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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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을 규정짓는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청춘은 이미 훌쩍 자라버린 어색해진 제 껍데기를 끌어안은 채 붙박여 멈춰 서 버린 낯선 느낌이며, 갈피를 잃은 정신을 가다듬는 혼란의 숨 가쁜 상태로 그려지곤 한다. 누구나 청춘의 뜨거움에 질식하고 때론 그 청춘이 죽을 만큼 힘겹게 덮쳐 오는 불편한 정경에 목말라 한다. 그런데도 지나고 보면 그때 그 시절만큼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때도 없다. 이처럼 청춘의 열병은 젊음을 시샘하는 삶의 통과의례처럼 빗나간 육신과 마음을 다듬고 깎아 제자리에 맞추는 조탁의 과정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청춘은 홧홧한 열정의 에너지를 쉼 없이 발산하고 방황도 때로는 동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래서 일까? 세상을 향한 청춘의 몸짓은 서툴고 어색하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삶에서 결락된 무언가를 찾는 여정이 지상과제인양 삶의 이상理想이 되기도 하는 것을 빈번하게 목격한다.




        그렇기에 청춘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꽃처럼 화려하기도 눈꽃처럼 시리기도 하다. 세상은 무언가 정체모를 이물감이 어딘가에 탁 걸려 그 답답함으로 인해 온몸으로 번지는 막연한 불안처럼 냉소적이고 허무하다. 어쩌면 청춘이 이방인의 고독에 어울리는 멜랑콜리의 입맞춤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청춘은 푸르른 몸짓만큼 회복도 생기도 충만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이별, 사랑, 연민, 상처는 새살이 돋고 아물기를 반복하다 보면 그 젊음에 후회가 될지언정 습관처럼 회고하고 읊조리는 시절이 찾아든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과 타협이 될 수도 포옹이 될 수도 있겠으나 누구나 거쳐 야 할, 건너야 할 통과제의가 아니겠는가.




        신경숙 작가의 이 책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내게 그렇게 읽힌다. 존재의 상실을 통한 아픔과 부재에 대한 허망한 교태가 합작한 청춘의 출발선에 선 가녀린 영혼들의 절규와 같이 살처럼 콕콕 날아 와 박힌다. 오염된 세상의 파편에 쓰러지고 울부짖는 청춘의 뜨거운 몸부림은 위태롭다. 세대의 접경지대에 선 청춘은 오르페우스적 욕망에 사로잡히고 교차된 혼돈의 무게에 힘겨워한다. 성장의 순간은 아픔을 딛고 일어선다고는 하지만 산화되지 못한 슬픔은 미래의 시간마저 과거의 자리에 포위당하고 말 것처럼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설계된 대로 흐르지 못하는 삶의 불가해성으로부터 이어지는 정체성의 혼란은 현기증이 난다. 그것이 누구나 짊어진 원죄에 대한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처럼 처참하고 가혹하다면 청춘은 또한 아련해진다.




        신경숙 작가는 사랑을 통해 청춘을 위무했다. 긴장이 도처에 떠돌고 아픔이 곳곳에 지뢰밭처럼 묻혀 있던 그 독재의 시절, 청춘을 노래했다. 작가의 눈을 통해 재단된 청춘은 문장의 행간을 이어주고 공감을 유도한다. 이미 전작 <엄마를 부탁해>로 눈물샘을 말려 버린 그녀의 필력이기에 달리 썰을 풀어낸다는 것은 중언부언처럼 민망하다. 그래서 온전히 나는 그녀의 시선을 쫓아 생각이 머무는 곳에 안주하기로 했다. 그녀가 설정한 젊은 영혼들의 외침에 동참하고 세파의 부침에 맞서고 싶은 충동이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2000. 민음사.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에서)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껍질을 벗어야 한다. 청춘은, 누구에게나 겪고 방황하고 또 상처받는 시기가 있다. 청춘의 기록은 그래서 치열하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신경숙 작가의 글은 페이소스처럼 정열적이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p.291)




        소설은 화두를 던진다. 청춘에 대해. 신경숙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던진 화두는 크리스토프의 명제에 오롯이 담겼다. 소설 속 인물인 윤, 단, 명서, 미루를 가로지르며 관통해 나가며 깃든 삶의 무게는 크리스토프를 통해 인식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짊어진 어깨 위 아이의 무게를 홀로 감내하는 우리의 모습이자 고독의 항체처럼 질긴 운명인지 모른다. 오늘을 잊지 말자는 자조 섞인 희망에서 슬픔을 극복해 낸 순간의 떨리는 윤의 바람처럼 나는 그들과 연대감으로 묶였다. 이따금 삶은 날 선 세상에 아프고 뜨겁다. 고통은 삶을 무두질하며 신열이 열꽃처럼 번져 오르기도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흡수되고 소실된다. 역설적이게도 고통은 삶의 좌절과 절망을 구분 짓는 힘이 되기도 한다. 힘은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고 희망이 된다. 타성에 젖지 않은 순수의 청춘이 사무치게 아름다운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크리스토프의 메타포는 세상에 맞서는 자세이며 자아를 찾는 과정의 일환이다. 




        소설 속 윤은 어머니를 잃었다. 아픔이 오래도록 침전되어 빛을 상실했다. 존재의 상실에 대한 아픔은 윤에게 트라우마다. 도시에 나와 옥탑 방에 기거하면서부터 걷기 시작한 행위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의 그림자를 뒤쫓는 과정을 통해 번민하고 슬퍼함으로써 결국에는 그것을 끌어안는 행위로 새겨진다. 걷는다는 것은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가늠하게 된다. 누군가를 만나든 어딘가로 이어지든 길은 걷기를 동행하는 벗이다. 윤에게 걷기는 씻김과 떠나보내기의 과정쯤으로 보아진다. 그러므로 명서가 윤에게 이어지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인간은 감정이 침잠하고 가라앉을 때 방심한다. 방심은 긴장을 놓고 의지하려는 마음이 앞서며 아픔을 나누고픈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렇게 윤에게는 명서와 아픔을 연대하고 서로의 틈입 사이로 밀어 넣는 관계로 발전한다. 반면 미루는 언니를 잃었다. 미루에게 언니는 세상이었고 존재 그 자체였다. 그 옛날 외할머니 댁을 찾았다 닥쳐든 뜻밖의 사고로 인해 무릎을 다친 언니의 추락을 지켜보는 것은 미루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일로 인해 빛을 잃어 버린 별처럼 침몰하기만 하던 언니는 어느 남자를 만나고 서야 안정과 행복을 되찾게 된다. 그런데 행복은 길지 않았다. 남자의 실종, 사회적 타살 소식에 언니는 분신자살로 맞서고 미루의 손에 지울 수 없는 상실의 기억을 아로 새기게 된다.




        윤에게 단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이어주는 길목에서 만난 풋풋한 관계다. 윤이 어머니를 잃은 아픔으로 방황할 때 단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단은 먼발치에서 윤을 지지하고 윤의 앞에 나서 길을 가는 방해물을 제거하고 등불이 되어주는 역할을 자청했다. 하지만 윤과 단은 친구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단이 불합리한 제도에 맞서 방황할 때 윤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단은 내성적이었지만 굳건했고 순수했다. 그러나 단의 순수는 오염된 현실에 내 버려진 가녀린 존재에 불과했으며 이방인으로 내모는 구실이 되었다. 단의 내몰림은 그렇게 총기자살을 가장한 도피로 이어지며 청춘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이렇게 단과 윤의 관계는 비이성적인 영역에 머문다. 기다리는 사랑은 피를 말리고 허파를 타들어가게 하는 아픔이다. 나는 단과 윤이 맺어지기를 은연중에 바랬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가 던진 화두를 푸는 키워드는 아님을 또한 일찌감치 알아챘다. 이 또한 삶의 단면임을 말이다.




        다시 돌아가서 명서와 윤의 관계가 낙관적이지 못했음은 그 시대의 비릿한 울분과 상황이 만든 아픔임을 비로써 인식하게 된다. 또한 윤에게 미루는 거울과 같은 존재였다. 미루가 언니의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실종된 언니의 남자를 찾아 헤매는 것도, 윤이 걷는 것도 닮았다. 그들의 이동은 회피의 수단이라기보다 맞서서 찾는 본성의 감정에 충실한 흔적이다. 작가의 의도적인 설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아픔을 연대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랑의 오묘한 진실을 찾는 여정은 어딘지 모르게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그 마음과 닿아있다. 그래서 윤과 명서는 서로에게 다가가기를 바랐으며 명서가 미루를 잃은 절박한 심정을 위로하고 제 것인 양 끌어안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가 그쪽으로 갈게. 건너간다는 의미는 피안과 차안의 경계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그쪽으로 간다는 말은 고독 속에 뒹구는 영혼을 끌어안겠다는 포용의 시도처럼 들린다. 더불어 희망 섞인 바람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크리스토프를 언급한 윤 교수의 존재는 젊음을 인도하는 길잡이처럼 그려진다.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 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p-354)  원망도 미움도 열정도 시간 앞에서는 허무하고 부질없다. 윤 교수를 통해 작가는 내면의 변화를 관찰하고 보다 깊이 있게 삶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마치 한 순간 암전 후 찾아드는 광명처럼 윤 교수의 말은 새록새록 마음으로 새겨진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된 자아를 찾는 탈출구가 되며 충실한 삶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삶은 어디서든 계속된다는 말처럼 별빛처럼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경숙 작가의 이 소설은 성장소설을 표방한 세태소설이다. 어두운 시절을 통과한 젊음 이들의 사랑을 간결하게 빗어 낸 문장들은 읽는 이의 마음을 공명하게 한다. 윤과 단, 명서와 미루를 통해 세상이 할퀴고 간 트라우마의 흔적과 극복의 과정을 공감하게 되고 하나의 지향점을 만들며 성장해 간다는 이치를 배우게 된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처럼 희망이 울려 퍼지고 기쁨과 환희가 커져가기를 작가의 프리즘을 통해 드려다 보았다. 슬픔보다는 기쁨에 저울추가 기울어지기를 바랐다는 신경숙 작가의 바람은 이 책을 통해 충실한 성공작이 되지 않을까 한다. 누구나 쓰리고 아픈 기억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안고 살기 마련이므로 세상과 용서하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소망해 본다. 작가의 여명의 바람처럼 모두 뜨겁게 달궈 굳어진 손 위의 돌을 내려놓고 낙관의 희열을 만끽하게 되기를 말이다. 용서는 자신과 하는 약속이며 삶을 바로 세우는 균형추에 다름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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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8-30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민과 용서를 지나야 성장이 오는걸거예요.^^

穀雨(곡우) 2010-08-30 09:54   좋아요 0 | URL
마기님, 오랜만이네요.
이제 수면위로 나오신건가요...^^

연민과 용서를 지나야 성장이 온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yamoo 2010-08-30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신경숙 작가의 작품은 읽지 않습니다만...이 리뷰는 추천을 안하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요~
넘 잘 봤습니다~

穀雨(곡우) 2010-08-31 00:01   좋아요 0 | URL
야무님, 추천 감사합니다.
소설은 안 읽으시나 봅니다.^^

yamoo 2010-09-02 10:12   좋아요 0 | URL
소설은 그리 자주 읽는 편은 아니지만 꽂히는 작가 위주로 읽습니다.. 신경숙 작가 작품은 멀리합니다..ㅎㅎ
 
마법천자문 단어마법篇 1 (본권 + 워크북 + 카드) - 몰아쳐라, 돌개바람! 돌풍(突風) ㅣ 마법천자문 단어마법篇 1
김현수 지음, 호야 그림, 파프리카 채색, 김창환 감수 / 아울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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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글을 읽고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신비롭다는 생각이 앞선다. 언어에 대한 배움은 요식 화된 절차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마냥 신기하다. 불과 몇 마디에 불과하던 단어를 하나둘 내 뱉더니 어느새 문장이 되고 글이 된다. 가만 생각해 보면 학습은 반복에 의한 산물임을 몸으로 기억하는지 모른다. 미국의 유명한 자기 계발작가 말콤 글래드웰은 1만 시간의 법칙을 발견했다. 성공의 키워드는 반복된 연습이라는 이치다. 그러니 개념을 익히고 뜻을 터득하기 전에 아이는 이미 반복된 노출과 학습에 의해 몸으로 깨우쳤다는 소리겠다.




최근 몇 해 들어 학습과 일러스트를 결합한 학습만화가 범람한다. 만화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보다 자칫 나무만을 보다 산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까 싶어 일부러 밀쳐 두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아주 우연찮은 기회에 서점 나들이에 아이가 집어 든 한자만화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이는 한자의 음과 훈을 카드를 통해 연상하고 기억하더니 일러스트의 화려한 그래픽과 이미지에 결부되어 오래도록 빠져 들었다. 1차적인 학습의 고무적인 현상인 몰입의 효과는 극대화한 셈이다.




뒤이어 한 권 두 권 시리즈물이 발간될 때마다 손에 거머쥐고 틈날 때마다 들춰 보더니 급기야는 카드놀이로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카드에 적힌 한자의 음을 말하고 훈을 알게 되고 어떻게 적용되는지도 주도적으로 장악했다. 이 책이 잘 알려진 아울북의 <마법천자문>시리즈다. 마법처럼 깨우친다는 것은 반복을 전제로 하지만 아이의 반짝이는 눈과 오물거리는 입에서 튀어 나오는 한자의 향연은 천자문을 깨우친 그 옛날 아이의 감흥과 일치하지 싶다.




이렇게 한자를 통해 단어를 유추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즈음 <마법천자문 단어편>이 출시되었다. 예상한 대로 전편에 등장하던 내용을 연계해서 손오공과 해왕 족과의 한자승부를 겨룬다는 스토리다. 실제 <마법천자문>시리즈가 계속해서 인기를 이어가는 비결 중의 하나가 탄탄한 스토리텔링이다. 분명한 권선징악의 대립적 구조, 모험심을 심어주는 판타지 요소 등이 적절하게 가미되어 아이가 생각주머니를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아울러 별첨으로 소개된 워크북을 단계에 맞게 활용하면 학습효과가 배가되기는 하겠으나 괜한 구속으로 이어질까 사용하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잘 만들어진 책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탄탄하고 알찬 책이라도 아직 개념이 무른 아이에게는 부모의 관심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일일이 암기하고 외우기를 강요하기 보다는 재미를 붙이게 해서 자연스럽게 개념의 틀을 익힐 수 있는 토양을 배양시켜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흥미는 곧 재미를 몰고 오며 재미는 배움으로 돌아온다. 주도적인 학습과 창의적인 사고에 직접적인 학습만화가 부정적인 의견이 지배적인 것이 사실이나 흥미와 재미를 키우는 데 만화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아이의 독서습관은 부모가 만든다는 말은 명심한다면 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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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혁명 - 지구와 평화롭게 지내기
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박종일 옮김 / 인간사랑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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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새로운 터전 위에서 일어서리라.

이전에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나

이제는 우리가 모든 것이 되리라.

 

-P.319 인터내셔날가의 한 소절-

 

 

흔히 환경오염의 원인에 대해 무분별한 화석연료의 사용, 울창한 산림남벌, 도시의 광역화, 화학배합물질의 사용 등을 꼽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따른 결과는 생태계의 교란으로 이어지고 지구는 점점 더 따뜻해지는 온난화로 이행된다. 마크 라이너스가 지은 <6도의 악몽>은 살벌하고도 무섭게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날린다. 최악의 환경대재앙에 대한 실현가능성은 마치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선다. 하지만 지구는 그 예전 원시생태와는 엄청나게 달라졌으며 변화의 유속 또한 증폭된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환경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은 재고되고 바뀌어야 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의 부연설명은 필요치 않는다. 물론 지구 온난화의 허점을 파고들어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는 지구의 순환이라는 반대론자의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너무 더워져 버린 지구라는 인식은 이미 깊숙이 각인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껏 지구 온난화와 생태변화에 대해 접근한 방식은 과학적인 사고에 의한 예측적 기후모델에 의한 결과의 산물이다. 유한한 자원에 대한 활용과 분배에 대한 헤게모니는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왔지만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오류를 극복할 해결책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이익에 대한 분배의 과정을 경제적이고 이성적인 합리성을 요구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성적 합리성은 냉철한 가슴을 지닌 정온(定溫)적 인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윤의 창출과정은 지속가능한 범주의 개념을 모두 경제적인 시스템으로 해석하며, 자본주의는 과실의 분배보다 이익의 창출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는 얼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분배의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시스템을 애초에 포기하였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분배의 평등의 해결수단으로 정부의 역할과 비중을 더욱 싣게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고유한 창조력, 즉 노동에 핵심적 가치를 심는다. 노동은 유한계급의 구별을 철폐하고 자본소외에 대한 이상향이 바로 유토피아라는 사상을 내세웠다. 마르크스는 물질에 대한 의존이 불가피하다는 관념인 유물론에 입각하였으며 단계별 상호작용에 의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따른 변증법적 역사관을 지녔다. 마르크스는 이상향에 가까운 이데올로기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레닌에 의하여 노동자계급의 자발적 수행능력을 철저하게 부인하는 등 혁명가에 의한 체계적인 지배를 역설하며 심각하게 변질되는 수모를 겪었다.

 

앞서의 두 가지의 이데올로기는 태동부터 다르며 사물을 대하는 관념의 틀조차 상이하게 다르다. 자본주의가 자연을 지배적이고 정복 내지는 수복 가능한 개념으로 이해했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자연과의 조화, 나아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인정하였다. 실제 과학의 발전 또한 자본주의에 편승하였음은 주지한 사실과 같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 존 벨라미 포스터의 <생태혁명>은 기존의 범람하는 이론과 학설과는 판이 다른 거시적인 안목의 보고서에 다름 아니다.

 

총3부로 나뉘어 지구의 실상과 환경개혁실패에 대한 사례를 소개하고 마르크스의 이념과 시스템을 통해 모순의 본질을 파헤친다. 끝으로 생태혁명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며 지속가능성, 공동체, 그리고 평등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주장을 펼친다. 

 

책은 저자의 통렬한 함의와 주장의 산물인 본질적 가치에 비해 난해하다. 학술적인 내용이 곳곳에 배치되어 일반 독자가 읽어 내기에는 쉽지 않다. 생태의 문제에 더 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념을 알지 못하고는 가독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조밀조밀하게 얽힌 내용을 보다 넓은 시각으로 커다란 줄기를 잡아채듯 나아간다면 전혀 다른 새로움이 기다린다. 매몰된 가치에 대한 반향에서 탁 튕겨 나와 내려다보는 원경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적 가치는 관점의 변화에 있다. 새로운 환경주의의 패러다임과 인간면제주의의 패러다임(캐튼과 던랩의 관점, P.268)에 근거한 이분법적인 오류를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와 자연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의 질(지속가능성)에 관하여 인간과 자연과의 신진대사균열이론에 의해 접근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주의로 이행하여야 하며 이행의 본질은 인간 자체를 혁명하는 혁명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설파한다. 실제 이와 같은 실험적 하회주의는 볼리비아의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에 의해 열렬히 환영받았다. 이는 <빼앗긴 대지의 꿈>의 저자 장 지글러의 책에서도 언급이 되었으며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가능성을 엿보는 대목이다.

 

이렇듯 존 벨라미 포스터의 생각의 총체는 혁신적이고 신선하다. 자본주의의 결핍과 모순에 좌초된 생태혁명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을 새롭게 구성했다는 성공이다. 다채로운 사고와 대립된 이념이 충돌하는 혼돈의 중심이라 할지라도 풀어 헤쳐 보면 의외로 단순한 결과가 도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접근의 통념을 걷어내고 단순한 도식으로 풀어보면 인간과 자연은 공생의 관계, 즉 지속가능성의 범주의 한 묶음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진실과 조우하게 된다. 결국 이념을 넘어 생태혁명을 위한 성공적인 수단은 탐욕을 경계하고 분배와 평등의 관계로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을 대할 때 가능한 일이 아니겠냐는 저자의 주장은 곱씹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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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오랜 세월입니다. 거뭇거뭇 수염이 웃자라기 시작하던 때부터 만나 지금껏 모임을 이어오는 친구들과 어제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각양각색의 성격을 가진 친구들과 모임을 이어간다는 것은 때론 위태하기도 하고 때론 숨가쁘기도 합니다.
 

세월이 더디 가기만 하던 그 시절과 지금 현재의 속도는 확연히 다릅니다. 빠르다는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마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마음,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습니다. 존재도 형체도 없는 그 마음이 지금껏 우리들 곁을 지키고 섰습니다. 
 

어제는 유독 자주 만나지 못했던 K가 눈에 밟힙니다. K는 다부진 체격에 구리빛으로 그을린 단단한 성격을 가진 친구입니다.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악착같이 달라 붙기도 하지만 외골수의 고집으로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그런 성격탓에 K는 다른 친구들보다 삶의 진동이 컸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좋아 보입니다.
 

호탕하게 웃어 젖히며 세파의 굴곡을 넘나든 K는 갈피를 잡지 못하던 삶의 방향추를 단단히 옭아 맺습니다. K에게서는 잃어 버렸던 자신감이 흐려졌던 진정성이 묻어 납니다. K는 ROTC를 임관하고 제대 후 잦은 이직과 이혼 후 현재 용접일을 하는 기술자로 땀 흘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K와 이혼 했던 전처와 화해하고 재결합해서 인생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음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통감했음을 눈빛으로 전해져 옵니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수많은 가지 중 하나에 불과하겠지만 그 친구들의 이야기에 더위도 잊고 불콰하게 달궈진 기분이 마냥 좋기만 합니다. 사는 것이 바빠 만남이 소원했던 모임을 계속 갖자고도 하였고 엉켜 뒹굴던 그 시절처럼 만나자는 기약없는 약속이 오고갑니다. 후덥한 공기를 가르고 피어 오르는 친구의 속 깊은 마음이 청량감을 주듯 유쾌하기만 합니다.     

마음은 그런가 봅니다. 세월의 격랑에 깨지고 구르고 넘어지다 보니 마음이 온전할리 없습니다. 하지만 친구들 곁에 오롯이 서 있던 그 마음이 닳고 헤어진 마음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고 잊어 버렸던 웃음을 채워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통한다는 말, 듣기만 해도 흐뭇합니다. 친구는 오래될 수록 좋고 멀리서 찾아 오니 얼마나 기쁘겠냐는 공자의 의중을 조금은 헤아려 봅니다. 

 

 

그 마음을 전 우정이라고

되새겨 봅니다.

 

친구야!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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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8-19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에 깨지고 구르고 넘어지고... 그래서 상처받고... 그런데 요즘은
제가 세월 때문에 좀더 말랑말랑해지고, 각진 곳은 둥글게 닳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면이 꼭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도 합니다~

친구 만남... 즐거우셨겠어요. 저두 동기 모임하자고 졸라봐야겠습니다.

穀雨(곡우) 2010-08-19 17:59   좋아요 0 | URL
음, 그러네요. 닳다보면 둥글 둥글해지겠죠.
제 모토가 둥글게 둥글게 거든요...^^

blanca 2010-08-19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 그런데 저 헷갈렸어요^^;; 옆지기님이랑 같이 쓰시는 건가요? 저는 여자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우케 된 거죠? 제가 완전 잘못 짚었었나요?

우정은....아, 저는 고등동창모임이 있는데 지금 조금 위기 상황이랍니다. 다들 한창 바쁠 때라 그런지 서로 한 번씩 놓치고 그러다 보니 서운함이 쌓이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지...자꾸 고등학교 시절의 그 순수한 우정을 그리워하고 그때만큼 나한테 안해준다고 좁은 마음을 가지게 되니 더 힘들어지는 거겠죠...관계도 세월에 따라 포기할 건 포기하고 배려할 건 배려해야 하는데 수련을 조금 더 쌓아야 겠어요...

穀雨(곡우) 2010-08-19 23:59   좋아요 0 | URL
아....어찌....전 줄곧 남자였고 앞으로도 그럴텐데...^^
제 글이 여성스러웠나요? 아님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킬 대목이라도......


세실 2010-08-25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 친구들 넷이서 모임을 하는데 참 편안하더라구요.
이혼한 친구도 있지만 아들과 둘이 잘 살고 있는 모습 보면 다행스럽기도 하고, 전남편과 재결합했으면 하지만 전혀 생각이 없네요.
그렇게 나이들어 가는게 인생인가 보아요^*^

穀雨(곡우) 2010-08-25 20:21   좋아요 0 | URL
사실 그 친구, 이혼하고 한 때 방황하는 통에 재결합했음 했거든요. 물론 지금이야 잘 지내지만 인연이 없음 그것도 억지로 이어진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닐거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해서 전 늘 둥글게 둥글게 사는 게 제 인생의 모토입니다. 둥글게...~~^^
 

밤새 옆지기가 꿈에 시달렸다. 꿈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낯선 어느 곳에서 물고기를 잡는 행사가 있었다. 이미 길게 뻗은 줄 사이로 앞 선 아이가 제 키보다 큰 잉어를 품에 안고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더란다. 이후 아내의 차례가 되어 물 속을 드려다보니 커다란 잉어, 표독스런 뱀, 열대관상어처럼 생긴 노란 물고기가 노니는 것을 보았나 보다. 아내는 평소 비린 것을 끔찍히도 싫어하는 터라 꿈에서도 그 성격이 고스란히 표출되었던 모양이다.

 

징그러운 마음도 잠시, 그렇게 잡아 올린 물고기는 열대관상어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노란 물고기. 그것도 2마리나. 그런데 품은 물고기를 엉겁결에 놓치고 말았다. 아내는 그 와중에도 한 번 더 커다란 뜰채로 물고기를 끌어 올렸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유유히 사라져 버린 물고기. 무엇을 예지하는 것일까?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꿈의 파편들을 끌어 모아 분석하는 작업을 다룬 책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프로이트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을 통해 일어났던 실제의 사례를 통해 일정한 가설을 만든다. 그는 해박한 정신분석의 연구를 통해 습득한 경험을 통해 꿈을 꾸는 이유, 꿈이 뻗어 나가는 궤적을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다룬다.

 
프로이드는 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과연 꿈의 가치는 미래를 예지하는 데 있을까? 물론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그 대신 꿈은 과거를 가르쳐준다고 하는 편이 더 옮은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꿈은 어떤 의미에서든 과거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p311)

 
 

프로이드에게 꿈은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의미한다. 억압되고 내재된 욕망이 의식의 뒷편에 숨은 또 다른 자아의 분출이고 표현이라는 말이다. 프로이드는 꿈을 성적인 욕망과도 매개했다. 모자를 쓴 중년신사의 중절모자란 특정사물이 남성의 성기를 비유하기도 한다. 이처럼 프로이트는 에고(자아), 이드(본능), 슈퍼에고(초자아)를 구별하고 억압당한 본능에 충실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며 얼토당토 않은 주장으로 매도 당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 책에서 꿈을 소망하고 왜곡된 재료를 바로잡은 성과는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본능을 일깨웠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전제로 한 모든 인간의 본성에 깃든 본능을 수면위로 끌어 올렸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꿈의 해석은 본성을 적확하게 드려다 보는 프리즘이었을 것이며 정신세계를 조밀하게 엿보는 확대경에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가 남긴 <꿈의 해석>은 난해하다. 광인의 언변처럼 믿기 힘든 사실을 단순하게 꿈에 나타난 재료를 통해 다듬고 가공한다는 것은 어딘지 모를 의구심을 낳는게 당연한 현상인지 모른다.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아내의 지난 밤 꿈이 무엇과 관련이 있는지 비추어 보았다. 아내는 현재 임신중이다. 잦은 입덧에 괴로워하고 무기력증을 호소한다. 그로 인해 유발되는 피로감, 신경증이 다른 곳으로 전이되는 중이다. 하지만 평소 너그럽고 여유로운 성격으로 인해 조금은 대립각을 세울 상황을 적절히 조절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과연 다소 해괴한 꿈의 의미는? 태몽으로 직결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네이버친구에게 문의한 결과 딱 맞아 떨어지는 즉답은 없다. 프로이트가 말했듯 예지로 이어지는 꿈은 모두 소망의 충족 또는 욕망의 표현이라는 관점을 유지한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이 꿈은 평소 비늘 덮인 물고기를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눈꺼풀이 없이 빤히 쳐다보는 생기없는 동공을 거부하는 아내의 행동을 보아서는 임신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축적된 상태인 모양이다. 이것은 태몽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나는 스트레스로 인한 정상의 상태를 갈망하는 불만의 무의식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물론 네이버친구의 신뢰할 수 없는 말에 의하면 재물운이라고도 하는데. 그럼, 아내에게 로또를 사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

 

p.s) 위 책은 지난 3월 시작해서 지금껏 읽고 있는 책이다. 한 순간에 몰아쳐 읽어 낼 성질의 책이 아니므로 천천히 곰삭혀 읽는 중.


p.s) 이 꿈이 무슨 뜻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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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8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9 0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8-19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권의 마지막 자리에서 놓치는 꿈? 아하하.. 죄송해여.

저는 꿈에 대한 해석은 프로이트보다 융의 이론이 더 맘에 들어요, 수긍도 가구여~

穀雨(곡우) 2010-08-19 18:00   좋아요 0 | URL
마지막 자리라도 3등인데, 그게 어딥니까...^^
저번에 3등 당첨되었을 때는 모르겠던데, 다시 또 되면 푸하핫^^
융도 한번 살펴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