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6장으로 이루어진 일제강점기 조선의 문화/ 풍속에 관한 책입니다.

미국 오레곤 대학교(University of Oregon)의 소장된 작품들을 연구해서 서양 특히 영미권의 지식인들이 일제강점하의 조선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연구한 책입니다.

본문이 총 194쪽 밖에 되지 않으니 약간 학술적인 산문 정도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서구 유럽이 비서구, 특히 중동과 동양( 또는 아시아)를 어떻게 보는지는 특히 비교문학 ( comparative literature)분야에서 그 단초를 제시하고 인문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관점입니다.

팔레스타인 출신 미국의 문예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의 명저 ‘오리엔털리즘( Orientalism, Vintage, 1978)’이 그 이론적 분석틀을 처음 제공했습니다.

한국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에 따른 서구의 ‘시선의 정치학(the politics of gazing)’을 다룬 책은 물론 이 책이 처음은 아닙니다.

오리엔탈리즘이 기본적으로 동양을 여성적이며 정적인 대상이며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ahistorical) 주체가 아닌 대상 (objective)으로 보고 있으며, 남성적이고 역동적인 문명국인 서양의 국가들이 비문명적인 동양을 계몽하고 깨우쳐 문명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서양의 백인 남성들이 저지른 폭력과 착취 그리고 식민화의 역사가 고스란히 소거된 체 겨우 300여년에 이르는 서구 유럽의 경제적 힘의 우위를 절대적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점자체가 매우 폭력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부터 로마제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변방에 머물렀던 서유럽이 이렇게 오만하고 폭력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그들이 경제발전을 위해 저질러온 식민지에 대한 착취와 노예무역의 역사를 지우고 고상하게 포장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자체의 폭력성은 공산주의가 사라졌다고 해도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골수 자본주의자들, 특히 근본주의적 시장자본주의자들이 왜 그렇게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성을 공격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보기엔 폭력적인 건 두 체제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아무튼 한국어로 쓰여진 책 중에서 제 인상에 가장 많이 남은 책은 고미숙 선생이 2001년 출판하신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찿아서 (책세상,2001)’입니다.

근대적 신체의 탄생과 병리학과의 관계, 위생관념과 근대개념을 연결시키면서 문명안들인 서양인들이 근대 초기 조선인들을 어떻게 인식했든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책의 주인공인 세여인도 모두 기독교인이고, 모두 중산층이상의 집안에서 여유롭게 교육을 받았던 20세기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배경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베라 잉거슨 (Vera Ingerson)은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미국인으로 특히 기독교의 교세가 강하기로 유명한 평안도 선천, 정주, 강계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신의 미국여인으로 조선으로 오기 전 전문적인 간호교육을 받았습니다.

평안북도는 일제상점기 이전부터 청과의 사행로에 위치한 지역으로 조선에서 한양 다음으로 큰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고, 오래전부터 대외무역이 종사해 해외의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거리낌이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서양인들의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현재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는 감히교파가 모두 평안도에서 월남을 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우 반공 세력이 나온 지역이면서도 또한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진출한 반일 세력의 근거지이기도 한 곳입니다.

조선말기 19세기 평안도에서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에 대해서는 아래의 책을 참조바랍니다.

조선의 변방과 반란, 1812년 홍경래난 (푸른역사, 2020)


다음 인물인 거트루드 워너(Gertrude Warner)는 시카고 출신의 아시아 유물 컬렉터로 기본적으로 조선보다 중국과 일본의 고미술품과 풍속에 관심이 많은 여성이었습니다.

글 서두에서 소개된 시카고 대학 교수인 프레드릭 스타(Fredrick Starr)외의 인연으로 그가 ‘조선불교’에 대한 강연 관련 조선의 불교 관련 사진과 슬라이드를 사들이기도 했던 그녀는 세번째 주인공인 영국출신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Elizabeth Keith)외의 친분으로 조선의 고미술품과 사진을 더욱 많이 수집하고 키스의 목판화를 다수 소장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엘리자베스 키스는 이책뿐만 아니라 이미 그녀의 목판화에 대한 책들이 한국에 출판되어 있어 낯설지 않은 화가입니다.

세명 중 유일하게 영국출신이고 일본에 오랫동안 살았던 일본통 독신여성입니다. 일본에서 목판화 (우키요에, Ukiyoe, 浮世絵)를 배워 자신의 사실적인 회풍에 접목시킨 화가로 유명합니다.

최근 그녀의 저서 중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올드 코리아 (책과함께,2020)’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책은 그녀가 1946년 런던에서 출판한 ‘’Old Korea’를 번역한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조선에 처음 입국해서 일제의 조선인 탄압을 직접 목격해 조선인들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을 가졌던 화가로 알려졌습니다.

이책은 저자가 언급했듯이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사례연구’에 해당됩니다.

대부분 지금부터 100여년 전에 활동한 영미권 여성들에 해당되는 사례이지만 서구 특히 영미권의 오리엔털리즘은 극복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확대와 관련하여 중국에 대한 거짓정보가 내외신 가리지 않고 난무했던 사실이나 최근 타이완을 둘러싼 중국과의 긴장관계가 커지자 영미권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국과의 전쟁을 거론하는 듯 백인들 사이에서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도를 넘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서구문명이 중국에 뒤쳐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내제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17세기-20세기를 제외하고 중국이 문명국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지식인들은 그래서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1960년대 문화혁명 시기까지만 해도 별볼일 없던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이미 일본을 추월한 상태여서 일본을 아시아 정책의 축으로 삼았던 미국에서 격렬한 반응이 더 나오는 것 같습니다. 군사적 긴장이지만 그 내면에는 오리엔탈리즘이 깔려있고 서구의 오만함(arrogance)이 깔려 있습니다.

정치와 예술은 별개의 분야가 아니고 무의식과 행동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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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책은 1968년 미국에서 출판된 미국의 아시아정책에 관련된 책입니다.

Beyond Vietnam: The United States and Asia(Alfred. A. Knopf,1968)


위의 책이 오늘 소개할 책으로 출간된 지 53년이 되었습니다. 이런 고서를 소개하는 건 1968년 당시의 상황을 당시의 시각으로 생생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당시의 상황이 현대사로 포함되어 있어 현재시점에서 비교가 가능한 것도 고서를 읽는 이유입니다.

1968년이면 아직 베트남전쟁(1960-1975)이 종결되지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은 1961년 군사쿠데타로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 있었고, 1965년 한국과 일본사이에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고 베트남전에 한국군이 파견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의 저자 라이샤우워 교수는 1961-1965년 기간동안 주일미국대사를 지낸 분으로 책에는 언급이 없지만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에 관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은 아직 농업국가였고 경제개발계획이 진행중이었으며 아직 경부고속도로도 완공되기 전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국공내전(Chinese Civil War, 國共內戰,1927-1950)을 숭리로 이끈 마오쩌뚱(毛澤東)이 아직 살아있었고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은 1965년 북베트남에 대규모 폭격을 했지만 전쟁에서 승기를 잡지 못하고 남베트남 지역에서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에 밀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서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뺄 수 있는 방법을 찿는데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전문가인 저자는 일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데 일본이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유일하게 아시아에서 근대화/서구화애 성공한 나라로 다른 저개발된 아시아의 나라와 다르고 미국의 중요한 아시아정책 파트너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한국과 만주에서 식민화를 시킨 역사는 고스란히 설명이 빠져있습니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패전이후 미군이 일본을 점령하고 일본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시켰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언급합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군정을 실시하면서 일제 시대 전범과 친일파들을 그대로 중용시켜 두 사회의 체제붕괴를 막고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세력에 대응하는 봉쇄정선을 구축했습니다. 미국입장에서 패전이전까지 일본이었던 한국에서 친일파들이 일제 당시의 직무를 그대로 해방 후에도 하는 건 미국이 묵인하고 당시 아시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미국입장에서 취할 단기적 해결책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튼 일본과 한국에서의 미국 점령군(occupied force)이 행한 군정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세계대전 당시 육군정보 계통에서 일을 하고 한국과 일본에서 연구를 한 미국의 제1세대 일본/동아시아 전문가로서 1961-1965년까지 주일대사를 지낸 분이라서 아무래도 친일적인 성향이 보입니다.

당시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로 패전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1965년 도쿄올림픽도 치루고 해서 아시아에서 선진국 반열에 든 유일한 나라라는 자부심이 컸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인 중국을 봉쇄하는 차원에서 서태평양에서 일본의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당시는 미국이 중국을 인정하지 않고 장개석 (蔣介石) 총통이 다스리는 타이완을 유일한 중국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50년 전에도 국공내전에서 패해 타이완으로 쫓겨간 장 총통의 타이완이 미완의 내전의 결과인 것으로 인지하고 있었고,현재 중국-타이완 관계는 중국의 ‘하나의 중국’정책과 타이완의 ‘독립정책’이 충돌하는데다가 타이완 해협과 타이완 자체의 전략적 중요성(미군 해군기지 존재+세계최대 반도체 와이퍼 생산국)으로 인해 미국-중국과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50여년 전 중국의 경제규모가 보잘 것 없는 후진국이고 중국의 군사력과 해군력이 고려할 바가 없는 정도라고 생각된 것인데 현재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중국의 경제력은 이미 일본을 넘어섰고 군사력도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와 미국과 서구유럽권에서는 현재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고 있고 중국과의 전쟁가능성까지 나오고 있어 매우 우려스러운 사안입니다.

중국에 대한 적대감은 거의 황화(黃禍, yellow peril)로 생각될 정도로 매우 무자비합니다.

서구유럽권과 영미권 선진국들이 18세기 이래 처음으로 중국의 힘을 인식하게 되고 헤게모니 자체가 흔들리게 되자 위기감이 증폭된 것으로 보입니다.

위기감이 커지자 서구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저술과 강연들을 지속하면서 공산주의 체제의 미개함을 강조하는 발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서구 자본주의 체제가 점점 소수의 엘리트와 부자 중심의 과두정치체제(oligarchy)로 변해가고 있고 불평등이 심화해 가고 있는데 한가하게 아직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만을 강조하는 건 좀 어딘가 어설퍼 보입니다.


아무튼 이 책은 철저히 미국 국무부 담당자 입장에서 쓰여진 미국의 국익 극대화 방안에 따른 책이고 1968년 당시 미국은 국공내전 이후 중국의 공산화를 막지 못한 사실과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의 경험이 당시 최대 이슈였던 베트남 전쟁 참전에서 미국의 국익을 보전할 수 있는 방안을 찿을 수 있던 역사적 교훈이라고 설명합니다.

1960년대 미국의 외교정책을 평가하면서 아직도 미국외교가 19세기의 외교를 답습하고 있고 서구중심적 외교로 일관하여 비서구권인 아시아에 대한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1968년 당시 미국에는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등 아시아 언어에 능통한 지역전문 인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불안정한 저개발국이 대부분인 아시아 지역은 당시 전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던 지역으로 결국 미국입장에서는 이 지역이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결국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다고 보았으며 아시아의 유일한 선진국인 일본이 그 선도적 역할을 해야한다고 보았습니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일본우위는 2021년 현재까지도 유효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 분이 말하지 않은 행간에 결국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 문제가 잠복해 있는 셈입니다.

미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본을 선택해 중국의 해양진출울 봉쇄(containment)하는 교두보로 삼았고 한국전쟁을 통해 중국 본토를 압록강을 넘어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이후 일본이 한국과 중국 타이완에 행한 식민지 지배 역사를 묻어둔 체 아시아 지역의 경제발전에 몰두하게 한 셈입니다.

당시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 민족주의(nationalism)가 확산되고 민족분쟁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것은 지역의 문제로 관여하지 않고 미국은 단지 은행가처럼 아시아 지역에 대한 원조를 각국의 경제개발 계획에 맞게 자원분배의 역할만 하는 것이 더 맞다는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아시아 각국의 독자적 결정은 각국이 하고 미국은 단순히 지원만 해야 미국에게 전가되는 책임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일본학을 연구한 저명한 학자이기 때문에 이분의 주장이 상당부분 실제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확인을 해보지 않아서 아직 뭐라 더 말씀드리기는 조심스럽습니다.

요새 1960년대에 나온 책을 몇 권 읽어보니 왜 사람들이 고서를 찿아 읽는지 알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사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당대의 현안으로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평가를 내렸고 어떤 의견을 내는 지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이 어떠한지 생생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외교와 각국 국제관계 상황은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20세기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외교의 한 장면이 역사화되는 과정을 1968년 출판된 저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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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국사학과의 이태진 교수님께서 2000년 출간하신 논문집으로 고종통치기인 조선말과 대한제국 초창기의 통치상황을 ‘사료’로서 검증하고 있는 책입니다.

책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고종시대에 대한 두가지 상반된 시각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 듯 합니다.

이는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과 이를 주도한 ‘급진 개화파 ‘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교과서적인 설명으로는 이들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들이 한국최초의 근대개혁세력이었다고 보는 경우입니다. 친일개화파를 긍정하는 관점이 바로 전통적인 관점의 서술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한국의 ‘개화사상사’를 서술한 책이 서울대 신용하 교수의 ‘한국 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의 지성사(지식산업사,2010)’ 입니다.

이 관점에서 친러세력인 민비는 수구세력으로 그려지고, 고종은 대원군과 민비 사이에서 별 역할이 없는 조선의 무력한 전제군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이 설명에는 김옥균과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근대화에 대한 행동의 배후에 일본이 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두사람은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이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으로 망명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같은 전통적인 고종시대사를 읽는 관점에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며 사료검증을 시작한 연구서가 바로 이 책입니다.

이태진 교수님의 원래 주분야가 조선사이기 때문에 이 책에는 고종이 영향을 받은 선대의 임금인 정조의 통치방식과 정치관이 고종의 통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18세기-20세기초를 아우르는 근세사/근대사로서 전통적인 (혹은 친일적인) 관점과 대비되는 이 책의 논점은 고종은 무능한 군주가 아니라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적 입장에서 개화를 추구한 전제군주로서 유교의 통치방식에 서양의 근대화를 접목시키려 했다는 점입니다.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연구하시는 정통 역사학자입장에서도19세기를 지배한 안동김씨를 비롯한 척족세력의 세도정치는 정상으로 보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이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안동 김씨를 비롯한 과거 세도정치가들은 ‘명문’이라고 치켜세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19세기의 국정농단(国政垄断)세력일 뿐입니다. 국가권력을 사유화한 이익집단일 뿐입니다. 조선의 멸망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정조 사후 19세기 내내 조선을 피폐하게 만든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폐해를 알고 있는 고종은 정조를 본받아 사대부가 아닌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는 민국론 (民國論)적 입장의 통치를 합니다. 전제군주이지만 정치의 근본은 백성이지 사대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주장은 사대부의 나라이자 세도정치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상당히 급진적 주장이지만 이 주장은 철인군주러고 알려졌던 정조때부터 주장되었어온 통치론입니다. 고종은 정조를 본받기 위해 19세기 내내 유명무실했던 규장각을 다시 세우고 정조의 민국론을 본받아 조선의 국왕으로 통치력을 발휘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고집스런 쇄국론(鎖國論)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 역시 평가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흔히 조선이 개화를 해야 하는데 유교적 쇄국론에 매몰되어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장본인이라고 흥선대원군은 평가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19세기 내내 조선정치를 주무르던 안동김씨로 대표되는 세도정치의 폐해를 끊어버린 인물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역사적 사실이 편견에 묻혀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한말 그중 대원군 시기만 고찰한 자료는 찿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종통치기의 일부로 항상 인식되어 왔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대원군 시기의 조선이 어떠했는지는 좀 더 확인해보아야 할 사항입니다.

명성황후 민씨에 대해서도 평가가 완전히 상반됩니다. 전통적인 설명에서 민비는 수구파이며 민씨 척족세력을 등에 업은 근대화를 방해하는 인물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지극히 친일적 시각으로 19세기 말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발과 동해로 남하하는 러시아를 일본이 지극히 경계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다면, 일본의 군사적 야욕을 알고 있는 조선 왕가에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러시아에 접근하는 건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일 뿐입니다.

과거 근대사 연구가 조선왕조실록과 일본의 외교문서 등의 사료만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보다 일본에 유리한 해석이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종시대를 보면 따라서 외척인 민씨일가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좀 있습니다. 외척이며 세도가인것처럼 보이지만 민씨 중에는 고종의
명을 받들어 조선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고분분투한 인물이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민영환(閔泳煥,1861-1905)으로 고종의 특명을 받고 러시아와의 밀약을 추진하기 위해 1895년 니콜라이2세 대관식때 러시아를 다녀온 인물로 을사늑약 당시 자결한 분입니다. 이분이 남긴 ‘해천주범(海天秋帆)’이라는 사행서는 드물게 미주와 유럽 그리고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겪은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김영수 교수의 ‘100년전의 세계일주, 대한제국의 운명을 건 민영환의 비밀외교 (EBS Books,2020)’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경복궁애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합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알려진 정변이 일어난 것으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약 1년여 머물며 현재의 덕수궁인 경우궁으로 궁궐을 옮겨 환궁합니다.

명치유신이후 조선을 넘보던 일본은 친러파로서 그리고 고종의 국정 파트너이기도 한 명성황후를 시해해 승기를 잡은 줄 알았으나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이어(移御)로 허를 찔리고 말았습니다.
유럽의 강대국인 러시아를 1896년 당시 일본운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로 보았습니다. 러시아 공사관 이어 이후 고종은 당시 친일내각을 모두 사임시키고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종래의 청국과의 책봉관계를 완전히 종식시킵니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이어와 관련해서 러시아쪽 사료에 근거한 연구서인 김영수교수의 ‘미쩰의 시기(경인문화사,2012)’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청일전쟁 전까지 청국은 위안스카이를 조선에 주재시키고 조선을 청국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고 조선의 근대화 정책을 훼방 하고 있었습니다.

17세기 병자호란이후 조선과 청의 관계, 그리고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화이론적 조공책봉 관계가 19세기 들어 근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청국의 방해를 제치고 고종은 1882년 미국과 우호조약을 맺었지만 실제 미국에 외교관을 파견하는 일은 청국의 방해로 매우 늦어졌습니다.

이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대한제국 당시 서울의 도시개조사업에 관한 내용입니다.

- 18-19세기 서울의 근대적 도시발달 양상(p307-356)
- 대한제국의 서울 황성 만들기- 최초의 근대적 도시개조 사업(p357-386)

이 내용은 서울의 근대적 도시경관이 언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18세기 정조시기까지 소급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당시의 상업발달 상황과 한강 주변의 상업활동과 이에 따른 서울 성곽 바깥지역의 인구증가 추계도 같이 고찰합니다.

이 글이 흥미로운 것은 흔히 시구개정 (市區改正) 사업이 서울의 근대적 경관을 만들게 된 시초이고 이는 조선총독부가 최초로 실시한 것이라는 일반의 인식이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가운데, 사구개정 사업아 최초의 근대적 서울경관개조 사업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는 점입니다.

잘 알다시피 고종 당시 이미 전력회사와 전차가 서울을 운행하기 시작했고 이 일은 고종과 조선정주 그리고 미국인 사업가들이 함께 벌인 도시개조 사업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총괄한 내부대신 박정양(朴定陽)과 한성판윤 이채연(李采淵)은 모두 미국 워싱턴 DC의 조선공사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는 사실이 고종이 워싱턴 DC를 모델로 서울을 근대도시로 개조하려 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즉 이 글은 현재 서울의 경관이 언제 최초로 나타나기 시작했느냐에 대한 공간적 관심에 따라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친일성향의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주장하듯 일본이 없었으면 조선의 근대화가 불가능했다는 주장이 허위라는 반박으로서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오히려 고종이 근대화를 진행한 광무개혁(光武改革)의 진전 속도가 너무 빨라 일본이 급히 러일전쟁을 치루고 무력으로 조선을 제압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대로 놓아두면 발전 속도가 빨라 식민지로 만들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고종 연간에 시행된 ‘광무개혁’과 서울개조사업에 대한 자료를 더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두가지를 지적하면서 이 글을 끝내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정조에 대한 평가문제입니다. 정조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견해도 매우 다양하 고 상충되는 시각이 존재합니다. 이태진 교수는 정조를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을 유지하시는 대표적인 분으로 정조가 백성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근대적인 군주로 보았습니다. 정조의 긍정적인 정책들이 그대로 고종에게 이어졌다고 보고 있고 이 책은 고종이 정조의 정책 계승자로 인식 합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정조가 철저한 유교적 보수주의자로 조선의 결국 기득권층인 사대부 계급과 같은 노선을 걸은 군주라고 보는 시각입니다. 정조는 분명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철인 정치가 ‘로서 군주 개인의 학식과 자질로서 양반 사대부를 압도했던 인물이며 철저한 뛰어난 근본주의적 성리학자입니다. 그의 뛰어난 통치력과 자질은 정조가 사대부들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그의 죽음에 관련된 미스터리와 정조 사후 자질이 그와 같지 않은 어린 임금이 등장한 이후 잇따라 왕비의 척족세력이 정권을 잡는 19세기의 세도정치가 이러지면서 더 분명해졌습니다.

본인만이 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난 정조의 치세가 결국 후대에 세도정치를 불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번째는 전제정치에 대한 시각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전제정치는 ‘나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극히 서구 편향적 인식으로 조선과 같은 왕조사를 보는데 적합한 시각이 아닙니다.

근대화를 거쳐 계급이 붕괴된 사회는 그 역사가 길어봐야 200여년 남짓입니다.

공산독재가 나쁘다고 말하지만 전제주의적 왕정은 근대 이전 이미 1000년도 넘게 지속해 왔습니다.

따라서 전제정치 자체가 나쁘다는 시각으로 접근하면 과거를 들여다볼 수가 없습니다.

고종의 경우는 맹목적 전제왕정을 펼친 것이 아니죠. 개화를 추구하는 전제왕정이었습니다. 왕정에서 주권은 왕에게 있고 재정권도 왕에게 있었습니다. 조선의 경우 이런 전제 왕정이 500년 이상 지속된 겁니다. 따라서 군주인 고종은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과 주권은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가 주권이 있는 왕에 반해 백성들이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근대적 공화정을 주장하고 근대적 의회를 주장한다면 바로 ‘역적’으로 몰리게 됩니다.

실제로 김옥균은 갑신정변 실패후 상해로 망명을 갔다가 살해 당하고 이후 역적으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됩니다. 역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고종이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따르지 않았다고 그가 근대화에 대한 의지가 없는 고루한 군주라는 평가는 따라서 정당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습니다. 그건 2021년의 생각이지 1890년대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근 일본사회가 코로나를 대처하는 것을 보고 한국울 무시로 일관하는 것을 보고 그 나라가 지난 1980년대 ‘Japan as no.1’이라고 칭송되었던 일본이 맞는지 의심이 되기 시작합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최초로 완전한 서구화애 성공한 나라라고 알려져 왔는데 최근에는 이 나라가 선진국이 맞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마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의 외양을 갖춘 것도 1945년 패망이후 미군의 점령치하에서 수정헌법이 도입되고 미국식 제도가 이식된 것으로 한국처럼 자발적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일본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고 1860년대 이래 천황의 지배 아래 놓인 왕조국가일 뿐입니다. 민주주의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자민당 일당 독재의 나라이고 국회의원들은 세습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전쟁을 해온 나라이면서도 본인들의 전쟁범죄에 대해 입을 닫습니다.
허울뿐인 서구화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벌어집니다.

일본은 묵시적으로 아직도 이토 히로부미가 기초한 흠정헌법(欽定憲法)에 따른 천황중심제 전제국가로 보이고 일본 극우들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민주주의 국가적 면모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한국의 근대화에 자신들의 기여가 크다고 주장하는 것도 현재 모든 것이 공허해져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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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물질문화사 - 만물이라는 스승에게 배우다
쑨지 지음, 홍승직 옮김 / 알마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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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물질문명에 대한 개론서.
너무 많은 전문적인 내용이 한권에 압축되어 있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상당합니다.
중국고고학과 중국고대사와 중국고전에 통달하지 않는 한 이책의 완전한 이해는 불가합니다.

번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세한 배경과 내용설명, 그리고 용어설명이 먼저 필요해 보입니다.

중국 고대사와 중국 고고학의 발굴성과를 종횡으로 기록했지만 저자의 유식함을 자랑하는 것 이외에 독자에 대한 배려는 전무하다고 할 그런 책입니다.
각 장은 사실 하나의 단행본으로 출판되어야 할 양입니다.
각주도 없고 관련 서적에 대한 서지도 없고 기대를 가지고 본 책이지만 내용이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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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작가의 ‘서울선언’시리즈 세번째 권이 올해 8월 출간되었고 오늘 완독했습니다.

‘서울선언( 열린책들,2018)’에서 일제시기 처음 개발된 노량진과 영등포에 대해 언급하면서 현대 한국에 직접적 영향을 주지도 않은 남성위주의 양반문화일 뿐인 조선을 되살리기 위해 근현대시기 이후 서울에 남아있던 일제시기 이후 초기 서울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고 개탄을 했습니다.

지난 20세기와 19세기 역사에 관심이 많은 저는 작가님의 이런 지적에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1925년 서울을 강타한 ‘을축년 대홍수’의 흔적이 서울의 곳곳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사진과 함께 기록으로 남긴 최초의 답사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두번째로 출간된 ‘갈등도시( 열린책들,2019)에서는 일제가 구상한 ‘경인 메트로폴리스’를 조망하면서 노량진에서 인천으로 상수도를 제공하던 ‘수도국산길’을 답사하면서 서울과 인천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된 공간인지를 살폈습니다.

아울러 부평평야에 남아 있는 일제시대 군관사의 흔적과 한국전쟁이후 한국에 들어온 미군기지터도 확인했습니다.

왜 한국은 여전히 중근세의 오래된 건축물이나 왕릉만 문화재로 생각하고 당장 우리 조부모님이 사셨을지도 모르는 일제식 가옥이나 제가 어렸을 때 살았던 단독 양옥주택 같은 건물은 왜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파트만이 생활공간의 전부이고 주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건 한국에 현재 주거문화가 존재하지 않다고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진국이라면서 뭐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이책의 소개에 앞서 먼저 나온 두권에 대한 소개는 여기서 그칩니다.

이책은 제목에 나와 있눈대로 ‘길’에 주목한 책으로 책의 상당한 분량이 특히 ‘철도’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철도가 근대이후 한국사회에 경제적으로 끼친 영향이 상당하고 경부고속도로 개통이후 관심 밖이었던 철도가 KTX 등 고속철도가 개통되고 난 뒤 다시 주목받게 된 사실에 주목합니다.
현재 한국의 철도망에 일제가 그려놓은 밑그림과 흔적이 남아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가능을 잃어버린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과 그 주위에서 발전과 퇴행을 오갔던 경기 북부의 접경도시들인 고양시와 파주시 그리고 분단으로 해운의 기능을 잃어버린 한강하구의 김포시 그리고 고양을 넘어 연천과 송추까지 이어지는 경기 북부 지역을 답사합니다.

대서울의 영향이 지금은 접경지역이 된 파주권역 넘어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동쪽으로 눈을 돌려 서울-원산간을 연결하던 경원선을 따라가면 서울 망우리를 지나 구리 남양주 양주 의정부 동듀천 등을 넘어 원주를 지나 춘천에 이릅니다.

경춘선이 전철화되고 춘천이 서울과 통학권이 되면서 강원도와 서울은 대서울 권역에 편입되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용하던 서울 지하철 1호선이 사실 경원선의 구간이고 서울-의주의 철길도 서울 지하철 3호선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마지막 3부에서 가장 인상적인 답사기는 이미 폐선이 되어 흔적이 얼마남지 않은 수원-여주간의 수려선과 폐선이 되었다가 다시 운행을 시작한 수원-인천간의 수인선에 대한 답사기입니다.

경기도의 곡창지대인 여주에서 쌀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인천항까지 철도를 놓은 것이 수인선이고 그 수인선에 연결하기 위해 수원- 여주간 철도를 놓았다고 합니다.

수려선의 경우 가까운 강원도 원주까지 철도를 연결하려 했으나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공사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경기도 동남부 특히 여주 안성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덜 발전된 이유가 일제시대 계획되었던 철도계획이 전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도 있고 경부고속도로역시 이 지역을 비켜가서 여러모로 교통발달의 혜택을 별로 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일제시대부터 기획이 되었으나 연결되지 못했던 경기 동남부의 작은 철도 노선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경기선이나 경장선 (서울 동부- 장호원) 등의 이름도 생소한 군소철도노선애 대한 흔적도 살핍니다.

한국의 변화무쌍한 특징과 다이나믹한 힘이 요새처럼 주목받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이면에는 마치 과거에 대해 무슨 감정이 있는 것처럼 모든 걸 밀어버라는 과격한 ‘개발주의 ‘와 ‘배금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과거가 과거의 흔적이 곧 그 자체로 미래를 위한 해결방안은 아니지만 도대체 ‘미화’라는 명목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밀어버리고 못산다는 이유로 대도시의 경계로 사람들을 언제까지 몰아낼 것인지 그 머릿속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일제시대부터 토막민이라고 불리던 빈민들을 몰아내던 관행이 군부독재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970년대까지는 도시화가 안되서 주택난이 심각하다는 이유라도 댈 수 있었지만 그후 소위 ‘선진국’이 된 지금도 사람을 ‘개발’의 명목으로 밀어내는 야만적 행태가 지속되는 건 한국이 점점 소수의 지배기득권층을 위한 사실상의 ‘계급사회’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대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법률가 집단이 사상 처음 검찰총장 출신 정치인을 대선후보로 내놓았습니다. 사법체제를 독점해온 검찰이 스스로 정치에 참여하는 초유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토건세력이 MB를 내보내 이익을 가져온 걸 보고 학습한 검찰조직도 같은 논리로 정치에 도전한 겁니다.

저자는 사라져가는 근현대 건물들의 흔적과 함께 사라져가거나 강제이주 당할 수 밖에 없던 서민들에게 연민의 눈길을 보내고 안타까와 합니다.

과거의 모든 공간적 흔적을 남길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의 흔적은 남겨 후세에게 그 시대를 단지 글만이 아닌 실물로 눈으로 보게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사는 공간과 물건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결국 우리들이 보는 것처럼 유적이나 유물이 될 처지가 아닌가요?

시각을 바꿔볼 필요가 분명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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