냥과 빨간색을 찾는 신부의 구도기가 서로 따로 노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빨간구두당'이 말하려는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 와 닿지 않는다. 


2. '개구리 왕자 또는 맹목의 하인리히 

  여러 면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직소를 연상시킨다. 동양인 작가가 서구의 이야기를 재해석해 쓴 단편 소설이고, 1인칭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형식이며,  주인공은 어느 한 인물에 대해 깊은 양가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개구리 왕자...」는 개구리 왕자의 충성스러운 시종 하인리히를 화자로 내세우고 있고, 직소는 예수를 배신한 제자 유다를 화자로 내세우고 있다.직소는 유다가 예수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말하다가 자신을 배신한 예수에 대해 증오를 내뿜으며 쏟아내는 이야기에 독자들이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개구리 왕자...」 또한 화려한 문장을 나열하고, '직소'와 같이 충성을 바치던 대상에 대한 양가감정을 묘사한다. "당신의 시야가 다시 맑게 개기만 한다면 배신자의 오명을 쓰는 일쯤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의 밤이란 이토록, 마음속에 그리는 이에 대한 충심과 경애가 깊어지면서 동시에 의혹과 원망과 모종의 음모가 신생되기도 하는 양극의 시간인 듯합니다."는 구절은 직소」의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게 된 심리를 말하는 장면에 넣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유다의 절절한 애증이 어떻게 배신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직소'와 달리, '개구리 왕자'는 하인리히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 못한다. 하인리히는 주군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한쪽 눈을 잃는 것도 감수하지만, 때때로 한심한 주군의 모습을 가차없이 비판한다. 하인리히의 '마음속에 그리는 이에 대한 충심과 경애'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라기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기에 새겨진 강박관념처럼 보인다. 굳이 짐작해 보자면, 심장이 떨어져 나가도록 헌신했는데, 정작 주군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느라 심장의 고통을 연장시켜 놓았고, 한참 뒤에서야 얼굴만 예쁜 한심한 여자를 선택했다. 여기에서 나온 배신감과 분노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충성과 헌신이 배신당한 것에 대한 분노 이면에 깊은 애증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었는데, 그만한 애증을 가질 만한 계기나 심리 변화가 충분히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하인리히의 내면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3. 기슭과 노수부

  동화 속 주인공들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의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주인공을 제외한 사람들은 과연 그의 도움으로 행복해졌을까? 여기에 의문을 품고, 주인공의 도움이 실질적으로 그들의 삶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재해석은 신선하다. 주인공의 일시적인 도움으로 구원되기에 그들의 문제는 너무나 뿌리깊고 구조적인 것이다. 이것을 깨닫게 하는 단편이었다.


4. 카이사르의 순무

  자신이 원하는 보상을 받지 못하자 자신의 몸을 갈가리 찢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어서도 순무에 달라붙어 있는 이상한 남자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는다. 원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권력자들에게 자기 의도를 곡해당하고 희생되는 사람들은 지금도 많을 것이다. 환상과 현실 양쪽의 잔혹함이 더해져 두 배로 잔혹하고 어둡게 느껴지는 단편이다.


5. 헤르메스의 붕대

  주인공이 금기를 어겨 세상에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치는 수많은 동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 열등감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망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갈랐다 거위만 죽였던 주인공 부부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을 과욕 때문에 놓치는 주인공들이 허다한데,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을 잘 활용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주인공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6. 엘제는 녹아 없어지다 

 원작이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자신을 잃은 엘제를 비판한다면, 구병모의 소설은 엘제와 엘제를 배척하기만 한 사람들 양쪽 모두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엘제가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데는 엘제 자신의 책임도 있지만, 엘제와 함께 대화하고 고민하기보다는 그냥 무시해 버렸던 사람들의 책임도 있다. 부모는 엘제가 대학에 가서 학문을 익히게 하는 대신 귀찮은 딸을 치우듯이 시집보내 버렸고, 남편은 엘제를 복종시키려고만 했으며 시댁 식구들은 엘제를 비웃고 무시하기만 했다. 엘제는 그런 현실에 맞서서 형이상학적 세계, 학문적 세계로 더 숨어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엘제와 동질감을 느낀다. 


7. 거위지기가 본 것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감성적으로 와 닿았던 단편이다. 자기가 공주인 척 위장한 시녀 때문에 거위지기가 된 진짜 공주. 주변의 도움으로 시녀의 정체를 밝히고 왕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이게 과연 해피엔딩일까? 공주는 왕과 행복하게 살았을까? 이 단편은 이런 의문에서 시작한 재해석으로 보인다. 공주임을 몰랐을 때부터 공주를 향해 왔던 거위지기 소년의 감정은 더 없이 풋풋하고 순수하다. 바람에 흩날리는 공주의 머리카락 묘사는 소년의 설렘을 섬세하게 전달한다. 마지막에 소년과 공주의 감정이 통하는 모습은 관능적이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듯이, 소년은 공주를 향한 감정의 대가로 처참하게 처형될 것이다. 그래서 소년의 풋풋한 사랑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8. 화갑소녀전

 원작인 '성냥팔이 소녀'처럼 얼어죽지는 않지만 정체불명의 에너지 공장에 취직해서 자기 온 몸을 착취당하고 죽는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이다. 살아남으려다 결국 자신을 다 소진해 버리는 것은 성냥팔이 소녀만이 아닐 것이다. 1960, 70년대에 착취당하던 근로자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 자신까지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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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로스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욱송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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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드리겠습니다. 나으리. 그 사람은, 너무합니다. 너무합니다. 예. 못된 놈입니다. 나쁜 사람입니다. 아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살려둘 수가 없습니다. 


 예, 예. 차분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을 살려두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의 원수입니다. 예, 모든 것을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산산조각을 내어 죽여주십시오.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소설 「직소(直訴)」는 이렇게 도입부부터 강렬한 증오를 쏟아낸다. 작품의 화자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스승을 고발하는데자신 안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스승에 대한 애증을 미친 듯이 쏟아낸다. 읽을 때마다 바로 내 앞에서 미친 듯이 쏟아 놓는 듯한 그의 이야기를 홀린 듯이 끝까지 읽게 된다. 나까지 그의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조금만 읽어도 눈치챘겠지만, 이 소설의 화자는 예수를 배신한 제자 가룟 유다다.(이 책에서는 이 단편이 '유다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그럼에도 유다가 마지막에 헤헤, 저는 가룟 유다입니다.”라고 밝힐 때는 전율을 느끼게 된다. 그가 예수에 대한 모든 감정을 정리하고 배신자 가룟 유다로 남겠다고 스스로 선언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유다는 예수에게 깊은 양가감정을 품고 있다. 더 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예수를 흠모하면서도, 예수에게 현실감각이 없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현실감각이 부족한 예수 대신 발로 뛰어다니며 예수와 제자들을 먹여 살리지만, 예수가 그것을 알아주지 않고 자신을 장사치라고 경멸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원망하면서도 그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예루살렘 입성 후, 유다는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은 따뜻한 모습을 창녀인 마리아에게 보여주고, 성전을 사흘 만에 무너뜨렸다 다시 짓겠다는 호언장담을 늘어놓는 예수의 모습에 실망하고 그를 배신하기에 이른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보인 따뜻한 모습에 유다는 자신의 배신을 후회하고 다시 예수를 따르려 마음먹지만, 그 순간 예수는 말한다. "너희 중에 나를 배신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태어나지 않는 게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이제 깊은 후회와 사랑은 격렬한 증오와 배신으로 바뀐다. 

 실제 유다가 정말 돈에 눈이 먼 배신자였는지, 예수를 너무나 사랑하고, 너무나 증오해서 배신하게 된 가여운 인물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랑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존재, 결코 가질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애증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한 작품을 보지 못했다. 예수를 어느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배신자라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직소」의 유다는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유다와 매우 닮아 있다. 「직소」보다 수십 년 후에 만들어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직소」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직소의 유다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유다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예수가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배신자의 운명으로 이끄는데도, 예수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 운명으로 스스로 걸어갔다. 온 세상을 구원한 구세주에게마저 버림받은 유다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존재에게서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하고 절망스러웠을까. 자신은 예수가 경멸하는 장사꾼일 뿐이라며 위악을 떠는 유다의 마지막 모습은 연민을 느끼게 한다.


  「직소」는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와도, 독자인 우리와도 수천 년은 동떨어진 시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그럼에도 바로 우리 앞에서 유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놓는 것 같은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  「달려라 메로스」는 원전인 고대 그리스 전설에 심리묘사를 조금 더했다는 느낌만 주지만, 「직소」는 유다가 우리처럼 사랑하고 증오하며 살아간 인간임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읽을 때마다 그의 감정에 함께 사로잡혀 끊김없이 단숨에 읽어나가게 한다. 이것이 다자이 오사무의 천재성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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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9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송상기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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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은글에 스포일러 포함. PC에서는 숨은글 기능이 적용되지만 모바일, 앱에서는 숨은글 기능이 적용되지 않으니 모바일이나 앱으로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서 스포일러를 피하시는 분은 처음부터 글을 읽지 않으시면 됩니다.


 학교 국어 시간에 1인칭, 3인칭 소설에 대해 공부할 때 한 번씩은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면 2인칭 소설은 없을까?' 멕시코의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쓴 이 소설 『아우라』가 바로 2인칭 소설이다. "너는 광고를 읽어. 이런 광고는 날마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너는 곱씹어 읽어 보지. 바로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광고야." 화자가 2인칭 '너'라고 부르는 인물은 주인공인 젊은 역사학자 펠리페 몬테로이다. 작가는 왜 이렇게 독특한 서술 기법을 사용했을까?


  작품 뒤의 해설에서는 주인공을 '너'라고 부르는 화자가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라고 설명한다. 화자는 다른 사람의 내면은 전혀 설명하지 않지만 주인공 펠리페가 어떤 것을 보고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빠짐없이 이야기한다. 소설 속의'너'를 모두 '나'로 바꾼다면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바뀌게 된다. 1인칭 주인공 시점과 이 소설의 2인칭 시점은 어떻게 다른 효과를 줄까?

 펠리페는 작품 속에서 자신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괴기스러운 상황 앞에 놓여 있다. 죽은 남편의 회고록을 정리하면 거액을 지불하겠다는 귀족 노부인 콘수엘로의 광고를 본 펠리페는, 연구비를 벌 생각으로 콘수엘로의 저택에 찾아갔다. 펠리페는 회고록을 정리할 동안 자신의 저택에 머물러 달라는 콘수엘로의 부탁도 흔쾌히 받아들인다. 낮에도 어두침침한 저택에서 펠리페는 존재하지도 않는 정원, 불에 타 죽는 고양이 같은 이상한 환상들을 보게 된다. 펠리페는 콘수엘로의 시중을 들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조카딸 아우라와 사랑에 빠지지만, 아우라는 때때로 이상행동을 보인다. 펠리페는 콘수엘로가 아우라에게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펠리페 자신이 이야기하는 1인칭이나 3인칭 작가가 말하는 것과 달리, 2인칭 시점은 펠리페의 머릿속 또 다른 자신이 펠리페에게 끊임없이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자신과 분리된 또 다른 자신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은 작품에 기괴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더하면서, 작품 자체의 결정적인 반전을 암시한다.

* 스포일러 부분 


접힌 부분 펼치기 ▼

 펠리페를 '너'라고 부르는 화자가 사실은 펠리페와 같은 사람, 펠리페의 또 다른 자아인 것처럼 콘수엘로와 아우라는 같은 인물이다. 아우라가 콘수엘로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고,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양을 잡고 손질하는 모습, 회고록과 사진 속에서 아우라와 똑같은 모습으로 묘사되는 젊은 시절의 콘수엘로는 이런 반전의 복선이 된다. 콘수엘로는 젊은 시절 동물들까지 희생시켜 가면서 실험을 한 끝에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간직한 아우라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우라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콘수엘로가 펠리페에게 보여준 환상인지,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든 주술을 사용하든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자동인형인지, 자신이 잠시 젊어지는 약을 마신 건지 알 수 없다.

 

펼친 부분 접기 ▲


  작품의 결말에서도 비밀의 진상은 완전히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비밀의 진상을 정확히 알고 싶었던 사람에게는 답답할 수도 있지만, 그 모호함이 작품을 더욱 더 괴기스럽고 신비스럽게 만든다. 흑백으로 된 고전 공포 영화를 볼 때와 같은 느낌을 주지만, 또 다른 자신이 머릿속에서 말하는 듯한 2인칭 시점은 영화로는 옮길 수 없는 문학만의 장치이다. 작품 뒤에 실린 작가 후기에서 작가는 "'너'라는 단어는 모든 시공간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넘나들며 유령처럼 움직일 때 나 자신이 된다.', '한 여성의 목소리로 젊음과 노년, 삶과 죽음을 분리할 수 없고, 젊음, 노년, 삶, 죽음이라는 이 네 가지가 서로를 부른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고 말한다. 작가의 말처럼 정체성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확고하고 통일된 것이 아니라는 것, 욕망은 젊음과 노년의 경계도 뛰어넘어 자기만의 생명력을 얻는다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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