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의 그림은 에곤쉴레의 <꽈리와 열매가 있는 자화상>이다.
얼마전 읽었던 아고타 크리스토퍼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표지에 나오는 쌍둥이 그림과 흡사하다.
퀭하고 비쩍 마른 얼굴로 쳐다보는 눈빛이 마치 "너라고 별수 있겠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과연 어떤 자격을 지녀야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살 수 있는가.
그리고 왜 그는 실격되었는가.
이 책은 서문과 3편의 수기로 된 본문, 마지막 후기로 이루어져있다.
서문과 후기는 작가의 말이지만, 3편의 수기는 <요조>라는 인물을 내세워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국 이 책은 작가 그 자체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인간흉내'만 내다가 결국 자살해야만 했을까.
"다자이는 어릴 적부터 부잣집 아이라는 사실에 본능적인 죄의식을 지니고 있어 당시 시대적 사조였던 공산주의 사상에 접하게 되면서 자신의 출신성분에 절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166쪽
"돈 없는 천민만이 옳다.(중략) 그러나 나는 천민이 아니었다. 나는 기요틴에 매달리는쪽이었다. 나는 열아홉 살 먹은 고교생이었다. 반에서 나 혼자만 두드러지게 호사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고뇌의 연감]1946"-167쪽
"돈도 실력이얌~너네 부모를 원망해!"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생각나지 않는가?.
다자이 오사무가 지금 살아있었더라면 돈냄새 풍기는 그 자체로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꽤나 푸근하게 살았을텐데, 스스로 그 '실력'을 내팽개치고 고매한 빈껍데기 뒤집어 쓰고 살고자 했으니 자업자득인 셈이다.
"싫은 것을 싫다고 하지도 못하고, 또 좋아하는 것도 쭈뼛쭈뼛 훔치듯이 전혀 즐기지 못하고, 그러고는 표현할 길 없는 공포에 몸부림쳤습니다. 즉 저에게는 양자택일하는 능력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뒷날 저의 소위 '부끄럼 많은 생애'의 큰 원인이 되기도 한 성격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21쪽
우유부단한 요조의 성격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겸양(謙讓)'이라는 도덕률의 노예가 되어 산다.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 자기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피력하다 상처를 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좋아하는 것. 정말 원없이 해본 적 있었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눈치나 여건 등을 살피지 않고 그 순간만을 오롯이 즐겨본 적이 내 생애 몇번이나 있었던가.. 누구나 손에 꼽지 않을까?
나의 성격 또한 내성적이지만 '호오(好惡)'는 분명하다.
하지만 분명한 점이 오히려 날 괴롭힌다. 개인적 취향이 사회적 겸양을 뚫고 나온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피해의식'을 차곡차곡 쌓아왔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그 동안 양보해서 손해 많이 봤었지..하는 감정말이다. 사실 겸양을 지키려고 노력해왔던 인간관계의 미덕들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경험 해 보셨으리라. 상대방이 몰라줘서, 또는 그 점을 이용당해서, 아님 감정의 기복들이 어느 한 순간 무너져 주체가 안 되는 날 느닷없이 폭발시켜서 그 동안 모아둔통장의 '신뢰 잔고'들이 한꺼번에 마이너스가 되는 경험말이다. 꾹꾹 눌러참는 성격이 한 순간에 폭발하는 위험을 안고 있어 차라리 '화를 잘 내는데도 뒤끝은 없다' 는 소리가 더 낫지 않을까..하는 억울함도 들때가 있다. 이렇듯 우유부단함과 내성적인 성격이 빚어낸 인간관계의 악몽들이 내맘속 한켠 죄주머니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우유부단하고 한편으로 내성적인 인간의 성격은 누구나 상처받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된 인간보편의 특질이기에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62쪽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주관적이다. 옆에서 보기엔 행복해 보일지라도 상대방은 다르게 받아들일수 있다는 뜻이다. 상대방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 했는데 아니라고 한다면 내 이야기가 틀린 게 아니라 상대방의 생각은 다르다는 말일게다.
대화는 본질적으로 서로의 주관적인 생각을 나누는 것이기에 짐짓 '객관적'이라고 자평하는 사람들도 한편으론 상대방에게 '내 말은 옳다'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셈이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134쪽
주인공 요조는 결국 알코올 중독자, 약물 중독자로 전락해버린다.
인생을 '아비규환(阿鼻叫喚)' 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다자이는 5번째 자살기도에서 성공하여 서른아홉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문장들이 가슴에 박힌다.
그리고 인간사회의 이전투구에서 승자만 살아남는 잔혹성을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거대한 명제앞에 어떻게든 사회에 융화될려고 애쓰고, 순수해질려고 하는 다자이에 인간들은 난 그와 다르다고 실소를 던진다.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볼려고 했으나 인간사회의 거대한 위선과 체면의 벽앞에 번번히 무릎꿇고 결국엔 인간실격자가 되어버린 그가 바로 내 부모고, 형제고, 친구일 수도 있다는 상상. 해본 적 있나?
다자이는 아마 이해받고 싶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상처받고 살아가는 수 많은 다자이를 옹호하고 해명하여
가슴으로 끌어 안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