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na: The People's Middle Kingdom and the U.S.A. (Hardcover, Reprint 2013)
John K. Fairbank / Harvard University Press / 196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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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존 K. 페어뱅크 (John K. Fairbank) 하버드대 교수는 미국에 중국학(Sinology)를 확립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우스 다코다 주에서 태어난 이분은 위스콘신과 하버드 그리고 옥스포드에서 공부를 하셨습니다.
중국학은 옥스포드에서 처음 접했다고 하네요.
1936년부터 1977년까지 하버드에서 중국학을 가르쳤고 1991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반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책은 이분이 저술한 ‘중국사(China:A New History,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1992)’ 입니다.


이 책은 1967년 출판된 책으로 저자의 잡지 기고문과 대학강연 그리고 미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 기록 등을 모은 책입니다.

대부분의 글들이 1966년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먼저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글 중 타이완의 ‘독립’과 ‘두개의 중국’을 주장하는 2부는 2021년 현재 미국과 중국사이에 타이완을 서이에 둔 긴장관계를 생각할 때 미국 외교당국이 타이완을 지닌 50여년산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그 단초를 찿을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반도체 와이퍼 가공 기술을 보유한 타이완은 전략적 측면에서 미국에 매우 중요한 곳이고, 중국 봉쇄의 측면에서도 전략적 가치가 있는 지역입니다.
미국은 현재 중국의 ‘하나의 중국’정책에 결사반대하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책의 타이틀에 ‘Middle Kingdom’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도 중국사회가 서양의 중세때처럼 ‘후진적’이라고 본 페어뱅크 교수의 시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1966년 당시 미국이공산화된 중국을 얼마나 뒤떨어진 후진사회로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966년에는 중국혁명 ( The Chinese Revolution)을 성공시킨 마오쩌뚱(毛澤東,1893-1976)이 아직 생존해 있을 때였고, 미국과 중국과의 수교(1979)이 이루어지기 전입니다.

미국과 중국은 적대적 관계를 이루고 있었고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의 공산주의를 봉쇄하면서 핵전쟁이 일어나게 하지 않는 방식을 찿는데 고심을 하던 시기입니다.

중국은 독자적 노선을 걸으며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 다른 길을 추구했습니다.

페어뱅크 교수는 당시의 중국이 공산주의의 영향보다 수천년간 이어져온 유교적 전통과 시험을 통과한 엘리트 관료들의 권력 독점의 전통, 화이론 (華夷論)에 입각한 중국우선주의와 광활한 영토와 자원에 기반한 중국의 내수경제 우선주의의 전통이 중국이 국제사회에 진출하지 못하는 원인이라고 진단합니다.

중국사에 정통한 인물인 만큼 중국의 중세 근세와 혼란스러운 근대에 이루는 시기를 종횡으로 누비면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합니다.

유교에 기반한 통치의 원리는 이민족이 중국을 지배했던 13세기 몽골의 원나라 시기나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어진 청나라 시기에도 변하지 않았고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中華)주의는 그 연원이 거슬러 중국의 고대 청동기 시대에 이르기 때문에 매우 뿌리가 깊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중국에 문호개방을 요구할 때도 이 중화사상을 유지하고 서양세력들을 오랑캐로 여기고 조공을 요구했습니다.

초기에 이 요구에 순응했던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하지만 이후 군함을 동원하며 국제조약을 요구했고 중국은 이때 맺은 불평등 조약으로 서양열강에 종속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비슷한 상황을 맞았던 일본은 서양열강과 초기에 맺은 불평등 조약을 평등한 관계로 개정했으나 중국은 그러지 못한 상태로 청왕조가 무너지고 군벌 시대를 거치고 일본의 침략을 받으며 대혼란의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마국인으로서 페리 제독(Commodore Perry)이 일본의 개항을 요구한 이후 일본이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서구화를 이루고 1966년 미국의 동아시아의 파트너가 된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반면 중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한 저개발국이라는 면을 비교합니다.

한국전쟁이 휴전을 맺고 중단된지 13년 밖에 안된 시점이고 , 1964년 일본은 도쿄올림픽까지 치룬 상황이니 이런 판단이 무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은 공산주의 봉쇄정책(containment)을 위해 한국과 일본을 자신들의 이익 방어선으로 삼았고 , 중국식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베트남 전쟁(1960-1975)을 치루는 와중이었습니다.

한번에 두곳에서 전쟁을 할 수 없으므로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과의 전쟁은 막고 최대한 중국과 대화를 이끌어내야 했으나 영미식 개인주의와 법치주의에 익숙한 미국인들이 집단주의와 아시아 전통인 인간관계주의와 가족을 기본으로 사회전체가 위계에 의해 움직이는 중국의 유교적 전체주의에 익숙한 중국인들과는 문화적 차이로 인해 서로를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미국이 중국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를 강조합니다.

1966년 당시 타이완의 장개석 총통(1887-1975)의 국민당 정부가 국제연합을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에서 중국을 대표해 자리하고 있었고, 중국은 이때문에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전혀 못 얻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79년 미중수교 이후 타이완은 미국과 외교가 단절되고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고 그 자리를 중국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경우도 1992년 중국과 정식수교관계가 수립된 이후 명동에 있었던 타이완 대사관이 중국대사관으로 바뀌고 타이완과 외교가 단절되는 동일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 자체에 대해 몇가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으로 과거 육군사관학교 도서관에 있었던 책이고 그 이전에는 미군의 자산으로 등재되어 있던 책입니다.

미국의 입장에서 동아시아에 주둔하는 미군들이 동아시아의 상황을 아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추정합니다.

미국의 지역학이 철저하게 미국의 세계전략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66년 시점에 중국을 평생 연구한 학자답게 비록 미국인의 입장이지만 그래도 중국과 동아시아의 유교적 정치체제에 대해 나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은 매우 인상적입니다만, 2021년 현재 일반적인 미국인들이 이분과 같은 태도와 솔직함을 겸비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국인을 비롯한 서구인들의 특징은 외부세계에 대한 무관심(ignorance)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새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결코 이들이 서구사회애서 주류이거나 대다수가 한국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도 한국이 언급은 되고 있지만 매우 단편적이고 미국의 이익방어선 정도로만 이해가 되고 있고, 오히려 공산주의 중국과 일본이 자주 비교됩니다.

미국인으로서 일본이 선진국이 된 것에 대한 자랑스러움도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미국이 페리제독의 개항이후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을 미국이 군사적 방패가 되어 일본의 발전되었다는 뚜렷한 시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제국주의(imperialism)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솔직히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미국은 분명 서구 유럽과는 다른 그들만의 제국주의를 추구했는데 말입니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 한반도와 일본은 패전으로 미국에 점령(Occupied)되었으며 미국은 자신들의 제도를 일본과 한국에 이식했습니다. 한국에서 미 군부는 기존의 통치조직 위에서 군림했습니다. 저자가 주장한 것처럼 제국주의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과도한 ‘점령’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대륙의 러시아와 중국 공산주의 세력을 봉쇄하기 위해 일본의 오끼나와(沖縄)와 규슈의 사세보(佐世保)항에 군사기지를 설치했으며 한반도 38도선 아래에서는 서울 용산과 의정부, 평택항 등지에 미군 기지를 세워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미국의 제국주의적 의도가 전혀 없다고 보는 건 너무 동기를 순수하게 보는 무리한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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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 - 풍문부터 실록까지 괴물이 만난 조선
곽재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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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조실록을 비롯한 고대 중근세 기록물에 보이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책 내용도 흥미롭지만 뒷쪽에 정리한 서지목록이 흥미롭습니다. 멀리는 고조선 고구려 신라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걸친 괴물이야기이고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의 판단으로만 평가할 이야기는 아닌 듯 합니다.

드라마 작가인 저자가 한국 고유의 괴물 이야기를 정리한 것으로 의의가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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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기(征虎記)라는 책제목은 그대로 ‘호랑이를 정복한 기록’, 내지는 ‘호랑이를 잡은 기록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책은 1917년 11월부터 12월까지 일본의 기업가인 야마모토 다다사부로 (山本唯三郞,1878-1927)가 조선의 함경도와 전라도에서 한국 호랑이와 표범, 노루, 멧돼지, 기러기 등을 사냥한 기록입니다.

일제는 1917년 당시 해수구제(害獸驅除), 즉 ‘사람의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입히는 맹수를 퇴치한다’는 명목으로 행한 정책으로 이책의 저자들은 일제의 과도한 맹수사냥이 결국 한국 호랑이와 표범 등의 멸절을 가져왔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함경도의 북청 (北靑)지역과 같은 오지 산골마늘애는 밤에 호랑이와 표범이 자주 나타났다고 하나 일제의 과도한 남획으로 이미 1917년 사냥을 한 기록에도 백두산 등지에서 호랑이를 더이상 보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일제는 한국 호랑이와 표범 등 맹수들을 멸절시켰을 뿐 아니라 독도의 강치도 남획으로 멸절시켰습니다. 이는 해수구제의 명분보다 모피와 기름을 얻으려는 경제적 목적이 더 강했습니다.

주강현 교수님의 ‘독도강치 멸종사(서해문집,2016)’을 보시면 일제가 얼마나 주도면밀하개 강치를 남획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시마네현(島根県)에서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우기는 주장을 하는 역사적 이유도 일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40대 일본인 기업가는 조선의 유명한 호랑이 사냥꾼인 백운학과 강용근을 고용하고 사냥에 나섰습니다.

사냥부대에 합류한 일본인 사냥꾼 기쿠타니 리키조(菊谷力藏)는 함경남도 영흥에 살고 있는 일본인으로 1917년의 이 사냥 이전에 이미 1년에 호랑이를 다섯 마리, 표범을 두 마리씩 잡았다고 언급(p174) 된 것으로 보아 일본인들의 맹수 남획이 극도로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울대 수의과 대학 이항 교수팀애서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했는데, 이 책은 사실상 한국 호랑이에 대해 알 수 있는 근대적 사료라는 점에서 그 번역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사냥 기록의 번역과 기록 사진, 그리고 사료에 대한 해제(解題)가 앞부분에 붙어 있어 전반적인 자료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현재 이 때 잡은 한국 호랑이의 표본은 일본 쿄토의 도시샤( 同志社) 고등학교 표본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시인 윤동주가 수학한 곳으로 유명한 이곳에 한국 호랑이의 표본이 있다니!

19세기 영국이 새계각국을 조사하고 해도를 작성하면서 자연생태를 관찰하고 표본을 수집했듯이 일본도 새로 식민지가 된 조선땅과 연해주, 만주 지방을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국의 찰스 다윈( Charles Darwin,1809-1882)이 1832년 비이글호 ( H.M.S. Beagle)를 타고 갈라파고스 섬을 탐험한 것이고, 미국도 비슷한 시기 남극 대륙 연안과 지금의 캘리포니아쪽 태평양 연안을 탐사하고 생물 표본을 만들고 해도를 만들었습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 (The Smithsonian Institution )이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죠 (Nathaniel Philbrick, Sea of Glory,Penguin,2004)

일제는 서양이 행한 모든 것을 식민지인 조선에서 행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책의 주인공인 기업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는 이 사냥이 끝나고 호기롭게 일본의 고관들을 초대해 경성의 조선호텔과 도쿄의 제국호텔에서 호랑이 고기 만찬회까지 열었습니다.

그리고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기가 내리막을 걷다가 대공황을 맞이하게 되자 그가 조선에서 벌이던 탄광사업과 선박업이 직격탄을 맞았고 연회가 열린 후 10년만인 1927년 사망하게 됩니다.

오만해 보이기까지도 한 호랑이 고기 시식회나 그가 사냥에서 남긴 의기양양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다소 어이없는 몰락입니다.

끝으로 이책에 실린 귀한 사진 몇 장 같이 올립니다.
한반도에 호랑이 살았었다는 귀중한 기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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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일문학을 배우고 응용언어학을 공부한 미국인 언어학자 로버트 파우저씨가 ‘한글’로 쓴 도시탐구기입니다.

서울출생으로 도시에서만 살아온 도시인으로서 도시의 여러 인문지리적 현상에 대해 늘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책은 범주를 굳이 나눈다면 인문학자가 쓴 도시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시학 ( Urban Studies)이나 건축 (Architecture)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평소 살아온 경험이나 인문학적 감성 그리고 이 저자가 보여주는 평소의 식견으로 충분히 훌륭한 도시론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유사한 범주의 책을 읽었는데 서울의 일반 서민들의 살아온 흔적을 답사한 김시덕 작가의 서울 답사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서지학과 전쟁사를 전공한 김작가는 ‘서지학적 방법론’을 도시답사에 적용해 서울과 그 위성도시들, 서울과 경인지역의 관계를 일제시대까지 소급해 살폈습니다 ( 서울선언, 2018 & 갈등 도시,2019)

이 책의 미덕은 이전에 문화재 위주로 조선시대 유적위주로 행해지던 도시답사를 근현대 시기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현재의 서울에 맞춰 현재 서울의 공간을 일반 서민들의 생활과 연관지어 바라본 것입니다.

파우저씨의 책은 서울을 포함한 한국의 도시뿐만 아니라 저자가 살았거나 인연이 있어 자주 방문했던 영어권의 도시들과 일본의 도시를 대상으로 합니다.
제가 인상깊었던 도시를 꼽자면 일본의 가고시마와 아일랜드 더블린입니다. 두 도시는 공교롭게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도시들입니다. 일본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는 고립된 규수 남부 지방도시이지만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나온 특이한 지역으로 젊은이들이 지역에 남아 일원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더블린은 저자가 언어학 박사학위를 공부한 곳으로 20세기 초 모더니즘 문학가 제임스조이스(James Joyce, 1882-1941)의 고향이자 아일랜드의 수도입니다. 영연방이지만 잉글랜드와 다른 독립국가이고 영국의 오랜 식민지배로 아일랜드어를 잃어버리고 영어를 쓰는 국가입니다.
영국이 아일랜드 지배를 위해 16세기에 더블린에 트리니티 컬리지 (Trinity College Dublin)를 세우고 영국에 협력할 수 있는 지배층을 양성했다는 사실은 일제시대 식민지 조선의 지배층 양성을 위해 경성에 제국대학을 세운 일제의 모습과 겹칩니다. 일본이 영국의 정책을 모방했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특히 각 도시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시간이 지나면서 생기는 도시화와 재개발, 그리고 도시 재생의 문제를 상당한 전문가적 식견으로 설명합니다.
도시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저자가 살아온 여러 도시에서의 삶과 저자가 느낀 점을 적은 에세이이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사는 공간과 도시의 경관이 정치인들의 의지에 따라 일반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삶의 공간과 결부되어 기억되는 추억과 경험이 얼마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각 도시에 얼마나 괜찮은 헌책방이 존재하는지 이 책에 잘 나와있습니다.

사람들의 삶과 그 공간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각 도시에 대한 나름의 시각을 이렇게 펼치기 여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자가 서울에 거주할 당시 한옥에 살면서 서촌의 한옥보전운동을 한 적이 있는데, 도시개발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영향을 주고 역사의 시간이 쌓인 공간을 배려하고 보존하면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반드시 경청해야 할 주장입니다.
부동산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토건세력들과 그에 결탁한 기득권층이 부동산으로 불로소득을 얻고 그 구조가 당연시되는 마당에 원주민의 기존의 삶을 보장하고 공동체의 편익을 위해 도시재생을 하고 재개발을 해야한다는 주장은 이 책에 실린 다양한 외국도시들의 사례를 통해 가능성을 입증시킵니다.

이익을 추구하려고 역사의 흔적을 망치는 우를 또 범해서야 될까요?

서울시장으로 두번째 당선되신 오세훈씨가 MB 시절 진행했던 종로 재개발은 제가 생각하는 최악의 개발 중 하나입니다.

광화문 교보문고 건너편에서 시작되던 ‘피맛골’의 옛 흔적은 남김없이 사라지고 고층 ‘쇼핑센터’가 자리잡아 서울이 아니어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상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당시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있던 독특한 피맛골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린 이유는 역사보다 이익만을 우선하는 사고방식이외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토건 원류세력이 정권을 잡을 때 개발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지 알 수 있는 사례입니다.

이 개발로 청진동의 옛모습도 모두 사라졌죠.

조선시대 500년은 현재 서울 사람들과 아무 연관도 없는데도 보존한다고 난리면서, 왜 직접적인 연관이 있던 피맛골, 청진동의 흔적이 사라지는 건 괜찮은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한국이 20세기 초부터 경험한 일제시대에 관심이 많은 독자로서 기억해야 할 그 시대 서민의 역사가 그 시대의 건축양식이 단지 ‘왜색 ( 倭色)’ 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헐리는 것은 반대합니다.

부끄럽기 때문에라도 당시 흔적을 알리고 교육해야 하므로 보통사람들이 그 당시 어떻게 살았나 알기 위해서라도 일제시대에 지어진 일본식 주택이 보존되어야 합니다. 싫어도 눈에 보여야 잊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흔적을 없애려는 세력은 돈때문일 수도 있지만 일제에 부역한 적이 없는지도 의심해야 합니다.

범죄자가 증거인멸을 시도하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눈에 보이지 않아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치밀한 계산의 결과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저자 파우저씨는 애호가 수준을 넘어서는 수준의 사진가로 알려졌는데, 그의 도시공간에 대한 관찰은 그가 사진을 찍으며 평소 공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서 나온 결과로 보입니다.

사진가는 당연히 자신의 파인더로 보이는 풍경과 피사체에 애정을 가지고 좋아하는 장소는 무수히 방문하게 됩니다. 같은 장소도 아침과 저녁에 다르고 여름과 겨울이 다르며 눈이 오거나 비가 온후와 그냥 활짝 개어 있을 때 다릅니다.

더구나 좋아하는 공간과 경관이 재개발이나 도시재생으로 바뀌게 된다면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육안으로 관찰하는 행위는 피상적일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매우 구체적이고 직관적인 것으로 내공이 깊어지면 단순한 논리 이상을 꿰뚫는 힘을 가집니다.

그리고 공간에 대한 관심은 남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공간의 특징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는 매우 예민한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이 책에 포함된 사진 상당수가 저자가 오래전부터 직접 찍어 장소를 기록한 사진들이고 글과 함께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고 과거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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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된 시간 - 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 서강학술총서 27
계승범 지음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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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년부터 1907년까지 약 200여년의 조선후기 시기 대보단((大報壇)이라는 제단에서 명의 삼황제에게 의식을 올리던 조선 지배층들의 의식의 변천사를 연구한 책입니다.

서강대 사학과 계승범 교수께서 2011년 쓰신 책입니다.

이책의 핵심적인 단어 하나만 고르라면 바로 존명의리(尊明義理), 즉 명나라를 존경하고 의리를 지킨다라는 말입니다.

다른말로 제조지은 (再造之恩)이라는 용어도 있습니다. 이말의 뜻은 (임진왜란으로부터) 명나라가 조선을 지켜준 은혜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역사를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하기보다 당시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수긍하는 편이지만, 오늘의 주제는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하려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조선 후기 양반지식인들의 두 믿음은 사실 ‘이상하다’ 내지 ‘병적이다’라는 평가말고 다른 어떤 평가를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대보단의 의미도 (이미 망한) 명나라에게 큰 보답 (大報)을 기리기 위한 제단이라는 의미입니다.

1704년 중국의 중원은 이미 만주족의 대청국(다이칭구룬; 大淸國)이 지배하고 있었고, 조선은 병자호란의 패배로 이미 청에게 삼전도에서 항복(1637)을 했습니다. 명나라는 청에 의해 1644년 멸망했습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불 때, 아무리 명나라의 은혜로 나라를 구원받아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살아남았다고 해도 1644년 망한 명나라를 60년이나 지난후부터 조선의 궁궐인 창덕궁에 제단을 만들고 왕이 친히 200여년이나 제사를 지내고, 더구나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침탈이 시작되고 만국공법(萬國公法)이 도입되는 시기까지 이 제사가 이어지는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계승범 교수께서도 이런 제사는 세계사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이런 이례적 의례의 정치적 함의는 왜 이 책의 제목이 ‘정지된 시간’인지 알려줍니다 .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 양반들은 명에대한 화이론(華夷論)과 존주론 (尊周論)적 대외관계론과 세계관이라는 관념적 세계에서 단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체 1644년 이후 그대로 멈춰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지된 시간’입니다. 이미 현실은 1664년 이후 오랑캐인 만주족이 중국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 이전 병자호란의 결과 삼전도에서의 항복으로 청과도 천자와 제후의 관계를 수립하고 중국의 왕조로서 조공-책봉관계를 수립하고 있었는데도 조선의 지배층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사대부 지배층은 이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전쟁을 계기로 사실상 그들의 ‘무능’을 검증받은 셈이었습니다.

무능한 사대부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고 머리 속의 관념에 매몰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희의 유학인 성리학만을 신성시하며 유학의 다른 유파인 양명학조차 경원시하던 양반 사대부들은 사실상 호위호식하며 아무 생산활동도 안 한체 모든 부담을 양민들과 농민들에게 지우고 있었습니다.

같은 양반이라도 기호지방이나 영남출신만 출사의 기회를 가졌고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은 지역적 차별을 받았습니다.

무인을 천시하고 상업을 천시하니 생산성이 올라갈 리 없고 국방력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평양으로 의주로 달아가기 바빴고 심지어 명나라에 망명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일본과 명은 조선의 통치력 부재를 틈타 조선의 분할을 가지고 외교교섭까지 벌였습니다.

조선이 명에게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던 이유는 국방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국가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양반들은 임진왜란에서 명이 도와주었다고 해서 ‘나라를 지킨 은혜 ( 재조지은, 再造之恩)’라고 명을 다시 떠받드는 어처구니 없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특히 성리학의 노론(老論)계통이 이런 생각을 교조적으로 밀어붙인 장본인들입니다.

조선시대 송자(宋子)로 불린 송시열(宋時烈)이 현대에 와서 많은 비판을 받는 이유가 바로 이런 황당한 믿음과 생각을 조선지배층에게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노론 성리학자들의 폐단은 단지 17-18세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정조 사후 19세기에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주역이 되어 조선의 정치 경제를 망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순조이후 임금들이 사실상 척족세력에 휘둘려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19세기에 수많은 민란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노론 성리학 지배층들이 국정을 100여년간 농단했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의 사익을 위해 국가의 통치구조를 와해시키고 공권력을 가지고 사익추구를 했으니 국정농단 말고 다른 말을 찿기 힘듭니다.

즉 이들은 교조적이고 완고한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조선을 세계에서 고립시키고 국가의 통찰력을 사적으로 이용해 본인들 배를 불린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국가가 힘이 없고 군사력이 약하면 어떻게 이를 양성하고 더 강하게 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아지만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런 실질적인 행위는 하지 않고 명나라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고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실제 청으로부터 국왕의 책봉을 받은 외교현실을 그들이 오랑캐라는 아유 하나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조선이 20세기 초 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미 16세기 임진왜란때부터 그 씨앗이 있었고 병자호란 이후 더 확고해졌다고 확인하는 건 참 씁쓸합니다.

일단 조선의 사대부가 결국 조선 망국의 원인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들을 더 알아보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리 의리가 중요하다고 해도 타국에서 망한 나라의 제사를 자그마치 200여년간 지내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이상한 것이고 성리학자들이 와 병적으로 이런 행위에 집착했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심없이 조선의 지배층을 바라보려 해도 자신만의 세계에 갖혀 허우적거리면서도 기득권은 놓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언급하려고 합니다.

계몽절대군주로 알려진 정조는 사실 과거와 존명의리에 집착한 보수적 절대군주였다는 주장입니다. 정조는 성리학적 지식에 통달한 성리학적 철인군주이만 계몽적 절대군주는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하십니다.

서양사에서 계몽주의 (enlightenment)의 영향을 받은 동유럽 지역의 절대군주를 뜻하는 계몽절대군주라는 개념은 성리학적 전제군주인 정조를 설명하는데 적합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정조시대를 과장되게 근대의 길목으로 보는 건 과도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조가 존명의리(尊明義理)를 철저히 숭상하고 대보단의 의례를 국가의례로 확립했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정조 때 일어난 북학 (北學)파는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자는 주장을 하는 일군의 학자들인데 저자는 그들이 소수였다고 주장하십니다. 저도 여기 동감합니다.

명이 멸망한지 100년이 넘도록 ‘재조지은’과 ‘존명의리’를 핵심적 세계관으로 믿고 있는 주류 사대부들이 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배우자는 북학을 반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이후 북경에서 많은 서양선교사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고 사행(使行)을 통해 일부 양반들이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접할 수 있었지만 교조적이고 완고한 성리학자들은 이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 철저하게 망한 명나라와의 의리만을 지키는 행보를 지속했습니다.

이책은 조선 양반지배층의 세계관이 현재 관점에서 보았을 때 상당히 병리적 (病理的,pathological)인 측면이 있었다는 것을 실증해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반들이 지배층이면서도 통치의 기본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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