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영원의 시계방 초월 2
김희선 지음 / 허블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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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극작가 로드 설링은 “SF(Science Fiction)는 믿기 힘들지만 가능한 것을 그리며, 사이언스 판타지(Science Fantasy)는 믿기 힘들면서 불가능한 것을 그린다”고 정의했다. 그런 점에서 김희선의 SF 단편집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사이언스 픽션보다는 사이언스 판타지에 가깝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 미래에는 저런 일도 일어날 수 있겠지’라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불가능하면서도 믿기 힘든,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본문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현실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하고 답답하고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견고하기 때문에 우리가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견고하게만 보였던 현실에 난 균열을 발견한다. 그 균열을 추적하다 보면 발밑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던 현실 자체가 뒤집힌다. 비로소 알게 된 진실은 모르는 게 더 나았겠다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경악스럽다. 내가 단편 속 주인공들이라면 내가 잘못 본 거라고 무시해 버리거나 잊어버리고 현상 유지만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느 게 진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호기심에 손을 뻗어볼 것이다. 이런 공포와 매혹이 책 전반을 지배한다. 가가린이나 월명사처럼 유명한 실존 인물, 독재 정권 시절을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 같은 현실적인 요소들은, 이 기묘한 이야기들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그래서 ‘뭐 어차피 다 지어낸 이야기인데’ 하고 안전한 현실로 돌아오려는 독자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러니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진실이 드러날지 두려우면서도 궁금해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소설을 읽게 된다. 그런데 책 속 단편들 중 대부분이 뭔가 더 일어날 것 같은 데서 끝난다. 누군가 ‘쌀 한 바가지를 쏟았는데 다 냉장고 밑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라고 이 책을 평했는데, 그 표현이 딱 맞는다고 느꼈다. 진실의 전모를 밝히지 않아 더 많은 상상과 공포, 신비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뒤로 이야기를 더 풀어갔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장편으로 발전시키면 좋지 않을까 싶은 단편들도 있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롭게 전개되지만, 정작 발단 부분에서 멈춘 느낌이라 호불호는 갈릴 것 같다.


  이런 아쉬움 때문인지 각 단편들을 연결해 보게 된다. 각기 다른 곳에 실렸던 단편들을 다시 모은 단편집이라, 각 단편들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실,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가 믿고 있는 것만큼이나 확고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작가의 태도는 모든 단편을 관통한다. 그런 데다 같은 등장인물(로 보이는 인물)이 화자로 등장하거나 소재가 겹치거나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는 단편들이 있으니, 책 속 단편들 모두가 작가가 만든 거대한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아예 연작으로 만들거나 연결 고리를 조금만 더 넣었어도 흥미롭지 않았을까 한다. 몇몇 단편들의 공통된 화자인 ‘민간조사관(외국에서는 사립 탐정이라고 한다)’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작가가 그렇게 못다 푼 이야기를 마저 풀어주지 않는다 해도, 각 단편에서 미처 다 풀리지 않은 이야기들은 ‘공간 서점’ 밑바닥에 숨은 진실처럼 책 속 어딘가에 숨어 자기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P. S. 1. 「꿈의 귀환」에서 가가린과 몰로디노프가 서로의 이름에 부칭을 붙여서 부르는데, 러시아인들의 언어 습관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러시아인의 이름과 성 사이에는 누구의 아들/딸임을 나타내는 호칭인 ‘부칭(父稱)’이 붙는데, 아버지의 이름이 ‘알렉산드르’인 남자는 ‘알렉산드로비치’, 여자는 ‘알렉산드로브나’, 아버지의 이름이 ‘니콜라이’인 남자는 ‘니콜라예비치’, 여자는 ‘니콜라예브나’인 식이다. 서로 예의를 차려야 하는 사이인 사람이나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의 이름에 부칭을 붙여 상대방을 부른다(예: 유리 알렉세예비치, 소피아 세묘노브나). 가가린과 몰로디노프는 피실험자와 실험자로서 공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처럼 부칭을 붙여서 상대방을 부르는 것이 맞다. 예전에 한 미국 작가의 단편에서 소련 정보요원이 상관을 부를 때 부칭을 붙이지 않는 것을 보고 몰입이 깨졌으니, 이런 디테일을 신경 쓰는 편이 좋다.

그런데 「오리진」에서 『고백록』의 저자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라고 하는데, 『고백록』의 저자는 고대 로마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다. 저자가 혼동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명백히 틀린 정보를 적은 것인지 모르겠다.


P. S. 2. 뒤표지에 실린 각 단편의 한 줄 소개에 스포일러가 있다. 뒤표지는 본문을 읽은 다음에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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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10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단편 수상작품집
이승훈 외 지음 / 마카롱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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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등단하지 않은 사람들이 주로 이 공모전에 응모할 테니 완성도를 걱정했는데,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 모두 문장과 구성이 깔끔했다. 심사평을 쓴 두 심사위원 모두 문장력이 부족한 작품들이 많았다고 지적한 것을 보면, 수천 편의 응모작 중 고르고 고른 다섯 편이기에 문장과 구성 같은 기본은 충분히 갖추었다. 작품성이 준수한 단편 드라마들을 소설로 읽는 느낌이라, 비슷한 소재의 작품끼리 묶어 옴니버스 드라마로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 다섯 단편에 대한 각각의 감상을 간단히 적어봤다.


이승훈-야구 규칙서 8장 '심판원에 대한 일반 지시'

  스포츠라고는 축구 A매치만 보고 야구는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라 이 단편을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다행히도 야구를 잘 몰라도 줄거리와 작가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하지만 야구를 잘 알았다면 주인공과 FF-001이 그토록 야구를 사랑하는 이유에 더 깊이 공감하고, 마지막 승부 판정에서의 긴박감을 더 잘 느꼈을 것 같다. 이야기 전개는 전형적인데 깔끔하다. 작가가 의도한 것만큼은 결말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했는데, 내가 스포츠에 큰 애정이 없어서 잘 공감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작가가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어떤 요소로 감정을 이끌어 낼지 예상이 되었고, 그 예상대로 소설이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김단한-울다

  밤바다처럼 고요하고 차분하다. 문장에는 군더더기가 없고, 물결 뒤에 물결이 이어지듯 SF와 SF가 아닌 부분이 이질감 없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순향과 울다의 캐릭터나 각자의 서사, 유대 관계를 담백하게 그려내면서도 여운을 남긴다. 그런데 제주도의 해녀를 소재로 한 소설이면서 제주도 방언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 의외다. 순향은 제주가 고향이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제주에서 자랐고, 해녀 삼촌들은 제주 토박이일 텐데. 어설프게 방언을 쓰느니 아예 표준어로만 대사를 쓰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지만, 제주 방언을 살려서 대사를 썼으면 제주 특유의 분위기와 현장감을 더 잘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전반적으로는 깔끔하게 잘 빚어진 작품이다.


고반하-인간다운 여름

  SF 청춘 로맨스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들이 겪는 현실은 만만치 않아서 씁쓸한 맛이 강하다. 이야기의 재미와 감동, 메시지를 다 갖췄는데 인간다움, 사랑, 우정 세 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 세 가지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인간으로서 인간이 아닌 이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함서경-too much love will kill you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고 난 후의 한국 사회를 꽤 현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겪은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디테일이다. '나'와 '앞집 남자'가 서로를 마음에 담게 되는 감정선이 섬세하게 그려져 몰입하게 됐다. '나'가 볼 수 없는 상황을 그려내기 위해 시점을 여러 번 바꾸는데, '나'의 감정과 시각에서 빠져나와 상황 자체를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에 필요한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시점이 여러 번 바뀌면 글이 산만해지기 쉬운데,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이 좋아서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피와 살점이 튀기는 이야기인데도 이렇게 고요하고 가슴 먹먹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 중 가장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강솟뿔-여보, 계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 중 유일하게 장르 소설이 아니다. 다섯 편 중 세 편이 로봇과 관련된 소설이라 이 단편에서도 주인공이 로봇 닭이라도 키우나 했는데, 나머지 네 편과 달리 일상의 단편을 뚝 떼어 온 듯한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을 그린 소설의 21세기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장기하의 노래 <싸구려 커피>의 눅눅하고 구질구질한 분위기를 소설로 그린다면 딱 이 소설 같을 것이다. 암울한 현실을 블랙코미디로 승화하는 유머 감각도 괜찮은 편이다.


그런데 심사위원 정해연 작가는 심사평에서 이 단편이 캐릭터가 살아 있는 작품이라고 했지만 그 평은 남자 캐릭터들에게만 해당한다. 이 단편에서 남자 캐릭터는 계속해서 재기를 꿈꾸지만 실패하는 영화 감독과 같은 이유로 방황하고 있기에 누구보다 그를 잘 이해하면서도 동족 혐오를 보이는 친구, 현자같이 지혜롭고 인생 경험이 많아 주인공을 도와주는 선배, 기회주의자 스타 배우까지 다양하지만 여자 캐릭터들은 그저 남자 캐릭터들의 암울한 현재와 더 암울해 보이는 미래를 참다 못해 현실을 찾아가는 여자친구들일 뿐이다. 현실의 여자가 아니라 많은 노래와 소설 속의 '나를 버리고 더 조건 좋은 남자한테 가버린 나쁜 여자'를 소설 속에 옮겨놓은 것 같다. 수십 페이지밖에 안 되는 단편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하기에는 바로 앞에 실린 「too much love will kill you」가 한두 장면만으로도 두 여자 캐릭터의 매력과 개성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게다가 오래 사귀었고 정이 많이 들었다는 이유로, 미래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는 남자친구와 결혼하겠다고 (임신하려고) 콘돔도 없이 관계를 가지려고 먼저 달려드는 여자친구 캐릭터는 비현실적이다.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을 걱정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미래도 없어도 내가 좋다고, 내 아이를 갖고 싶다고 먼저 내게 달려드는 여자는 판타지다.


반려 닭 '여보 계'와의 우정이 더 전하게 그려졌으면 좋겠다는 심사평에도 공감하지만, 이 소설에서 여보 계 자체가 주인공에게 소중했다기보다는 주인공에게 삶의 의지를 이끌어 내는 매개체였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앞에서 말한 납작한 여성 캐릭터가, 생각보다는 약한 여보 계와의 우정보다 더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책에 실린 다섯 단편 중 가장 아쉬웠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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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방의 미친 여자들 - 여성 잔혹사에 맞선 우리 고전 속 여성 영웅 열전
전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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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다 포기한 일본 고전 소설 『겐지 이야기』를 다시 읽고 있다. 옛날 어느 천황의 아들인 주인공 겐지가 벌이는 연애 행각을 그린 소설인데, 여성 캐릭터 각각의 개성을 잘 살렸다지만 작가나 현대 일본어로 옮긴 번역자나 (둘 다 여성임에도) 여성 캐릭터들을 진열장에 놓인 예쁜 인형들처럼 취급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느끼한 것을 먹고 나면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 마시고 싶어지는 것처럼, 도무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여성 캐릭터들을 보니, 인형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으로 느껴지는 여성 캐릭터들을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우리 고전 소설 속 여성 영웅들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느 이야기에서나 영웅은 시련을 겪지만, 고전 소설 속 여성 영웅들은 남성 영웅들에게는 없는 제약을 하나 더 받게 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바로 가부장제에서의 성차별이다. 이들은 함께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보다 능력이 뛰어나도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의무에 묶이거나, 가족에게 학대당하고, 심지어 가족에게 버려지거나 살해당하기까지 한다. 저자는 우리 신화나 고전 소설 속에서 가부장제의 억압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파헤쳐 보고, 그 허울과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예를 들어, <사씨남정기>는 남성 저자가 당대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려고 쓴 소설이고, 여주인공은 가부장제의 이상적인 여성상 그 자체다. 작가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그런 완벽한 여성도 남편의 애정에 따라 운명이 뒤바뀌는 모습을 통해 가부장제의 이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인지 드러난다. 여성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소설들에서도 여주인공의 남편은 '착한' 첩이나 후처를 얻어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고, 여주인공이 겪는 고난을 방조한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은 처벌받기는커녕 여주인공이 얻은 성과를 누리며 편안히 여생을 보낸다. 이렇게 작가가 당대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드러나는 부분이 오히려 그 시대의 한계를 보여준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법 체계도 바뀌었지만, 가부장제 아래에서의 편견과 성차별은 시대를 뛰어넘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에서도 이야기에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저자는 고전 소설 속 여성들이 겪는 수난사를 보여주고, 그 원인이 되는 가부장제의 문제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신을 가둬둔 규방 문을 박차고 담장을 뛰어넘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여성 영웅들의 서사들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이들은 남장을 하고 성별을 감추어 자신의 능력으로 사회적 성취를 이룬다. 이들도 여성임이 드러나면 남성인 줄 알았을 때 자신을 존중했던 사람들에게 곧바로 무시당하고, '여자로서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혼인을 강요당한다. 혼인을 하고 나서는 남편이 자기 권위를 내세우거나 첩을 들이는 것까지 봐야 한다.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여전히 그들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군주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군주 개인의 시혜적인 행동일 뿐 그들을 둘러싼 현실을 변하지 않는다. 그런 현실과 타협하는 여성 영웅들도 있지만, 그들이 당시 여성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래도 여주인공들이 기껏 큰 업적을 쌓고 높은 자리에 올라도, 여자의 도리를 지켜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혼인하게 되는 이야기, 혼인하고 나서 남편이나 남편의 첩, 시댁 식구들과 갈등하며 마음 고생하는 이야기는 지겹다고 느낄 수 있다. 저자는 책 마지막에 그런 틀을 깨고 한 걸음 더 나아간 소설을 소개한다. 바로 <방한림전>이다. 주인공 방관주의 부모는 딸의 총명함을 보고 여자로 태어난 것이 안타까워, 친척들에게도 방관주가 딸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아들로 키운다. 그런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방관주는 계속 남자로 살아가기로 선택한다. 방관주는 어린 나이에 장원 급제해 일찍부터 관직을 얻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 하지만 남자 행세를 하면서 아내를 얻지 않으면 의심을 받을 테니 걱정하는데, 병부상서의 딸 영혜빙이 방관주가 여자라는 것을 알아채고 부부로 행세하면서 평생지기로 살아가자고 제안한다. 둘은 금슬 좋게 지내면서 총명한 아이를 입양하고, 그 아이도 훌륭한 인재로 키워낸다. '음양의 도리를 어겼다'는 이유로 방관주가 서른아홉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방관주가 전생에 남성 신이었는데 방자하다는 이유로 '여자로 태어나는 벌'을 받은 것이라는 데서 당시의 가치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성 부부가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자녀를 입양해 이상적인 가족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생활 동반자법도 아직 통과되지 못한 현대 대한민국을 뛰어넘는 진보성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여성 서사들이 여성 소비자들의 주목을 받으며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더 많은 여성 서사가 필요하다. 아직도 어머니나 연인, 냉장고 속의 피해자에 그치는 여성 캐릭터들이 많으며, 현실에서 살아남고 꿈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여성들에게 여성 영웅들은 용기와 희망을 주고 역할 모델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저자가 우리 신화와 고전 소설 속에서 꺼낸 여성 영웅들의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지만 우리가 현실 너머의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데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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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클래식 클라우드 10
허연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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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에만 읽겠다고 마음 먹은 책이 있다. 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에서 『설국』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설국』과 그 배경이 된 에치고유자와 여행기의 비중이 꽤 큰 데다 책의 도입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면서 걷다가는 (전봇대의) 전깃줄에 목이 걸린다는' 에치고유자와의 폭설. 그 안에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저자도 일부러 눈이 올 때를 기다려 에치고유자와에 갔다니 이 책을 눈 오는 날에 읽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책을 사고 4년이나 지나서야 이 책을 다 읽었지만. 눈 오는 날에 조금씩 읽다 눈이 많이 오던 지난 달 어느 날 드디어 이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눈이 오는 오늘 이 글을 쓰고 여기에 올린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 지금까지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을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고 나서 그의 문학 세계에 들어갔다 빠져나온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인생 여정과 문학 세계, 그 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들을 여행한 감상을 촘촘하게 엮어나가기 때문이다. 바느질한 자국도 보이지 않고 눈이 녹아 스며들 듯이. 책장을 덮고 나니 저자와 함께 눈 내리는 겨울날 일본 곳곳을 여행하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흔적을 찾아 다니다 온 것 같다.

저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 세계를 두 단어로 요약한다. '섬세한 허무'. 가와바타가 태어났을 때부터 소년 시절까지 가족들의 죽음이 이어졌고, 청년 시절에는 첫사랑이 이유도 말하지 않고 떠났다. 슬픔과 이별이 지배했던 성장기를 보냈기에 그는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남들보다 일찍 깨달았고, 환희와 분노, 선과 악을 넘어서서 그가 닿은 곳은 허무였다.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재미있는 서사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에 인용된 가와바타의 묘사들만 읽어도 그가 섬세하게 그려내는 허무에 압도되었다. 눈으로 온통 하얗게 물든 세상 앞에 선 기분이었다.

적막한 설원의 아름다움에는 매번 매혹될 수밖에 없지만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우리가 돌아올 곳은 결국 따뜻한 집과 사람들이 있는 세상이니까. 가와바타의 단편 한 편도 안 읽어보고 말하기에 우습지만, 내가 저자의 설명을 통해 짐작한 가와바타의 문학 속 세계는 그런 설원과 같다. 나는 선문답 같은 가와바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보다는 일본이 아시아인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비판하는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 더 공감한다. 섬세한 허무의 극한까지 파고드는 가와바타의 묘사는 매혹적이지만, 문학과 삶이 별개가 아니라는 신념 아래 사회 비판적인 작품들을 쓰고 직접 행동했던 오에의 행보를 지지한다(사실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도 한 편 안 읽어봤으면서 이러는 것이 우습지만). 내게도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허무보다는 삶을 지향하니까. 그럼에도 분주하고 복잡한 현실 세계에 지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 속 세계에 잠시 머물다 돌아오게 될 것 같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섬세한 허무와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가 이 정도면 됐다고 느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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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클래식 수업 4 - 헨델, 멈출 수 없는 노래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4
민은기 지음, 강한 그림 / 사회평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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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의 음악뿐 아니라, 평생 음악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그의 삶을 알게 됐다.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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