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되었습니다 - 초보 아빠의 행복한 육아 일기
신동섭 지음 / 나무수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임신, 출산, 육아는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아이를 가졌을 때의 설렘, 기쁨, 두려움, 막막함이 교차되는 상황은 정의할 수 없는 자연스런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이 모든 우려를 종식하는 무엇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거룩하고 찬란한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아이와 교감하고 밀고 당기기의 시간을 시나브로 통과하다 보면 그 어떤 진귀하고 값진 것보다 귀중한 사랑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키워낸다는 행위의 정체는 8할이 인고의 시간을 요구합니다. 참고 견디고 기다려 주기의 미학을 새롭게 배워나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부모는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지워진 기억의 흔적을 복구하고 어떻게 자랐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겸허의 가치에 눈뜨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시 아이를 낳고 길러내 보아야 진정한 부모가 된다는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험난하고 희생의 시간만이 기다리지 않음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마른 논에 물들어 갈 때와 제 자식 입에 밥 들어 갈 때처럼 아이가 쑥쑥 자라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놀라운 시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뜻하지 않은 순간에 아이의 생글생글한 미소, 조합되지 못한 단어들 속에서 터져 나오는 '엄마', '아빠'의 지칭은 세상을 다 가진 기쁨과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단순한 행위의 모둠이 치열한 생존의 현장을 뚫고 나갈 힘을 그 속에서 보았을 부모로서의 기쁨이 무한히 클 테니 말입니다.

<아빠가 되었습니다>는 조금은 다른 소소하거나 투박한 아빠가 쓴 육아기록입니다. 주양육자가 아빠라는 합의나 선택이 사회적 인식을 허물기에 쉽지 않았음에도 누구보다 훌륭하게 아이를 키워낸 배울 점이 많은 에피소드입니다. 실제 아이를 계획하고 낳아 기를 때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 즉 경제적 저울대에 올라서서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불편한 진실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제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으며 아슬아슬한 위기의식이 도사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의 무게중심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의 값어치는 물질과 교환할 수 없는 가치명제를 떠올린다면 피할 수 없는 진실이겠지요. 그러니 아이를 하나, 둘 낳아 기른다는 것의 경제적 무게보다 자녀를 늘려갈수록 기울기의 중심 추는 행복의 가치 쪽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자녀를 가진 부모들에게 경제적 문제를 상쇄하고도 남을 가치가 있는지를 묻는다면 그것은 (경제적)가치의 문제가 아닌 (행복) 당위의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저 또한 세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불안한 상황이 그려지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아이를 키우는 것에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은 조금 불편한 정도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조금 더 나누고 무게를 줄이게 되며 신동섭 작가가 말한 타고난 아빠놀이터로서의 역할에 보다 더 충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삶에서 향유할 수 있는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됩니다. 시쳇말로 철이 든다는 것이겠지요.

그런 관점에서 작가가 경험한 문제를 되새겨 본다면 통과해 본 자만이 공유할 수 있는 안도감이라는 단단한 연대의식이 배어 있습니다. 기실 저의 부모세대들과는 달리 지금은 아이를 돌보는 행위에 대해 지나친 관심과 집착을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비싸고 값어치가 나가는 육아용품을 선호하게 되고 아이를 위험에서 격리시키려는 노력을 더 기울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관심이 지나쳐서 나쁠 것은 없지만 때로는 그것이 독이 되는 경우가 있음을 은지아빠(지은이)도 그렇고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경험해 보게 하는 도전적 상황이 중요합니다.

알면서도 애지중지하게 되는 것은 눈에 넣어도 아플지 않을 만큼 소중한 아이이기 때문이겠지요. 애면글면 속을 끓이고 애간장을 녹이는 시간을 참고 견뎌내는 것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이가 주는 사랑의 에너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관심의 단추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며 집착처럼 보이게 만드는 이유이겠지만 사실은 불안해서 입니다.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아이가 아프거나 놀랬거나 삐뚤어진 행동을 보일 때면 난감하기도 하겠거니와 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울고 기력 없어 보이면 병원으로 내달리게 되고 인위적인 보호막에 가두는 고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아프고 코 흘리더라도 자연 치유과정, 면역력을 키워나가는 힘을 키워줘야 함에도 오염된 환경으로 인해 위험에 노출이 증가한 상황을 고려하면 쉽게 물리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절로 해결해 주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육아의 경험을 통해 아이의 순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잡아내는 사람은 부모이며 탁월한 전문가입니다. 저는 은지아빠가 쓴 이 글을 통해 이제 제법 자라 제 목소리가 커진 두 아이를 길러 낸 순간과 지금 새록새록 살이 차오르는 아이를 함께 보며 공감의 몸짓을 나누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아이를 통해 경험한 벅찬 감동의 순간보다 아빠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 했는가에 더 마음이 머물게 되었습니다. 은지아빠가 주양육자가 되고 은지엄마가 조력자가 되어 손발이 맞는 협업플레이를 펼쳐 나가는 동안 저는 무엇을 했을까하는 반성의 목소리와 피할 수 없는 대면식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낫다는 기준에 안도되고 고취되어 이만하면 되겠지 라는 자기합리화를 방패삼아  현실의 상황을 외면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부모의 무관심, 특히 아빠의 비협조가 육아의 고통을 더욱 왜곡되고 처절하게 만드는 것임을 알면서 말입니다. 반성하고 또 반성합니다.

언제나 아이가 제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믿지 않지만 믿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인가 봅니다. 아빠를 향해 두 팔 벌려 온몸을 날려 기대오는 아이들,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온전히 상대를 믿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테니. 이 책을 쓴 은지, 민수 아빠는 보편적인 아빠들이 경험하지 못한 순간의 달콤함을 온몸으로 체득했을 것입니다. 아이를 통해 겸손을 배우게 되고 바름에 눈 뜨게 되는 것도 우리는 아이를 지혜롭고 건강한 아이로 키워내고 싶은 본능이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성 따뜻한 이러한 책이 쪼개지고 분화된 현대사회의 가치판단의 왜곡현상을 바로 잡아 줄 윤활유가 되리라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은지와 민수의 해맑음, 보는 이를 절로 상쾌하게 하며 그 너머의 부모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엄마의 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남자든 여자든 보살핌이라는
직접 경험을 통해
양육에 적합한 뇌로 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양육자를
더 용감하고 똑똑하게 만든다.
-p.265, 아빠로 거듭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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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1-04-20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큰 애가 3개월이었을 때, 육아휴직(무급)을 받아서 6달동안 아기를 키웠습니다.
그때 주위에서 육아일기를 써보면 어떠냐고 해서, 몇번 끄적거린 게 있는데,
육아일기란게 쉬운게 아니더라구요.
아기와 함께 보낸 시간들.
정말 힘들었지만 또 그만큼 재미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穀雨(곡우) 2011-04-20 16:24   좋아요 0 | URL
완전 소중한 경험하셨겠군요. 저두 끄적이다만 기록들이 여기저기...ㅋㅋ
예전에 싸이가 유행할때 사진도 업뎃하고 글도 남기고 했는데....
정말 쉽지 않더군요....
 

소설읽기에 빠진 요즘이다. 밤 늦게 찾아 든 적막의 시간을 오롯이 소비했다. 하지만 읽어 내는 속도에 비해 쓰기는 시원찮다. 눈으로 가둔 것이 많아서일테고, 선명하게 접붙지 못한 생각의 얄팍함이다. 어느 님의 포스팅처럼 설익은 글은 젠체하거나 알은체하는 글로 공해를 유발할테니 말이다.  

이럴 때 일수록 나는 읽기에 더 매진한다. 읽는 것에 대한 목적이 무엇이든 읽다보면 읽다에 스민 가치, 공감한다에 맞닿는다. 공감은 때론 진한 커피향처럼 그윽하기도 하고 신선한 과즙처럼 탄성을 자아내곤 한다. 최근 몰아 읽은 작가들의 향연이 적확하게 그 상황을 재연했다. 

<위저리 베이커리>로 유명짜한 구병모 작가의 신간이다. 아가미가 소생한 한 남자의 삶을 꿈꾸듯 뒤쫓으며 암울한 현실과 조화롭게 버무린 내공이 전해오는 작품이다. 그녀가 쓴 글에는 생활인의 아쉬움과 현실의 차가움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더욱 현실적이게 도드라지게 한 것이 이 작품의 고갱이다. <아가미>를 통해 실재와 희망의 대척점을 발견했다. 청구하지 못한 현실의 가혹함, 궁지에 몰린 아픔의 적체로 변신을 거듭한 결과, 아가미가 자라고 비늘이 돋은게 아닐까? 결과야 어떻든 퇴화된 유전자의 기억이 두 개의 호흡기를 부여하는 돌연변이로 바꾸었더라도 그것이 위안이 되기도 할지 모르겠다.
 


정유정, 그녀가 사고를 칠 것이라 감은 있었지만 이렇게나 단시간에 원투펀치를 날릴 줄 몰랐다. 그녀의 전작 <내 심장을 쏴라>의 폭풍같은 흡입력보다 몇 단계 격상한 메가톤급이다. 젊은 영혼에게 창공을 훨훨 나는 희망을 <내 심장을 쏴라>에서 발산했다면 <7년의 밤>은 오밀조밀하게 엮인 스도쿠의 치밀함처럼 인간의 악마적 본성을 몽치로 내리치듯 강하게 날린다. 확연하게 변신한 그녀의 이야기에 정말 시간의 분초가 쏜살같이 스르륵 지나간다. 제 아무리 전문가의 경험과 확증을 통해 이 글을 집필했다고 하지만 그녀의 박학다식한 지식의 카니발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편견을 한 방에 그로기시켜 버린 그녀의 이야기, 대단하다는 수식어 외에는 달리 형용할 길이 없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물을 소재로 한다. 변신했거나 수몰되거나 교교히 흐른다. 방류된 물꼬를 따라 유영하다보니 어느새 피로도 함께 소멸되었다. 색깔이 다른 두 여성작가의 글에 소설읽는 재미에 몰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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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1-04-1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이 소설을 읽고 계시는 중이었군요. 아쉽게도 저 두 편을 다 읽어보지 못했네요. 읽지만 마시고 좋은 글도 예전처럼 많이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막내는 한창 세상을 향해 조금씩 기어나가고 있겠군요.

穀雨(곡우) 2011-04-19 08:51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오랜만이네요.^^
터울이 있는 터여서 그런지 막내는 새록새록 변하는 모습이
시시각각 다릅니다. 하지만 피곤이 켜켜히 쌓이는 건 어찌할
수 없나 봅니다.ㅋㅋ

sslmo 2011-04-19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구병모님의 위저드베이커리, 참 좋았거든요.
구병모 님은 구병모 님대로, 정유정 님은 또 정유정 님대로, 피로도 함께 소멸되셨다 하니 더욱더 솔깃한걸요~

穀雨(곡우) 2011-04-19 08:55   좋아요 0 | URL
책을 읽다 보면 상황을 그려보곤 합니다. 이미 가 보았던 내 마음의 현장을 작가의 상상이 빚은
설정과 대비시켜 읽다보면 꽤나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이번 책은 애써 그러지 않아도 낯익은
기시감처럼 상황이 단박에 이어지는 힘이 좋았습니다. 특히, 정유정 작가의 글에서는 더욱
강렬했습니다. 게다가 두툼한 두께를 무색하게 만드는 힘이 더욱 좋았구요....^^

June* 2011-04-19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아 ! 곡우님 .
 곡우님 닉네임에 깜짝 놀라고 예스가 아닌 알라딘에서 보니 왠지 모르게 두근두근.
 

穀雨(곡우) 2011-04-19 13:15   좋아요 0 | URL
쥰님, 이렇게 반겨 주시니 고마운데요...^^
댓글에 담긴 에너지에 오후를 즐겁게 시작합니다.ㅎㅎ
 
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탄생과 더불어 모든 것은 성장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는 헤르만 헤세의 명징한 사유처럼 고통은 성장의 다른 이름이다. 웃자라 버린 마음은 현실에 동요하고 저항할수록 감각은 더욱 시려지고 커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성장은 분절되고 쪼개어진 낯선 감각의 실체를 찾아가는 과정인지 모른다. 막연함에서 오는 감각의 통점痛點은, 곧 성장통의 내부적 저항이 아닐까? 치열하게 발효된 감정의 분화를 따라 때론 아프기도, 때론 무섭기도, 때론 즐겁기도 하는 희열 속을 유영하는 히치 하이커가 될 테니.      

     <달과 게>는 추리소설을 표방한 완벽한 성장소설이다. 마치오 슈스케가 쓴 이 책은 내적성장의 변이를 겪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탐색하고 추적하는 과정의 전개를 세밀한 농담으로 그려낸 흡입력이 탁월한 이야기다. 미묘하게 펼쳐지는 감정의 연결고리를 따라 노련하게 조여 오는 완급의 조련은 이 책의 백미다. 세 아이를 둘러싼 반전과 반전의 대구를 통해 인간의 이중성과 선과 악의 대립과 갈등의 정황을 절묘하게 포개고 융합한다.   

        소설의 운명이 통속적인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 위한 작업이라면 저자가 소환해 낸 역량의 터전인 이야기는 그 껍질이 견고하고 단단하기 이를 때 없다. 그것은 이 작품의 전체를 지배하는 풍격과 내면의 심리변화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추출된 공감의 물질은 감정이입을 도모하고 동일시된 내적자아를 끄집어내는 고리가 된다. 저자가 퍼즐처럼 구성한 비현실적인 바람내지는 기원의 사유를 통해 착시효과를 일으키듯 공명의 물결은 바람처럼 커지고 흡수된다. 이러한 전이에 대한 공감은 누구나 그 곳을 통과했거나 힘겨운 고독의 시간을 끌어안는 과정을 겪었음과 부합한다.

 

[사진출처 : 일본문학번역가 민경욱님의 네이버블로그]  

        이처럼 소설이 주는 가치를 보다 완벽하게 구현해 내기 위해서는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적합하거나 안전하다. 그 속에 구전된 허구의 이야기가 양념처럼 스며들어 갈등의 전조를 일으키는 키메이커 역할을 한다면 든든한 지지대를 형성할 것이다. 나아가 인물간의 내적인 변화의 과정을 심리적인 관점에 결부하여 관찰한다면 작가의 기록은 창작의 행위를 넘어 새로운 세상의 건설,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이상향의 창조의 신기원에 미치게 된다. 그것은 곧 익숙하기에 거부감의 낯섦이 없다. 때문에 <달과 게>는 밀착된 탐사를 통한 탄탄한 짜임새를 구성하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춘기에 접어든 신이치, 하루야, 나루미의 미묘하게 얽히고설킨 내면의 심리변화와 의식세계를 보여주는 과정은 진지하고도 매혹적이다.  

        이야기는 기성세대, 어른들에 의해 인위로 만들어 낸 이해할 수 없는 굴곡진 삶의 현실이 어떠한 안전판도 없이 고스란히 내적 충격을 견뎌내야 하는 아이들의 공통분모가 그들을 끌어당기는 견인차가 되며 개별화된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신이치는 아버지를 암으로 잃은 슬픔을, 하루야는 사업실패로 인해 돌변한 아버지에 의한 폭력의 아픔을, 나루미는 사고로 인해 엄마를 잃은 상실의 고통을 통해 그들만의 세상을 연대하고 공유한다. 연대된 아픔은 확대 재생산되고 세상을 향한 도전이 되지만 이렇게 기반 되어 형성된 아픔의 연대는 논리가 취약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는 비현실의 강화된 모습, 즉 초자연적인 힘에 기대 자신을 합리화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아이들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며 극복하거나 제압할 수 없는 나약한 본성의 출현이며 현실에 부딪힌 성장의 장벽이다.  

        실제 신이치의 엄마와 나루미의 아빠의 사이가 미묘한 관계를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소외된 신이치와 나루미의 표출방법은 사뭇 다르다. 공유할 수 없는 대상을 빼앗긴다는 감정의 자극은 저자의 표현처럼 낚시 바늘에 손끝을 찔려 뽑아내는 날카로운 단말마의 고통이다. 그래서 신이치는 하루야의 소외된 현실에 공감하고 나루미를 포섭함으로써 동조된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에게 발생된 사건의 개별화는 이 책을 움직이는 구동점이자 동력으로 작동한다. 취약한 자아를 자극하는 내밀한 감정의 변화를 통해 성숙하고 한 걸음 성장의 발판으로 나아가는 아이의 내면세계를 투영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의 흐름에 대한 속도감은 상황을 지배하고 몰입하게 만드는 심리적 프리즘에 조리개를 맞추어 숨 가쁘게 구동한다. 이러한 서정적 감정선의 자극과 표현은 마치오 슈스케가 얼마나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구성하고 있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마치오 슈스케의 프리즘을 통해 아이들은 누구나의 삶 속, 보편성의 틈입으로 침투하게 되며 그로 인해 야기된 긴장의 순간을 적시에 붙드는 마력을 발산한다. 이것은 마치 거장 무라카미 하루키가 펼쳐 내는 공성진과는 또 다른 세밀한 지배적 관찰이 빚은 황홀한 오케스트라와 같은 변주다. 저자는 신이치의 눈을 통해 질투, 연민, 공포, 당혹, 애증, 복수, 번민의 감정들이 제 각각 뻗어나가 모여들어 화음을 이루어 내는 심포니의 향연을 만끽하는 것과 같다.   

        향연의 순간은 ‘달’과 ‘게’라는 이원적인 상징물을 통해 은유된 핍진성을 되살리며 감각점을 고무시킨다. 상징성은 필시 관습적 소재에 기반을 둔 관념적 대상을 통해 현실과 자연스럽게 매개하는 구실을 한다. 아이들이 게를 채취하고 그 게를 그들만의 공간으로 이동시켜 사육하는 과정을 통해 다시 게 껍질을 방화하여 소실시킴으로써 억눌린 소망을 기원하는 원초적 토테미즘의 의지를 엿보게 되며, 내재된 복선의 암시는 갈등을 견인하는 구심점이 된다. 신이치와 하루야의 관계, 하루야와 나루미의 관계, 신이치와 나루미의 관계. 그 삼각의 관계를 통해 아이들은 내적 자아를 표출하는 치밀한 얼개의 형태를 공고화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의 파노라마는 전편에 걸쳐 은유적 설정을 통한 비유를 통해 펼쳐진다. 신이치의 마음을 추적하며 따라가는 일련의 현상을 물결처럼 펼쳐지는 상황의 긴박감은 박진감 넘친다. 주변인물인 할아버지 요조의 갈등상황이 대물림 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 충격을 더욱 증폭시켜 발화하는 기폭제가 된 어머니와의 나루미 아버지와의 은밀한 관계는 박탈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작가의 인물에 대한 장악은 거침없다. 위력적인 지배의 흔적이 곧 필력의 힘이리라. 또한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모티브를 추동하는 근원적인 요소라는 사실이다. 감정의 순간에 대한 기록은 휘발성이 강해 저장시켜 재생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치 작가의 역량을 구분 짓는 바로미터에 다름 아니지 않겠는가. 

.

        그러므로 작가 미치오 슈스케의 <달과 게>는 단락적인 사건을 통해 아이의 내면이 변화하고 낯선 감각의 세계로 흘러가는 모습을 한 톨의 거부감 없이 보여준다. 인간의 잔혹성이라는 성마른 물질이 부화하는 과정을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구현했다. 또한 달과 게가 암시하는 알고리즘의 상승된 관계를 통해 인간의 모든 행위가 인과율의 법칙에 지배를 받아 순회하듯 일정한 틀 속에서 윤회함을 상기시킨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이유라는 것이 있다. 세상일 전부에 분명히 이유가 있어. 결국은 자기한테 되돌아오는 법이야. “(p.189)  

        작가의 이 작품이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심리적 완성도에만 머물지 않는다.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기능적, 형태적 결손가정에 대한 문제를 사건의 본질 속 깊숙이 침투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가족의 기능적 해체에 따른 구성원의 갈등은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일차적인 모습이다. 지지기반이 연약한 청소년의 자존감은 애정결핍과 집착의 형태를 일으킨다. 실제 신이치가 어머니의 사생활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또한 타자에 의해 형성된 상황을 수용하지 못하는 경계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행위이다.  

       따라서 민감한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허구의 세계와 적절하게 버무려 공감의 큰 틀을 만들어 내는 작가의 노련함이 예사롭지 않다. 경험이 밑거름이 되었든 치밀한 계산에 의해 완성되었든지 간에 진실함은 작품을 더욱 빛내는 요체다. 이렇듯 이 책은 불편하고 어둡게 그려질 낯선 시간의 기록을 진실함을 터전삼아 각자의 또 다른 세상으로 이끈다. 결국 그것은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는 믿음의 기록이자 내적 자아를 탐구하는 자신을 향한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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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4-14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호,불호가 너무 명백한걸요.
전 '기발한 발상'이후로 한동안 일본것은 멀리하려고 했지만,
님의 이 리뷰를 보니 또 '혹'하는 걸요~^^

穀雨(곡우) 2011-04-15 10:18   좋아요 0 | URL
대개 일본소설이 호불호가 확연한 것 같아요.
저 또한 그닥 즐겨 읽지는 않지만 어느 님의 리뷰에 훅해서....^^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중에서 - 



이름이 중요한 이유는 자의가 개입될 공간을 내어 주지 않는다. 이름은 그 자체로 명명되어 불리우는 순간 다름 아닌 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온전히 나는 아니다. 한 번 매개된 이름을 자의로 개명하여 바꾸는 의지의 개입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이름에 대한 소유는 내가 아니다. 타인에게 불리우기를 기대하는 것이 이름이다. 이것이 이름이 가진 운명이랄까? 아무개를 하나의 객체로 인식하고 대상화시키는 수단이 바로 이름이라는. 
 


이름은 그 사람이나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연결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부르기 쉽고 금세 떠오르는 이름이라도 가볍게 지을 수 없는 이유도 이름과 자신이 동일화되는 통로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이름을 비토할 마음은 없다. 당신들이 겪었을 인고의 순간을, 나를 마주 대했을 그 당시를 떠올린다면 고심의 순간이 쓰나미처럼 밀려 온다. 지금 내가 딱 그렇다.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해 이렇게 심사숙고한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요즘처럼 이름에 대한 작명이 까다로운 시절이 없지 싶다. 엄살이라고 지청구를 준다면 달리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어렵다. 몇 음절로 그 아이를 규정짓는다는 행위가 어마무시한 작업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타인의 의지로 지어 부르고 싶지는 않다.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좋아할 지 나빠할 지 모르는 상태에서 타자의 판단으로 호불호를 가리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름에는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겹쳐진다. 외모가 어떻든 이름으로 인해 떠올리면 솟아나는 형상이 있다. 그 형상이 세련되고 품위가 묻어 나는 노력은 물론 아이의 몫이다. 나는 아이가 현명한 사람으로 커 나가길 바란다. 어떤 부모라도 이러한 나의 생각에 지지하리라 믿는다. 우스개 소리지만 아이의 태명은 불쑥이다. 사그라진 기억을 뚫고 우리에게 왔다는 뜻이지만 처음 듣는 이는 꼭 웃곤 한다. 이렇게 미소짓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름의 위력은 대단하지 않은가. 
 


그러니 어찌 고민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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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4-01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돌지난 조카의 이름을 짓는데...아는 분께 부탁하였더니 성효령이었어요.
천번,만번을 불러보기도 했는데...사주랑도 그렇고 뜻도 좋고 다 좋다는데,
아이 부모가 효령대군이 생각났다, 뭐 기타 등등 얘기를 해 결국 다른 이름을 써요.
고 또래 아주 흔한 이름.
병원 가면 성만 다른 그 이름이 아주 많대요~^^

穀雨(곡우) 2011-04-01 09:18   좋아요 0 | URL
성효령 이름에 기품이 있어서 좋은데요. 이름에도 유행을 타는 지 지어 놓고 찾아 보면 주위에 보이는 아이들 이름은 죄다 그 이름...(과장 쪼금 보태서...헤헤)
아....조카의 성이 혹 창녕 성씨 아닌가요...전 창녕 조씨거든요
본관이 같아서 혈연상 얽힌게 있다고 하더군요...^^

pjy 2011-04-01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집도 5월이면 쌍둥이 조카가 생기는데 이름때문에 남동생네가 머리 싸매고 있습니다^^;

穀雨(곡우) 2011-04-01 17:27   좋아요 0 | URL
정갈하게 마음 잡고 이번 주말에 결정해야겠어요.
삼칠일 전에 말이죠...동생네의 마음이 팍팍 느껴집니다.^^

마녀고양이 2011-04-01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 고민하시는 데다 좀 더 부담을 드려야겠습니다.
진짜 좋은 이름 부탁드립니다. 저는 평생 제 이름이 마음에 안 들거든요.
이쁘다 곱다 맘에 안 든다를 떠나서, 부모님의 정성(!)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의미가 있는......... 아이에게 평생 부모님의 애정이 느껴지는 그런 이름 부탁드립니다. ^^

穀雨(곡우) 2011-04-01 17:28   좋아요 0 | URL
아웅....넵, 그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담팍팍....^^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현대사를 곧추세운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리영희 선생을 빼 놓을 수 없다는데 이견이 없을 테다. 리영희 선생에 대한 신산한 삶을 차치하더라도 그 분의 인물됨이나 올곧고 강직한 성품에 대해 더 이상 다른 말을 보태기 힘들다. 선생이 남긴 족적은 현대사를 가르는 분명한 지침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민족의 스승으로서, 선각자로서, 지도자로서 선생은 묵직한 가르침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격변의 시대를 살다 간 리영희 선생. 거대한 우상에 맞서 진리를 설파한 선생의 노력은 이 땅 위에 민주주의의 물결이 흘러넘치는 중심에 섰던 장본인이다. 선생은 불의에 맞서 정의를 품고 자유를 유린하는 압제와 폭정에 바른 소리를 낸 보기 드문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그 분이 영면한 이 순간, 아쉬움의 물결이 더욱 진하게 퍼지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우상의 횡포에 대한 공허함이다. 그 분의 서슬 퍼런 일갈에 체증이 사그라지고 팍팍한 삶에 위안이 되었던 것은 바로 그 오롯한 명징함에 고정된다.

김삼웅 작가가 쓴 <리영희 평전>은 리영희 선생의 사상에 초점을 맞춘다. 전 생애를 조명하고 그 속에서 선생을 키운 밀알이 무엇이었는지를 찾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시하는 가르침에 비중을 두었다. 아울러 잔인무도한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귀감이 되는 존재기이기도 하다. 선생에 대한 평가는 아이러니하게도 흑백의 날 선 대립처럼 극단이다. 좌우를 가르는 이념의 대립이 빚은 희생양으로 험난한 운명의 굴곡진 삶을 살았다. <새는 좌와 우의 날개로 난다>는 선생의 저작처럼 지극히 간명한 이치도 권력 앞에서는 예외다. 선생이 물질만능주의와 교조주의에 사로잡힌 자본주의를 그 누구보다도 바로 잡고자 노력했던 것도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에 대한 위험성을 폐부 깊숙이 통찰하였음은 간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리영희 선생에 대한 삶의 흔적을 되새기는 것은 이념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의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통로다. 선생이야말로 바로 자유인의 표상임은 부인할 수 없다.
철학적으로 현실적으로, 거짓은 인간(성)의 부정이다. 부정된 인간(성)은 노예다. 자유는 인간존재의 전부이며 그 본질이다. 본질을 부정당했다거나 박탈당한 상태는 자유가 아닐 뿐 아니라 '인간'자체가 아니다.  자유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이라 할 수 있다.(p.470) 이토록 선생이 자유에 천착한 이유가 그를 일으켜 세운 8할이라 하겠다. 우상에 대항할 힘을 이성에서 찾는 원동력이 자유, 그 자체다. 선생을 만든 사상의 본령이 이와 같음에 흔들림이 없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서 이데올로기의 본질적 가치를 왜곡된 민중에 전하고자 하였음은 또한 같은 이치다. 

하지만 리영희 선생의 존재감에 대해 오늘날 되묻는다면 그를 아는 이와 모르는 이로 확연히 양분된다. 가려지고 은폐된 선생의 강단한 행적은 권력에 유린되고 언론에 의해 체계적으로 은폐되어 대중에게 포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이 몇 차례 돌려 이어지는 동안 그는 '의식화의 원흉'으로 내몰리고 세 차례의 반공법에 의한 옥고를 치러냈다. 이처럼 리영희 선생은 반이성의 시대의 제물이 되었다.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선생을 배척하는 세력에게는 서슬 퍼런 위협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덮어 놓고 반공을 부르짖고 빨갱이의 주홍글씨를 새기는 우상의 광기에 진실은 왜곡되고 폄훼 당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선생의 무기는 논증에 있다.
리영희가 거대한 우상집단과의 '진리를 위한' 싸움에 동원한 무기는 '논증論證'이었다.(p.32) 김상웅 저자가 밝힌 선생의 논증은 허위의 글쓰기가 아니며 추상명사를 남발하는 조잡함의 작태가 아님을 일갈한다. 그러하기에 선생의 확고부동한 논증력이 억압으로 점철된 생애를 지탱하는 동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제도나 체제보다는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는 선생의 고결한 마음이 논증을 이끄는 고갱이가 되었음 또한 이치에 부합한다.

시인 고은은 선생을 실천하는 지성으로 상찬했다.

사상의 은사
시대의 선구자
60년대 70년대 80년대 대표적 지성
아 이 한반도의 살아 있는 정신

얼음
우리들의 전위와 후방.

여느 선각자들이 그렇듯 리영희 선생의 성장과정 또한 평범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시련과 고통의 순간을 딛고 일어선 순간순간을 이 책은 선명하게 회고한다. 그는 민족 분단의 전장에서 다시 독재의 시대의 희생양으로 암담한 시대와 함께 동행했다. 이러한 그의 배경이 사회민주주의를 향한 사상적 지주로 녹아들었음을 적확하게 설명해 준다. 압박이 가해지면 질수록 단련되고 제련된 그의 사상적 원류는 충만해졌으며 무지와 비이성을 깨트리는 요체가 된다.

리영희 선생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대상에 대한 판단은 달라진다고 했다. 좌우의 구분은 윤구병 충북대 교수의 논리처럼 시소가 오른쪽으로 기울면 더욱 왼쪽으로 밀려나 균형을 맞추는 현상과 같음이다. 그래서 선생은 스스로 중도좌파로 입지를 규정하였으나 이것은 좌우의 구분에 대한 명분에 불과하다. 그가 언어유희에 불과한 정체성의 구분을 지독하게 혐오했던 이유다. 그를 빗대 한학에 두루 정통한 최준기 선비는 정암과 퇴계의 비유를 들면서 정암 조광조의 앙가주망의 자세와 대비시켰다. 하지만 김삼웅 저자는 오히려 남명 조식 선생의 실천궁행을 중시하는 지경실행의 가치의 원류가 일맥상통함을 시사한다. 실제 리영희 선생이 누구를 닮았든 그의 사상의 원류는 인간존중의 신념임에 변함이 없다.

혹자는 리영희 선생의 글을 읽으면 주입식 가치의 허상을 발견하는 사고의 대전환을 겪는다고 했다. 그것은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과 덕목을 바로 세워주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리영희 선생이 몸소 실천한 지행일치의 가르침에 프리즘을 맞추어야 함은 재고의 여지가 없다. 선생의 굳은 신념과 지조, 진리를 추구하는 용기는 때로는 데이비드 소로우의 실천적 행동철학처럼 지식인이 지양해야 할 이상을 제시한다. 이것이야말로 포퓰리즘에 빠진 정권의 인기영합주의와 당리당략에 의해 변태하는 우상의 그늘로부터 벗어나는 길임을 선생을 통해 발견한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 <대화>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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