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0년 10월
25년 전에 출판한 도올 선생의 [노자와 21세기]를 감명깊게 읽었던 터라
노자 총81장을 역주한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듣고 얼른 샀습니다.
동양철학.
재미없습니다. 솔직히.
마치 학창시절에 농띠 선생이 가르친 과목처럼 말이죠.
도올은 달랐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서양이 압도하는 물질문명에서 서양철학은 땟갈 좋게만 보이고
동양철학은 고리타분하게만 느껴졌지요.
철학은 사람의 죽음이라는 전제 위에서 탄생한 학문이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학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될때까지도 20년이 넘게 걸렸네요.
무엇보다 도올의 강의와 책은 재미있습니다.
2천년전의 글을 갖고 와서 지금의 사람에게 전달하는 메신저의 능력이 탁월합니다.
왕필의 주를, 다산의 해석을, 그리고 가감없이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도올의 깊이를 읽다보면,
내가 알아왔던 고전의 해석이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또한 그렇게 공부해왔으니 재미가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제1장의 의미를 깊게 공부해야지만 나머지 80장의 의미를 이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올은 제1장의 해석에 90여 페이지를 할애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으로 시작해서 중묘지문"으로 끝나는 문장.
아래는 제1장의 핵심적인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원불변의 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참된 존재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존재는 변화 속에서 존재한다. 하나님도 존재하기 위해서는 변화 속에서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불변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변화의 다양한 양태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보통 "불변"이나 "영원"이라 말하는 것은 모두 시간 속의 지속태일뿐이다. 시공간 내의 모든 것이 변화에 복속된다는 것은 지극한 상식이다. 파르메니데스도 플라톤도 사도 바울도 시공간 내에서 불변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발견한 불변한 장소가 수학(기하학)이었고, 수학의 자리가 관념이었다. 관념의 자리가 바로 이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능력일진대, 그것은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개념적 약속에 불과한 것이다. 과학의 법칙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29쪽
제1장의 마지막 문장 "중묘지문(衆妙之門) : 뭇 묘함이 모두 이 문에서 나오는도다! 를 마무리하며,
도올은 강요배 화백을 불러냅니다.
몇 년전에 제주4.3사건에 꼳혀서 여러 서적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제주도 여행을 하며 제주4.3사건의 기념비적인 장소만 골라서 여행했을 때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라는 그림책을 보고 그 강렬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던 적이 있었죠
동백꽃 지다
강요배 / 학고재 / 1998년 3월
부질없는 역사의 장면들을 거칠고 먹먹한 그림 솜씨로 담아낸 책입니다.
한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 내면의 고통까지도 공감해야 하듯이,
제주를 알려면 3대에 걸친 제주민의 70년 고통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도올이 1982년도에 귀국하여 동양고전에 관한 포문을 열기 전 강요배 화백이 1981년도에 이미 "중묘지문"을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사실..그의 사회적 관심의 배면에 심오한 철학적 성찰이 있었다는 얘기로 제 1장을 마무리했습니다.
2020년 7월1일 "그림과 말 2020" 전시회에서 강요배 화백이 도올에게 한 말입니다.
"사실 이 그림의 제목은 "꽃"이 아니라 "중묘지문"입니다. 저는 그 당시 [노자]를 읽고 어떻게 인간이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나 도무지 그 사유의 스케일에 거대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1장에 나오는 중묘지문이라는 말에 너무도 매력을 느꼈고,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한 고민 끝에 노자로부터 받은 인스피레이션을 이렇게 꽃 한송이로 표현해보았습니다. 이 그림이 꽃이 아니라 중묘지문이라 제목을 달아야 마땅하지요. 그런데 제가 감히 노자를 안다고 폼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80년대 선생님과 같은 철학자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아무도 노자가 뭔지 몰랐어요....." - 92쪽
강요배 [중묘지문 : 156cm x 156cm, 1981년]
수운이 한 말 중에 "나의 도는 넓지만 매우 간략하다. 그래서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도올은 "나의 도는 한없이 쉽고 또 쉬운 것인데, 쉽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어렵게 들린다. 그래서 부질없이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우린 수운처럼, 강요배처럼 살고 있나요?
아님 도올처럼 살고 있나요?
아니면 저처럼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대는 것일뿐, 왜 그렇게 짖어대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없이 웃을 뿐" 이라고..눈물이 핑 도는 이탁오 선생의 문장처럼 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