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중에서 -
이름이 중요한 이유는 자의가 개입될 공간을 내어 주지 않는다. 이름은 그 자체로 명명되어 불리우는 순간 다름 아닌 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온전히 나는 아니다. 한 번 매개된 이름을 자의로 개명하여 바꾸는 의지의 개입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이름에 대한 소유는 내가 아니다. 타인에게 불리우기를 기대하는 것이 이름이다. 이것이 이름이 가진 운명이랄까? 아무개를 하나의 객체로 인식하고 대상화시키는 수단이 바로 이름이라는.
이름은 그 사람이나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연결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부르기 쉽고 금세 떠오르는 이름이라도 가볍게 지을 수 없는 이유도 이름과 자신이 동일화되는 통로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이름을 비토할 마음은 없다. 당신들이 겪었을 인고의 순간을, 나를 마주 대했을 그 당시를 떠올린다면 고심의 순간이 쓰나미처럼 밀려 온다. 지금 내가 딱 그렇다.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해 이렇게 심사숙고한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요즘처럼 이름에 대한 작명이 까다로운 시절이 없지 싶다. 엄살이라고 지청구를 준다면 달리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어렵다. 몇 음절로 그 아이를 규정짓는다는 행위가 어마무시한 작업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타인의 의지로 지어 부르고 싶지는 않다.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좋아할 지 나빠할 지 모르는 상태에서 타자의 판단으로 호불호를 가리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름에는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겹쳐진다. 외모가 어떻든 이름으로 인해 떠올리면 솟아나는 형상이 있다. 그 형상이 세련되고 품위가 묻어 나는 노력은 물론 아이의 몫이다. 나는 아이가 현명한 사람으로 커 나가길 바란다. 어떤 부모라도 이러한 나의 생각에 지지하리라 믿는다. 우스개 소리지만 아이의 태명은 불쑥이다. 사그라진 기억을 뚫고 우리에게 왔다는 뜻이지만 처음 듣는 이는 꼭 웃곤 한다. 이렇게 미소짓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름의 위력은 대단하지 않은가.
그러니 어찌 고민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