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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이름을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깊은 철학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기대하게 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역시 제목부터 제법 묵직하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난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외로 단순했다. 결국 착하게 살라는 이야기 아닌가?


이 책은 6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 바보 이반

3. 홀스토메르(어느 말의 이야기) ★(독특한 관점과 이야기 좋았습니다)

4. 인간에게 많은 땅이 필요한가

5. 주인과 일꾼

6. 항아리 알료사



첫 이야기부터 흠..난 좀 모르겠다. 청소년에게는 좋은 인성교육 도서일 수 있지만 세상의 복잡함을 어느 정도 경험한 성인에게는 지나치게 뻔하고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나 난 시니컬한 글들을 좋아하는 편이라 소위 '교훈적'이라거나 '권선징악'에 대한 글들은 내 입맛에 맞지 않다.


첫번째 이야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자

구두 수선공 세몬은 돈도 없고 외투도 변변치 않은 가난한 사람이다. 어느 날 길에서 벌거벗은 남자를 발견하고,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그를 집으로 데려온다. 아내 마트료나는 처음에 불같이 화를 내지만 결국 낯선 남자에게 밥을 내어준다. 그 남자는 천사 미하일이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 세 가지 진리를 배우는 중이다.


세 가지 말을 깨닫도록 해라. 사람들 안에 무엇이 있는지, 사람들에게 무엇이 주어지지 않았는지, 사람들이 무엇으로 사는지 깨달아라. 세 가지 말을 깨달으면 천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 42쪽


첫 번째 진리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 두 번째는 인간에게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미리 알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마지막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한 걱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좋은 말이다. 흠..이쯤 되면 위대한 톨스토이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충분히 알겠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불편해진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배치된 것처럼 보이고, 사건은 마치 정답을 향해 움직이는 문제집의 예제처럼 흘러간다.

특히 부유한 신사가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오래 신을 장화를 주문했다가 결국 장례용 신발이 필요해지는 장면은 상징이 너무 진부하다.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굳이 이런 인물을 등장시켜야 했을까. 독자가 생각할 여지를 주기보다는 작가가 직접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주는 느낌이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다.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이 다른 여인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잘 자랐다는 사실을 통해 미하일은 마지막 진리를 깨닫는다. 여기서 작가는 사랑의 위대함을 강조하지만, 조금 비판적으로 보면 타인의 희생과 헌신을 너무 쉽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포장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과 사랑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분명 다른 이야기인데 말이다.


"나는 어떤 인간이든 자신에 대한 염려가 아닌 사랑을 통해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46쪽


이 책에서 대표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문장..... 자기 자신을 위한 걱정으로 사람은 살아간다. 자신을 위한 걱정은 이기심도 그 무엇도 아닌 인생 그 자체이다. 오늘도 내일도 사람은 복잡한 근심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현실에서 사람은 사랑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고, 가족을 책임져야 하며,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냉정한 선택을 해야 한다. 사랑이 삶의 중요한 조건인 것은 맞지만, 그것을 삶의 유일한 해답처럼 제시하는 순간 오히려 현실의 복잡함은 사라진다.

어쩌면 톨스토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진실이라기보다,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적 기준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기준이 너무 이상적이라는 데 있다. 세상에는 남을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선의를 베풀었다가 오히려 상처받는 사람도 있다.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훨씬 많다. 존재가치의 입증 또한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풀고 사랑해야만 존재를 인정받고 깨닫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이 책이 쓰인 시대와 작가가 전달하려던 하나님의 기독교적·윤리적 메시지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독자 입장에서 읽으면 다소 순진하고 교훈적인 우화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주인공들의 일상적 삶 속에서의 세세한 감정적 경험들이 뒷받침되어 중요한 순간에 여러 인물들이 갑작스러운 마음의 변화를 겪고, 이기심과 두려움이 아닌 사랑과 연민 때문에 행동하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내면의 변화가 일어날때마다 등장인물들은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감에 휩싸인다.

그런데 이 책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랑과 선행이라는 정답에 도달하는 순간 모든 의문과 갈등이 해소된 듯 행복해진다. 마치 작가가 정해 놓은 도덕적 결론에 도달하면 인간의 감정마저 그에 맞춰 정리되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삶의 진실은 깨달음의 순간 찾아오는 환희보다는,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이해하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순 속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이들의 행복한 미소가 감동적이기보다는 어딘가 작위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오히려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작품이 주는 감동보다, 인간은 왜 이렇게 단순한 진리를 끊임없이 확인받으려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상처를 준다. 진리를 아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책을 읽는가에 항상 습관처럼 이야기하는 게 있다. 독서는 인생의 해답을 얻는 과정도 맞지만, 오히려 인생은 정해진 해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라고.

오래된 현자의 말이라고 해서 반드시 깊은 통찰인 것은 아니며, 때로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도 위대한 문장의 옷을 입으면 철학처럼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인정하고 싶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은 단순한 답을 원한다는 것. 그리고 톨스토이는 그 답으로 사랑을 제시했다. 


미안한데...난 여전히 타인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이야기들에 질린다.


인간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라기보다, 사랑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잔인한 진실을 알면서도 끝내 사랑이라는 환상을 놓지 못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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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독서모임의 선정 도서는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이다.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과 마지막까지 경합했으니 이번 선택이 더욱 반갑고 뜻깊게 다가온다.

피천득 선생이라면 대한민국 국민에게 아마도 낯선 이름은 아닐 것이다. 

아사코를 그리워하며 인연의 아련함을 노래한 수필 〈인연〉을 기억하는 이들도 많을 테니 말이다. 

민음사 출판부가 선생의 수필들을 골라 469번 책으로 엮어낸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한때 읽었던 글들을 다시 만나는 반가움도 크지만,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글과 생각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은 기대 이상이다.


이미 읽었다고 여겼던 문장에서 전에는 보이지 않던 의미를 발견하고, 처음 만나는 수필에서는 뜻밖의 감동을 얻는다. 독서의 즐거움이란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지식을 하나 더 쌓는 데 그치지 않고, 익숙한 것들 사이에 숨어 있던 낯선 빛을 발견하는 일. 오래 알고 지낸 문장이 어느 날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오고, 그 문장 앞에서 나 또한 조금 달라져 있음을 깨닫는 일 말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을 더 많이 아는 일이 아니라,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바라볼 줄 알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처음 만났던 피천득 선생을 민음사 덕분에 다시 만난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때의 피천득과 그때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지금 다시 마주한 피천득과 지금의 나는 또 얼마나 달라졌을까.


같은 글을 읽어도 읽는 사람의 나이에 따라 마음에 닿는 문장은 달라지고, 같은 작가도 세월의 깊이만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책 속의 문장을 다시 만나는 일이 아니라, 그 문장을 읽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마주 앉는 일인지도 모른다.




피천득 선생을 다시 읽으며, 나는 고등학생때의 나를 만나고 중년의 나를 마주한다. 

책은 그대로인데 읽는 내가 달라졌다는 사실, 그것이 다시 읽는 책이 내게 주는 쓸쓸함이자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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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국조(일본 꿩)


꿩은 한국에도 있지만 일본 꿩(키지(キジ, 雉))은 일본의 고유종이다.

꿩이 국조인 이유는 일본의 설화 <모모타로>에 나오기 때문이다.

(...) 그런데 사실 일본 꿩이 일본의 국조라는 사실은 일본 사람도 대부분 모를 것이다.

나도 찾아볼 때까지 몰랐다. - 115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옮겨)쓴 <모모타로> 민담





2. 후지산


일본의 상징이라고 하면 후지산을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높이 3,776미터인 후지산은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 후지산을 그린 작품으로는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의 '후카쿠 36경'이 대표적이다.(...)

46점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이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아래'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실제 후지산이 보이는 온천도 인기가 많다. 그 중 하나는 도쿄 근교의 '하코네 온천'이다.




* 출처 : 위키백과



* 후지산이 보이는 하코네 온천



3. 벚꽃


일본 사람에게 벚꽃이 특별한 이유는 3월 말부터 4월 초에 피기 때문이다. 한국은 3월에 신학기가 시작하지만 일본은 4월에 시작한다. 졸업, 입학, 입사 시즌이 3월 말부터 4월 초다. 그래서 벚꽃을 보면 헤어짐과 만남의 추억이 떠오른다.

슬픔, 불안, 설렘 같은 감정을 벚꽃을 통해 느끼게 된다.(...)

하나미(花見)는 벚꽃 구경을 의미하는 데 한국처럼 걸어다니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벚나무 밑에 앉아서 음식과 술을 먹고 노는 일이다.(...)

벚꽃은 영화에도 많이 나온다. 특히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2007)>는 벚꽃이 효과적으로 쓰인 영화다.영화에서는 '초속 5센티미터'를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라고 표현한다. -119~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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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즈케(ぶぶ漬け, 교토)


오차즈케의 교토방언이 부부즈케다. 

* 부부 : 교토 공식 관광 안내에서는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식힐 때 나는 소리에서 유래


녹차를 뜻하는 일본어 '오차(お茶)'와 절임, 담금이란 뜻을 가진 명사 '쓰케(漬け)'가 결합한 말로써 '쓰케'가 연탁을 겪어 '오차즈케'가 된 것이다.


심야식당 3화에는 오차즈케 시스터즈가 나온다

아마 시즌1에서 톤지루(돼지고기와 채소를 넣어 끓이고 미소(일본식 된장)로 맛을 낸 일본의 대표적인 가정식 요리) 다음으로 가장 많이 나온 요리라고 생각이 든다.



유명한 오차즈케 시스터즈다.

항상 매실, 연어, 명란젓을 토핑해서 오차즈케를 즐긴다.

이 분들의 사연이 궁금하면 시즌1에 3화를 보면 되겠다.



이 음식이 바로 밥에 따뜻한 녹차를 부어먹는 음식 오차즈케, 교토 방언으로 부부즈케다.



책에서 일본사람의 특징을 언급하며 혼네와 다테마에를 설명한다

혼네(本音)는 개인의 내밀한 감정, 욕구, 가치관 등 마음속에 품은 진실된 생각이나 본심을 뜻하고, 다테마에(建前)는 사회적 관계를 원활하게 하고 타인과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겉으로 드러내는 공식적인 입장이나 태도, 배려 섞인 멘트를 의미한다.


그러면서, 다테마에라고 하면 교토사람을 떠올릴 사람이 많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부부즈케다.

밥에 따뜻한 녹차를 부어먹는 음식인데 교토사람이 집에 놀러 온 사람한테 "부부즈케 먹을래요?"라고 하면 "슬슬 집에 가라"는 뜻이다. "라면 먹고 갈래?"라는 의미로 통하는 한국과 정말 극과 극이다. 그만큼 교토 사람은 품위 있고 완곡한 표현을 쓴다는 이미지가 있다.

나쁘게 말하면 속마음을 알기 어렵다는 이미지다. - 101쪽


책에서 나오는 일화는 다테마에를 설명하면서 이야기하는 일종의 부부즈케 전설에 가깝다.

실제로는 "별 것은 없지만 부부즈케라도 먹으면서 조금 더 쉬었다 가세요"라는 교토식의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친절표현으로 설명한다. 한국으로 치면 "차린 건 별로 없는데 조금 드셔보시겠어요?"라는 겸손의 표현인 것처럼



부부즈케 자체가 교토의 생활과 밀접한 음식이었다.

에도시대 때는 지금처럼 매 끼니마다 새 밥을 지어먹는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식어버린 밥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때 뜨거운 차 등을 부어 토핑하면 간단하고 맛있는 한 끼 완성이다.

부부즈케는 이런 생활의 지혜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음식이기도 하다.


밥 위에 올리는 토핑 또한 매우 다양한데

김, 아라레(あられ), 우매보시(梅干し), 오오바(大葉), 미역(わかめ), 후리카케(ふりかけ) 등이 올라간다.




교토에 가면 부부즈케 한 그릇 먹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국의 누룽지탕 정도로 생각하면 비슷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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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늘 바쁘게 살까? 할 일이 많아서 바쁜 것도 맞지만, 가만히 있으면 왠지 불안하고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은 아닐까? 무기력하게 보내면 죄책감도 든다.쉬는 날에도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잠깐의 여유가 생기면 그 시간에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 음악이라도 들어야 되니,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허전하다.

어느 순간부터 쉬는 것조차 제대로 쉬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다. 참 이상한 일이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현대인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남이 시키지 않아도 자신을 몰아붙이고, 일을 끝내고 나면 또 다른 목표를 세운다. 열심히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언제까지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걸까. 목표를 달성하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막상 그곳에 도착하면 또 다른 목표가 기다리고 있다. 결국 우리는 끝없이 달리면서도 정작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예전 독서모임에서 읽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책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이런 삶에 조금 다른 시선을 던진다. 우리는 흔히 부지런함은 좋은 것이고 게으름은 고쳐야 할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별다른 의심 없이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꼭 그럴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은 정말 낭비일까.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충분히 생각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다. 오히려 무언가를 계속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제 생애 최고의 책을 꼽을 때면 늘 상위권에 자리하는 책이다. 동영상을 통해 한 편 한 편 듣고 읽어 나갈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특히 아내와 함께 영상을 보고 생각을 나누었던 시간은 더욱 특별했다.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서로 다른 감정과 생각을 나누며 함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강신주의 『장자수업』 중 '쓸모없음의 쓸모'에 관한 이야기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장자는 세상이 정해 놓은 쓸모의 기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쓸모없는 나무는 베이지 않고 오래 살아남는다. 쓸모가 없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쓸모없음 때문에 자기 삶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강신주의 말은 때로 신랄하고 거침없다. 세상이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와 통념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그런데 그 신랄함이 오히려 후련하게 다가온다. 애써 외면했던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마음속에 쌓아 두었던 상처와 응어리를 씻어 내리는 듯하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생각을 대신 말해 주는 것 같아 아프면서도 묘한 해방감과 위로를 느낀다.




세 권의 책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왜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하는가. 『피로사회』는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일하지 않는 시간의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장자수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쓸모라는 기준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물론 모든 일을 내려놓고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나 책임이 있고, 해야 할 일도 있다. 다만 책임을 다하는 것과 자신을 끊임없이 소모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바쁘다고 해서 반드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성과가 없다고 해서 그 시간이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가끔은 멈춰 서서 내가 왜 이렇게까지 애쓰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남은 생각은 이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온 것은 아닐까.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늘 무언가를 해내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하지만 사람의 가치를 성과나 능력만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아무런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한 날에도, 그저 평범하게 하루를 보낸 날에도 삶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일을 잘하려고 애쓰기보다 어떤 일은 적당히 내려놓고, 남들보다 앞서가려고 조급해하기보다 내 속도대로 걸어가는 것... 어쩌면 그런 삶이 게으른 삶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제대로 돌보는 삶일지도 모르겠다.


세 권의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해야 할 일은 많고, 바쁜 일상은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는 기억하고 싶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것도 좋지만,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평생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달려왔다면, 이제는 가끔 멈춰 서도 괜찮지 않을까. 그 멈춤이 게으름이 아니라 나 자신을 되찾는 시간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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