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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혁명 - 지구와 평화롭게 지내기
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박종일 옮김 / 인간사랑 / 2010년 4월
평점 :
토지는 새로운 터전 위에서 일어서리라.
이전에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나
이제는 우리가 모든 것이 되리라.
-P.319 인터내셔날가의 한 소절-
흔히 환경오염의 원인에 대해 무분별한 화석연료의 사용, 울창한 산림남벌, 도시의 광역화, 화학배합물질의 사용 등을 꼽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따른 결과는 생태계의 교란으로 이어지고 지구는 점점 더 따뜻해지는 온난화로 이행된다. 마크 라이너스가 지은 <6도의 악몽>은 살벌하고도 무섭게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날린다. 최악의 환경대재앙에 대한 실현가능성은 마치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선다. 하지만 지구는 그 예전 원시생태와는 엄청나게 달라졌으며 변화의 유속 또한 증폭된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환경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은 재고되고 바뀌어야 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의 부연설명은 필요치 않는다. 물론 지구 온난화의 허점을 파고들어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는 지구의 순환이라는 반대론자의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너무 더워져 버린 지구라는 인식은 이미 깊숙이 각인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껏 지구 온난화와 생태변화에 대해 접근한 방식은 과학적인 사고에 의한 예측적 기후모델에 의한 결과의 산물이다. 유한한 자원에 대한 활용과 분배에 대한 헤게모니는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왔지만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오류를 극복할 해결책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이익에 대한 분배의 과정을 경제적이고 이성적인 합리성을 요구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성적 합리성은 냉철한 가슴을 지닌 정온(定溫)적 인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윤의 창출과정은 지속가능한 범주의 개념을 모두 경제적인 시스템으로 해석하며, 자본주의는 과실의 분배보다 이익의 창출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는 얼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분배의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시스템을 애초에 포기하였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분배의 평등의 해결수단으로 정부의 역할과 비중을 더욱 싣게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고유한 창조력, 즉 노동에 핵심적 가치를 심는다. 노동은 유한계급의 구별을 철폐하고 자본소외에 대한 이상향이 바로 유토피아라는 사상을 내세웠다. 마르크스는 물질에 대한 의존이 불가피하다는 관념인 유물론에 입각하였으며 단계별 상호작용에 의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따른 변증법적 역사관을 지녔다. 마르크스는 이상향에 가까운 이데올로기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레닌에 의하여 노동자계급의 자발적 수행능력을 철저하게 부인하는 등 혁명가에 의한 체계적인 지배를 역설하며 심각하게 변질되는 수모를 겪었다.
앞서의 두 가지의 이데올로기는 태동부터 다르며 사물을 대하는 관념의 틀조차 상이하게 다르다. 자본주의가 자연을 지배적이고 정복 내지는 수복 가능한 개념으로 이해했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자연과의 조화, 나아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인정하였다. 실제 과학의 발전 또한 자본주의에 편승하였음은 주지한 사실과 같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 존 벨라미 포스터의 <생태혁명>은 기존의 범람하는 이론과 학설과는 판이 다른 거시적인 안목의 보고서에 다름 아니다.
총3부로 나뉘어 지구의 실상과 환경개혁실패에 대한 사례를 소개하고 마르크스의 이념과 시스템을 통해 모순의 본질을 파헤친다. 끝으로 생태혁명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며 지속가능성, 공동체, 그리고 평등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주장을 펼친다.
책은 저자의 통렬한 함의와 주장의 산물인 본질적 가치에 비해 난해하다. 학술적인 내용이 곳곳에 배치되어 일반 독자가 읽어 내기에는 쉽지 않다. 생태의 문제에 더 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념을 알지 못하고는 가독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조밀조밀하게 얽힌 내용을 보다 넓은 시각으로 커다란 줄기를 잡아채듯 나아간다면 전혀 다른 새로움이 기다린다. 매몰된 가치에 대한 반향에서 탁 튕겨 나와 내려다보는 원경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적 가치는 관점의 변화에 있다. 새로운 환경주의의 패러다임과 인간면제주의의 패러다임(캐튼과 던랩의 관점, P.268)에 근거한 이분법적인 오류를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와 자연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의 질(지속가능성)에 관하여 인간과 자연과의 신진대사균열이론에 의해 접근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주의로 이행하여야 하며 이행의 본질은 인간 자체를 혁명하는 혁명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설파한다. 실제 이와 같은 실험적 하회주의는 볼리비아의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에 의해 열렬히 환영받았다. 이는 <빼앗긴 대지의 꿈>의 저자 장 지글러의 책에서도 언급이 되었으며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가능성을 엿보는 대목이다.
이렇듯 존 벨라미 포스터의 생각의 총체는 혁신적이고 신선하다. 자본주의의 결핍과 모순에 좌초된 생태혁명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을 새롭게 구성했다는 성공이다. 다채로운 사고와 대립된 이념이 충돌하는 혼돈의 중심이라 할지라도 풀어 헤쳐 보면 의외로 단순한 결과가 도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접근의 통념을 걷어내고 단순한 도식으로 풀어보면 인간과 자연은 공생의 관계, 즉 지속가능성의 범주의 한 묶음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진실과 조우하게 된다. 결국 이념을 넘어 생태혁명을 위한 성공적인 수단은 탐욕을 경계하고 분배와 평등의 관계로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을 대할 때 가능한 일이 아니겠냐는 저자의 주장은 곱씹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