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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현대사를 곧추세운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리영희 선생을 빼 놓을 수 없다는데 이견이 없을 테다. 리영희 선생에 대한 신산한 삶을 차치하더라도 그 분의 인물됨이나 올곧고 강직한 성품에 대해 더 이상 다른 말을 보태기 힘들다. 선생이 남긴 족적은 현대사를 가르는 분명한 지침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민족의 스승으로서, 선각자로서, 지도자로서 선생은 묵직한 가르침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격변의 시대를 살다 간 리영희 선생. 거대한 우상에 맞서 진리를 설파한 선생의 노력은 이 땅 위에 민주주의의 물결이 흘러넘치는 중심에 섰던 장본인이다. 선생은 불의에 맞서 정의를 품고 자유를 유린하는 압제와 폭정에 바른 소리를 낸 보기 드문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그 분이 영면한 이 순간, 아쉬움의 물결이 더욱 진하게 퍼지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우상의 횡포에 대한 공허함이다. 그 분의 서슬 퍼런 일갈에 체증이 사그라지고 팍팍한 삶에 위안이 되었던 것은 바로 그 오롯한 명징함에 고정된다.
김삼웅 작가가 쓴 <리영희 평전>은 리영희 선생의 사상에 초점을 맞춘다. 전 생애를 조명하고 그 속에서 선생을 키운 밀알이 무엇이었는지를 찾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시하는 가르침에 비중을 두었다. 아울러 잔인무도한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귀감이 되는 존재기이기도 하다. 선생에 대한 평가는 아이러니하게도 흑백의 날 선 대립처럼 극단이다. 좌우를 가르는 이념의 대립이 빚은 희생양으로 험난한 운명의 굴곡진 삶을 살았다. <새는 좌와 우의 날개로 난다>는 선생의 저작처럼 지극히 간명한 이치도 권력 앞에서는 예외다. 선생이 물질만능주의와 교조주의에 사로잡힌 자본주의를 그 누구보다도 바로 잡고자 노력했던 것도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에 대한 위험성을 폐부 깊숙이 통찰하였음은 간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리영희 선생에 대한 삶의 흔적을 되새기는 것은 이념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의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통로다. 선생이야말로 바로 자유인의 표상임은 부인할 수 없다. 철학적으로 현실적으로, 거짓은 인간(성)의 부정이다. 부정된 인간(성)은 노예다. 자유는 인간존재의 전부이며 그 본질이다. 본질을 부정당했다거나 박탈당한 상태는 자유가 아닐 뿐 아니라 '인간'자체가 아니다. 자유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이라 할 수 있다.(p.470) 이토록 선생이 자유에 천착한 이유가 그를 일으켜 세운 8할이라 하겠다. 우상에 대항할 힘을 이성에서 찾는 원동력이 자유, 그 자체다. 선생을 만든 사상의 본령이 이와 같음에 흔들림이 없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서 이데올로기의 본질적 가치를 왜곡된 민중에 전하고자 하였음은 또한 같은 이치다.
하지만 리영희 선생의 존재감에 대해 오늘날 되묻는다면 그를 아는 이와 모르는 이로 확연히 양분된다. 가려지고 은폐된 선생의 강단한 행적은 권력에 유린되고 언론에 의해 체계적으로 은폐되어 대중에게 포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이 몇 차례 돌려 이어지는 동안 그는 '의식화의 원흉'으로 내몰리고 세 차례의 반공법에 의한 옥고를 치러냈다. 이처럼 리영희 선생은 반이성의 시대의 제물이 되었다.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선생을 배척하는 세력에게는 서슬 퍼런 위협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덮어 놓고 반공을 부르짖고 빨갱이의 주홍글씨를 새기는 우상의 광기에 진실은 왜곡되고 폄훼 당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선생의 무기는 논증에 있다. 리영희가 거대한 우상집단과의 '진리를 위한' 싸움에 동원한 무기는 '논증論證'이었다.(p.32) 김상웅 저자가 밝힌 선생의 논증은 허위의 글쓰기가 아니며 추상명사를 남발하는 조잡함의 작태가 아님을 일갈한다. 그러하기에 선생의 확고부동한 논증력이 억압으로 점철된 생애를 지탱하는 동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제도나 체제보다는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는 선생의 고결한 마음이 논증을 이끄는 고갱이가 되었음 또한 이치에 부합한다.
시인 고은은 선생을 실천하는 지성으로 상찬했다.
사상의 은사
시대의 선구자
60년대 70년대 80년대 대표적 지성
아 이 한반도의 살아 있는 정신
불
얼음
우리들의 전위와 후방.
여느 선각자들이 그렇듯 리영희 선생의 성장과정 또한 평범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시련과 고통의 순간을 딛고 일어선 순간순간을 이 책은 선명하게 회고한다. 그는 민족 분단의 전장에서 다시 독재의 시대의 희생양으로 암담한 시대와 함께 동행했다. 이러한 그의 배경이 사회민주주의를 향한 사상적 지주로 녹아들었음을 적확하게 설명해 준다. 압박이 가해지면 질수록 단련되고 제련된 그의 사상적 원류는 충만해졌으며 무지와 비이성을 깨트리는 요체가 된다.
리영희 선생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대상에 대한 판단은 달라진다고 했다. 좌우의 구분은 윤구병 충북대 교수의 논리처럼 시소가 오른쪽으로 기울면 더욱 왼쪽으로 밀려나 균형을 맞추는 현상과 같음이다. 그래서 선생은 스스로 중도좌파로 입지를 규정하였으나 이것은 좌우의 구분에 대한 명분에 불과하다. 그가 언어유희에 불과한 정체성의 구분을 지독하게 혐오했던 이유다. 그를 빗대 한학에 두루 정통한 최준기 선비는 정암과 퇴계의 비유를 들면서 정암 조광조의 앙가주망의 자세와 대비시켰다. 하지만 김삼웅 저자는 오히려 남명 조식 선생의 실천궁행을 중시하는 지경실행의 가치의 원류가 일맥상통함을 시사한다. 실제 리영희 선생이 누구를 닮았든 그의 사상의 원류는 인간존중의 신념임에 변함이 없다.
혹자는 리영희 선생의 글을 읽으면 주입식 가치의 허상을 발견하는 사고의 대전환을 겪는다고 했다. 그것은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과 덕목을 바로 세워주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리영희 선생이 몸소 실천한 지행일치의 가르침에 프리즘을 맞추어야 함은 재고의 여지가 없다. 선생의 굳은 신념과 지조, 진리를 추구하는 용기는 때로는 데이비드 소로우의 실천적 행동철학처럼 지식인이 지양해야 할 이상을 제시한다. 이것이야말로 포퓰리즘에 빠진 정권의 인기영합주의와 당리당략에 의해 변태하는 우상의 그늘로부터 벗어나는 길임을 선생을 통해 발견한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 <대화> 中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