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기(征虎記)라는 책제목은 그대로 ‘호랑이를 정복한 기록’, 내지는 ‘호랑이를 잡은 기록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책은 1917년 11월부터 12월까지 일본의 기업가인 야마모토 다다사부로 (山本唯三郞,1878-1927)가 조선의 함경도와 전라도에서 한국 호랑이와 표범, 노루, 멧돼지, 기러기 등을 사냥한 기록입니다.
일제는 1917년 당시 해수구제(害獸驅除), 즉 ‘사람의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입히는 맹수를 퇴치한다’는 명목으로 행한 정책으로 이책의 저자들은 일제의 과도한 맹수사냥이 결국 한국 호랑이와 표범 등의 멸절을 가져왔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함경도의 북청 (北靑)지역과 같은 오지 산골마늘애는 밤에 호랑이와 표범이 자주 나타났다고 하나 일제의 과도한 남획으로 이미 1917년 사냥을 한 기록에도 백두산 등지에서 호랑이를 더이상 보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일제는 한국 호랑이와 표범 등 맹수들을 멸절시켰을 뿐 아니라 독도의 강치도 남획으로 멸절시켰습니다. 이는 해수구제의 명분보다 모피와 기름을 얻으려는 경제적 목적이 더 강했습니다.
주강현 교수님의 ‘독도강치 멸종사(서해문집,2016)’을 보시면 일제가 얼마나 주도면밀하개 강치를 남획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시마네현(島根県)에서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우기는 주장을 하는 역사적 이유도 일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40대 일본인 기업가는 조선의 유명한 호랑이 사냥꾼인 백운학과 강용근을 고용하고 사냥에 나섰습니다.
사냥부대에 합류한 일본인 사냥꾼 기쿠타니 리키조(菊谷力藏)는 함경남도 영흥에 살고 있는 일본인으로 1917년의 이 사냥 이전에 이미 1년에 호랑이를 다섯 마리, 표범을 두 마리씩 잡았다고 언급(p174) 된 것으로 보아 일본인들의 맹수 남획이 극도로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울대 수의과 대학 이항 교수팀애서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했는데, 이 책은 사실상 한국 호랑이에 대해 알 수 있는 근대적 사료라는 점에서 그 번역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사냥 기록의 번역과 기록 사진, 그리고 사료에 대한 해제(解題)가 앞부분에 붙어 있어 전반적인 자료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현재 이 때 잡은 한국 호랑이의 표본은 일본 쿄토의 도시샤( 同志社) 고등학교 표본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시인 윤동주가 수학한 곳으로 유명한 이곳에 한국 호랑이의 표본이 있다니!
19세기 영국이 새계각국을 조사하고 해도를 작성하면서 자연생태를 관찰하고 표본을 수집했듯이 일본도 새로 식민지가 된 조선땅과 연해주, 만주 지방을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국의 찰스 다윈( Charles Darwin,1809-1882)이 1832년 비이글호 ( H.M.S. Beagle)를 타고 갈라파고스 섬을 탐험한 것이고, 미국도 비슷한 시기 남극 대륙 연안과 지금의 캘리포니아쪽 태평양 연안을 탐사하고 생물 표본을 만들고 해도를 만들었습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 (The Smithsonian Institution )이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죠 (Nathaniel Philbrick, Sea of Glory,Penguin,2004)
일제는 서양이 행한 모든 것을 식민지인 조선에서 행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책의 주인공인 기업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는 이 사냥이 끝나고 호기롭게 일본의 고관들을 초대해 경성의 조선호텔과 도쿄의 제국호텔에서 호랑이 고기 만찬회까지 열었습니다.
그리고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기가 내리막을 걷다가 대공황을 맞이하게 되자 그가 조선에서 벌이던 탄광사업과 선박업이 직격탄을 맞았고 연회가 열린 후 10년만인 1927년 사망하게 됩니다.
오만해 보이기까지도 한 호랑이 고기 시식회나 그가 사냥에서 남긴 의기양양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다소 어이없는 몰락입니다.
끝으로 이책에 실린 귀한 사진 몇 장 같이 올립니다.
한반도에 호랑이 살았었다는 귀중한 기록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