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주변국 지식인이 쓴 反중국역사
양하이잉 지음, 우상규 옮김 / 살림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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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내몽골의 오르도스 출신이지만 현재는 일본으로 귀화(歸化)해서 일본인으로 인류학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1989년 이후 일본에 거주하며 규슈( 九州)의 벳부(別府)와 간사이(関西)의 오사카(大阪)에서 연구하고 현재는 시즈오카대학(静岡大学)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책내용보다 저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책이 제가 기대했던 내용과는 좀 결이 다른 내용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보수잡지 문예춘추(文藝春秋)가 기획했으며 저자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준 일본의 고고학, 인류학, 역사학 저서들로만 참고문헌이 서지목록에 가득합니다.

몽골및 유목민족에 관한 역사 및 역사관(歷史觀)을 이야기하고 한족의 중화주의 (中華主義)를 비판하는 책치고 일본학자들의 책으로만 서지가 채워진 것 자체만으로도 의구심이 충분히 들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재가 알기에 영미권 및 러시아와 유럽권에서도 중국및 중앙아시아 유목 문화와 역사에 대한 연구가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결국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라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저를 비롯한 일반적인 독자들이 저자의 지적대로 중국중심적인 중국사와 동아시아사를 배워온 것이 사실이고 중앙아시아의 역사나 ‘오랑캐’로 대표되는 중국의 변방지역에 대해 잘알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자가 ‘지나( 支那)’로 통칭하는 한족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하고 만리장성 바깥의 세계를 ‘야만(野蠻)’으로 규정하는 중화주의적 역사서술이 배타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점은 공감이 갑니다만 논의의 톤이 어쩐지 점점 보수화하는 일본의 입장을 정당화시키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가 몽골 및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전문가라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중국과 그 주변을 다루면서 근세 일본의 왜구(倭寇)에 대한 역사, 몽골의 일본정벌, 일본 제국주의의 청일/러일 전쟁, 만주국 (滿洲國) 건국에 대한 역사가 아예 빠진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본의 입장에 기대어 몽골인으로서 느꼈던 한족 중심의 중화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하는 논조가 한국인으로서 매우 불편합니다. 강국으로 부상하려는 중국을 새로운 군사무장을 가능케 하는 ‘보통국가’를 추구하는 일본이 견제하는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 자체가 특정한 시기를 다룬 책이 아니라 기원전부터 현재의 중국에 이르는 광범위한 범위를 아우르기에 더욱 이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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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 (蕩平) 군주로 알려진 정조 이후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연간의 공론 (公論) 정치와 정치체계를 다룬 논문집입니다.

각 장마다 하나의 독립된 논문으로서 사실 순서에 상관없이 읽어도 무방해 보입니다.

이 책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아래와 같은 구성입니다.
1. 영 정조 시대의 공론정치
2.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의 공론정치
3. 세도정치기 이후 대한제국기의 정치

로 일별할 수 있습니다.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등으로 대표되는 순조이래의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를 다루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지만 세도정치기와의 비교를 위해 영조. 정조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의 통치체제도 같이 고찰합니다.

따라서 조선 통치체제의 기본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조선의 정치구조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고찰하며 논의를 진행합니다.

조선은 국내정치적으로 국왕이 모든 결정을 단독적으로 내릴 수 없었던 나라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전제주의 국가임에도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이 강했던 나라입니다.

주요 결정사안들은 모두 어전회의와 비변사회의와 경연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사간원과 사헌부로 대표되는 대간 (臺諫)을 통해 인사권 개입이 이루어지는 구조였습니다.

지방의 유생이나 산림 (山林)들도 상소 (上疏) 등을 통해 조정에 직접 의견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애초부터 권신(權臣)들에게 국왕의 정치권력을 위임하는 방식의 통치체제를 가진 조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래의 통치방식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 첫번째가 바로 당쟁(黨爭)에 따른 공론정치의 변질입니다. 국왕의 독단적 결정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공론정치체제는 사대부들의 당파로 인해 변질되어 간쟁(諫爭)을 주도하는 청요직(淸要職), 즉 대간(臺諫)의 자리에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을 천거해 반대파 당인들을 탄핵하고 사실상 민생을 도외시하는 폐단이 나타납니다.

지금 자유한국당이 20대 국회에서 정쟁을 일삼으며 민생법안을 전혀 처리하지 않고 발목잡기하고 있는 상황과 똑같다고 보면 됩니다.

임진왜란 당시인 선조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대부들간의 당파는 서인과 남인으로 갈라지고 나서 다시 서인세력간에도 노론과 소론으로 그리고 노론도 시파와 벽파로 갈립니다.


영조와 정조 두 임금은 사실상 서인세력과 권력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임금들로 서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비극인 임오화변(壬午禍變)도 결과적으로 이런 권력투쟁의 결과였습니다.

특히 정조는 조선의 간쟁(諫爭)제도가 사대부들의 당쟁에 악용되었다고 보고 왕권의 강화책의 일환으로 간쟁제도를 약화시키고 억압합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조 자신이 당대 최고의 철인군주(哲人君主)이기에 가능한 왕권강화책이었습니다.

당대최고의 학자인 정조 자신은 노회한 서인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당파이익을 위해 어떠한 간쟁을 하고 상소를 하더라도 이를 논리적으로 막아낼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권의 강화를 선대왕들의 묘지를 찿아가는 능행을 진행함으로써 이루었습니다. 정조는 능행 행차를 통해 백성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민원을 들음으로써 중간의 사대부들이 민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왜곡할 가능성을 차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정조 당대에는 공론정치 기능을 약화시키고 왕권강화를 하면서 효과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지만 바로 다음 임금인 순조때부터 공론정치 약화의 폐단이 나타납니다.

군주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철인정치를 전제로 하는 왕권강화책은 임금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순간 약화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임금인 순조때부터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바로 외척(外戚)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입니다. 정조이후 네 임금이 모두 어린나이에 즉위하면서 대왕대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불가피했고 이런 상황은 소수의 외척세력이 국정을 마음대로 농락하는 국정농단(國政壟斷)으로 이어지게됩니다.

비선(秘線)의 실세들이 조선의 정치를 무려 100여년간 주무릅니다. 망국으로 갈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도정치기 조선정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조정은 노론 벽파(老論僻派)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2. 보수적인 원리주의적 성리학을 대변하는 노론벽파는 명이 멸망했음에도 대명사대주의를 포기하지 않았고 이중적으로 청나라에도 사대주의를 표방했습니다.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이라는 뿌리깊은 인식이 여기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3. 이런 중국우선의 사대주의 외교와 다르게 일본과는 소극적인 최소한의 관계만을 유지했습니다.
4. 서양과의 외교는 중국의 속방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런 사고방식은 쇄국( 鎖國)정책으로 나타났습니다.
5. 서양과의 외교통상을 거부하는 상황과 함께 정조 이전부터 받아들였던 서학과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시작합니다. 특히 프랑스 신부의 죽음으로 프랑스와 외교적 마찰이 생기고 이는 병인양요의 발발원인이 됩니다.

조선은 1800년 정조의 죽음이후 세도정치기를 거치며 조선의 전통적인 경국대전 체제하의 정치도 재대로 실행할 수 없는 상항에 봉착했고 때마침 아시아에 불어닥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의 기미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체 오로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틀에 갇혀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오로지 12세기 송나라 유학자 주희 (朱熹)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았고 국내정치는 외척들의 전횡에 무기력해진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19세기의 민중들은 무능한 조정과 세도정 치가들에게 반기를 들어 수많은 민란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세기 정치를 무력화시킨 노론벽파 세력들( 특히 이들 중 왕가의 외척이었던 세도정치가들)아 조선을 국치의 길로 끌고 갔다고 하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안동 김씨, 반남 박씨, 풍양 조씨 그리고 경주 김씨 가문이 19세기를 풍미한 세도정치의 주역들입니다.


P.S. 이전에 읽었던 안동 김씨 가문에 대한 문중역사서 한권을 같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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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얇지만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본문헌학(日本文獻學), 전쟁사(戰爭史)와 일본근세문학(日本近世 文學)을 공부하신 서울대 김시덕 교수가 쓰신 책으로 ‘근세 일본인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임진왜란을 바라본 책입니다.

근세라고 하는 시간적 배경과 당시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던 당시 쇼군(將軍) 및 다이묘(大名) 가문이 주군을 현양( 顯揚)하기 위해 쓴 여러 문헌들을 통해 에도시대 일본인들이 본 임진왜란을 다룹니다.

따라서 공식적인 사료와 역사서를 기초자료로 임진왜란의 역사를 서술하는 ‘임진왜란의 역사’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앞서 언급한 문헌들은 임진왜란에 참던했던 다이묘들의 가문에서 주군을 드높이기 위해 쓰여진 문헌들이기 때문에 주군의 업적에 대한 과장과 왜곡도 같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헌들은 전통적 의미의 사료는 아니지만 에도막부 당시의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했는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살펴보는 의의를 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간 한국은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를 이 전쟁의 국제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주로 한국의 사료,즉 선조실록과 징비록 그리고 난중일기 등을 기초자료로 바라보는 입장을 고수해 왔고 1970년대는 당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적 사실보다 ‘이순신 장군의 신격화’에 임진왜란사를 이용해온 ‘흑역사’가 있었습니다.

최근에 임진왜란에 대한 여러 책을 읽기 전까지 조선이 얼마나 전쟁에 무방비 상태로 있었는지 그리고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있었던 청일/러일전쟁과 유사한 점이 너무 많아 놀랐습니다.

즉 임진왜란이 조선 땅에서 일어났음에도 일본은 조선보다 명나라와의 화의교섭을 했고 조선은 전쟁의 당사자로 화의교섭에 참가조차하지 못한 사실이 그것입니다. 류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해 수군통제사로서 호남과 영남의 수로를 방어하지 못했다면 조선은 명의 속방(屬邦)에서 일본의 속방이 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조선정치의 근간을 이루었다는 조선 사대부들의 ‘무능력’과 기득권 안주는 그래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를 느낍니다.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면서 친명사대주의를 지켜온 결과 임진왜란이후 거의 한세대만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맞았고 병자호란을 초래한 책임이 있는 서인 (西人)당파는 이후 조선을 신하들의 국가로 표방하며 왕권에 도전하여 영조시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드는 임오화변 (壬午禍變)을 일으켰으며 정조이후 서인의 당파인 벽파(僻派)세력은 순조이후 대한제국기까지 외척(外戚)으로서 세도정치(勢道政治)를 통해 100년간 국정농단(國政壟斷)을 자행해 조선의 국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켜 끝내 일본에 국권이 넘어가는 국치 (國恥)에 이릅니다.

근본주의적 성리학은 조선의 역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것으로 생각합니다. 전제정치에 있어 왕권보다 신권이 강한 것은 조선에 있어 국력약화의 결정적 요인입니다.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담론으로 돌아와 아무튼 임진왜란을 일본의 입장에서 본 저작이 여지껏 없었다는 건 역사학계의 나태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분명 임진왜란과 근세 일본을 연구하면서 저자가 소개한 자료들을 전문 연구자들이 보았을텐데 어떻게 수십년간 일본의 입장에서 서술된 임진왜란 전쟁사는 집필될 수 없었는지 말입니다.

아직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서를 충분히 보지 못해 저 자신 속단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전쟁의 상대방으로 알려진 일본입장의 저서가 집필되거나 번역되지 않았다는 점은 일반 독자로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P.S.

이 책은 에도시대 일본인들이 그들이 임진왜란을 접할 수 있었던 각종 정벌기, 소설 등 당시 사회에서 통용가능한 책을 통해 어떻게 임진왜란을 이해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더루었습니다. 따라서 인용된 문헌들의 내용이 늘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는 않습니다. 인용된 문헌의 상당 부분이 에혼 (絵本), 즉 그림책이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사진이 없고 문맹율이 높던 근세 에도일본에서 일반인들이 임진왜란을 인식한 것은 전문역사서를 통하지 않았을 것은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김시덕교수의 글을 처음 본 것은 ‘전란으로 읽은 조선 (글항아리, 2016) 중 ‘4장 임진왜란, 동부 유라시아 대륙 플레이어들의 각축전_열국지적 질서와 지정학적 요충지로서의 한반도’라는 글을 읽은 것이 처음이었고 이후 이분이 쓴 임진왜란에 대한 책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반도가 ‘지정학적 요충지’로 동아시아 열강들 간에 최초로 인식되었던 전쟁이었다는 임진왜란의 정치적 의의가 이 글에서 소개되었습니다.

기타지마 만지 교수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은 임진왜란을 조선침략으로 인식한 일본 역사학자의 책으로 일본입장에서 일반적인 시각이 아니고 상당히 한국에 우호적 입장에서 서술된 역사서입니다. 하지만 에도시대까지 일본은 자신들의 조선정벌의 원인을 조선에 돌리고 있었고 아마도 근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런 입장을 고수해왔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실제로 그런지는 추후 확인해 보면 알 수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역사저술가 이덕일씨의 ‘난세의 혁신리더 유성룡 (역사의 아침,2012)’은 한마디로 유성룡 선생 분투기입니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만났음에도 도움이 전혀 되지 못한 국왕 선조와 사대부들을 대신해 국정을 책임진 영의정 유성룡이 홀로 명에 원군을 요청하는 역할을 하면서 명나라 원군들을 위한 군량마련에 거의 홀로 분투하다시피 합니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조선이 임진왜란 당시 사실상 망한 국가였다고 인식하는 것도 제대로 국정을 처리하지 못하고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전란을 맞을 수 밖에 없었던 조선조정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책은 임진왜란 역사서술의 전형을 보여주는 책으로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및 징비록 등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사료들을 기반으로 서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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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후금을 건국한 여진족 지도자 누르하치(努爾哈赤)의 8번째 아들로 명나라이후 중원을 통치하게된 대청제국(大淸帝國)을 세운 2대황제로 한국인들에게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에게 항복을 받은 ‘오랑캐’의 우두머리로 알려져 있고 아버지 누르하치보다 그다지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닙니다.

아직도 한국사회에는 만주 및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해 잘알지 못하면서도 이곳 지역출신들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이래 이어져온 소중화(小中華)사상이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 그런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책을 읽게 된 계기도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유린했던 청국 지도자 홍타이지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였습니다. ‘심전도의 굴욕’이라고 알려진 치욕적인 역사를 만든 주인공이라면 욕만 할께 아니라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이 앞으로 이런 치욕을 당하지 않는 방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르하치’의 치세에 대한 책을 읽어서 그 이후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여태 읽어왔던 책 내용으로 비교해보건데 객관적으로 홍타이지는 청의 황제에 오를만한 인물이고 지략과 무공 그리고 통치술에 있어 조선의 인조보다 인물됨이 훨씬 큰 사람이었습니다.

정권을 장악했던 서인정권은 원리주의적 중화사상에 빠져 조선의국익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외교정책의 전면에 내세운 조선은 필연적으로 청에 무릅을 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광해군의 현실적인 명나라와 후금사이의 등거리 외교를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으며 명나라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보낸 제조지은 (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세우게 해준 은혜)을 망각한 처지라고 주장한 몰지각한 인사들이었습니다.

이미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며 통치능력을 검증받은 바 있는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반정을 도모해 정권을 잡은 서인(西人)들은 결국 일어나지 않을수도 있었던 병자호란을 아무대책없이 일으키는 역사의 죄를 범합니다. 이들은 말로만 청나라와 전쟁을 치루어서라도 부모의 나라인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군사를 키우는데 소홀하거나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기득권층에 불과했습니다.

선조대부터 시작된 당파싸움과 당위론적 명분에 집착한 지주계층인 양반사대부 서인들은 본인들의 무능과 아집으로 나라를 두번이나 전쟁에 이르게 하고 결국 병자호란이후 300여년 뒤 일본에 나라를 병탄하는 지경으로 몰고 갑니다.

이제 중국으로 눈을 돌려 홍타이지가 어떤 과정을 통해 중원을 장악하게 되는지 정리해 봣습니다.

1. 홍타이지의 아버지 누르하치는 뷱경을 장악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산해관 (山海關)을 치기위해 명나라 장수 원숭환(袁崇煥)이 지키고 있던 영원성(寧遠城)을 깨뜨리지 못하고 전장에서 유언없이 사망합니다.

2. 홍타이지는 명의 수출금수로 피폐해진 후금을 계승하는데 누르하치의 많은 아들들과 정치투쟁를 통해 왕위에 오릅니다.

3. 홍타이지는 명과의 화친을 요청하고 후금의 내부정비를 시작합니다. 왕권강화를 위해 팔기조직에 분산되어 있던 통치권을 왕으로 집중시키고 한족(漢族) 책사인 범문정(范文程)을 기용해 만주족의 정치체제에 중국의 제도를 접목시켜 청 특유의 정치체계의 기틀을 잡습니다.

4. 누르하치는 대부분의 여진부족을 통합하였으나 연해주에 위치한 야인여진(野人女眞)을 복속시키지 못했는데 홍타이지는 마지막으로 야인여진을 복속해 여진족 전체를 통합합니다.

5. 이후 같은 기마민족으로 한때 여진을 지배한 적이 있었던 몽골을 복속시킵니다. 원이 멸망한후 이를 계승한 북원 (北元)을 멸망시키고 홍타이지는 여진족과 몽골족의 칸으로의 위상을 다지고 중원을 칠 수 있는 서북루트를 개척합니다.

6. 이후 동아시아의 대명사대주의 체제의 종식을 선언하기 위한 목적으로 또 중원공략의 뒷문을 단속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을 공략합니다. 홍타이지 입장에서는 병자동정(丙子東征), 조선의 입장에서는 병자호란( 丙子胡亂)이 이 전쟁으로 청은 사실상 ‘전쟁없이 ‘ 조선을 공략했고 인조와 서인정권은 남한산성에서 농성전을 벌이다 45일만에 삼전도 벌판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의 예를 표하고 이후 청과의 사대관계를 수립합니다.

7. 이후 청은 서북루트를 통해 명의 중원을 공략하고 반간계를 통해 영원성의 원숭환을 제거합니다. 5차에 걸친 청의 중원공략을 통해 명나라를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만듭니다. 명은 사실상 내전 상태에 빠져 이자성으로 대표되는 농민 반란군은 새로운 나라를 선포하는 등 혼란에 빠져버립니다.

8. 청은 산해관(山海關)을 격파해 북경으로 진격해 중원을 장악합니다. 이로써 14세기말이후 동아시아를 장악하던 대명사대주의체제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한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지요.

P.S.
조선에서 오랑캐라는 말은 조선은 오랑캐가 아니라는 뜻으로 아시아의 여러 유목민족들을 지칭하는데 쓰였지만 조선은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조선을 어떻게 보는지 괸심이 없었습니다. 조선이 자신을 소중화(小中華)로 여기고 중국과 동일시하고 있었음에도 중국 (명)은 조선을 동쪽의 오랑캐(東夷)로 자신들보다 한 수 아래로 보고 있었고 청(여진)은 같은 오랑캐인 조선이 왜 자신을 무시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인식의 차이는 병자호란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성리학 원리주의 (Neo-Confucian Fundamentalism)에 입각한 중화주의적 사대관 (中華主義的 事大觀)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고 무능했습니다.
여진족은 중국대륙을 300여년간 통치한 민족입니다. 유목기마민족이 농경민족보다 열등하다는믿음은 주입된 믿음일수도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있는 그대로를 봐야할 것 같습니다.

P.S.2

두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주제는 명나라 말기 은본위제(Silver Standard)에 대한 부분입니다. 17세기 초 포르투갈 및스페인 상인들을 통해 남미의 은이 명으로 유입되고 일본의 은이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또 일본 왜구를 통해 명으로 유입되었고 이렇게 명나라에 축적된 풍부한 은(銀)은 결국 명나라가 가치의 저장 및 교환수단을 은으로 정하게 되는 은본위제(銀本位制)로 발전하게 되어 동아시아의 경제발전 및 교역확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누르하치 집권시부터 청나라는 국부의 척도가 된 은을 축적하기 위해 명과 조선을 통해 교역을 발전시키기 원했습니다. 원숭환과의 영원성 전투가 있기 전까지 청은 명과의 교역을 통해 국부도 축적할 수 있었고 생필품도 구할 수 있었지만 이후 명과의 교역이 끊긴 후 경제적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런 경제적 곤궁때문에 청은 장기인 전쟁과 약탈을 통한 경제발전 정책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화폐경제론적 입장에서 명의 경제사정을 설명해 준 이 부분은 이책에서 꼭 보아야 할 백미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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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정치사를 연구하시는 이완범 교수의 2013년 저서로 본론과 미주 그리고 서지목록을 포함해 900페이지가 넘는 책입니다. 책의 절반인 400여 페이지가 관련 서지목록입니다.

한반도를 외국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시작한 영토분할에 대한 군사적, 외교적 논의를 역사적으로 추적한 첫 연구서 (Monograph)로서 본분 총 540페이지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 임진왜란 당시 명과 일본간의 조선 할지 논의
2. 청일, 러일전쟁 당시 북위 39도 및 38도선을 기준으로 한 한반도 분할 논의
3. 태평양 전쟁의 일본항복 후 미군의 일본 한국 점령계획의 일환으로 미국과 소련과 논의된 북위 38도선에 다른 한반도 분할점령 논의 - 38도 분할점령선은 한국전쟁이후 정전 협정을 거치며 휴전선으로 고착화.

현대사 전공자의 저작이다 보니 세번째 주제가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우선 외세에 의한 한반도 분할논의가 한국전쟁에서 그 기원을 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일반의 통념과는 다르게 가장 이른 한반도의 분할논의는 16세기 말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최초 일본의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을 정복하고 인도와 동남아시아 국가까지 정복해 아시아 제국을 만들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명을 정복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 (征明假道)’는 요구를 조선에 하면서 시작된 임진왜란은 조선의 항전과 명의 지원군 출병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명나라와 화친교섭을 시작합니다. 일본이 조선 땅에서 명과 교섭을 시작한 이유는 조선을 명의 속방(屬邦)으로 생각해 명과 외교교섭으로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명과의 교섭에서 조선의 북방지역을 명나라 요동의 완충지역으로 남겨두고 곡창인 전라,경상, 충청,경기 지역 4도의 할지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할지 요구에 대해 조선조정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왕으로서의 책봉만을 허락해 더이상 한반도 분할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논의는 근세에 이루어진 한반도 최초 외세에 의한 영토분할 논의였으며 이후 논의되는 외세간 한반도 분할 논의의 역사적 근거로 작용합니다.

특히 일본은 16세기 명과의 한반도 분할논의 이후 19세기 말 다시 조선에 대한 국권침탈을 시도하며 임진왜란 당시 자신들이 명나라와 교섭했던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청나라/러시아와 협상을 진행합니다.

대외적으로 일본은 청일전쟁을 시작하며 ‘조선은 독립국이다’라는 논지를 유지했는데 그이유는 조선이 중국에 대한 사대의 입장을 유지하며 스스로 중국의 속방(屬邦)임을 자처해 왔기 때문으로 일본은 조선과 청과의 이런 전통적 조공/사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신의 이권을 위해 조선을 독립국으로 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일본의 조선의 보호국화 과정은 황태연 교수의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청계, 2017)’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중국대륙에 대한 야심은 만주에서 러시아와의 이권충돌을 가져왔고 러시아와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되는 데 이 전쟁이 러일전쟁으로 일본은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없애고 난 이후 러시아와 다시 한번 격돌해 승리함으로써 조선반도와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획득하고 아시아 대륙 전체에 대한 침략을 더 강력하게 추진합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한반도 분할교섭에서 39도선을 중심으로 교섭을 시작하고 러시아가 한반도 북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하였지만 점차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자 원해 목적대로 한반도 전체를 그들의 영향권에 두고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삼습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정복의 꿈을 300년 후 자신들이 이루었다고 득의양양했습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의 패배로 일본은 미국에 본토 및 한반도를 점령당하는 운명을 맞이하고 미국은 만주, 일본, 한국 세 지역에 대한 점령을 놓고 외교적 교섭을 하게 됩니다.

소련은 만주를 자신의 점령지역에서 생각했고 미국은 일본 본토 전체를 자신의 점령지로 생각했고 미국과 소련은 쿠릴열도 일부를 제외하고 만주 및 일본의 점령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조선이 문제였는데 미.소 양국은 포츠담 회담을 통해 잠정적으로 북위 38도를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하는 것을 결정하였고 소련의 조기 참전이 미국의 동아시아 영향력을 약화시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소련의 참전을 늦추려는 시도가 일어납니다.

소련의 참전으로 한반도 북방지역과 일본 일부지역이 소련에 점령된다면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미국은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만주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한 대신 일본 본토의 미국 점령은 양보할 수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완충지역이었던 한반도가 분할대상이 된 것입니다.

미국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한반도에 38선을 그었고 소련은 만주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이권과 영향력이 손상되지 않는다면 한반도의 북방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38도 분단제안은 아주 매력적인 제안으로 다가왔고 실제로 미국의 이 제안을 협의하고 동의했습니다.

38도 분할선은 미국이 짧은 시간 내에 거의 임의적으로 제안한 선이라는 기존의 설명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즉 한반도 분단에 미국의 책임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책을 읽으면서 한국에게 있어 일본과 미국이라는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한국의 분단을 초래한 포츠담 선언과 미국의 북위 38도선 결정관련된 외교문서들이 아직도 모두 공개되지 않은 체 학자들의 ‘주장’과 ‘추정’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미국은 한국을 태평양 전쟁 이후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로 일본본토와 함께 ‘점령(occupation)’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소련과의 세력균형을 위해 ‘분할점령’을 고려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한국전쟁이 분단을 고착화시켰지만 미국이 고려했던 분할점령은 일본의 무조건항복보다 훨씬 이전인 1945년 7월25일경 아라는 말입니다. 확인하고 검증해봐야 할 사안이라고 저자가 언급하고 있지만 미국의 사료를 통해 미국이 38도선 결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저자는 의심하고 있습니다.

P.S 언제나 전쟁이 역사의 전환점으로 작용해온 것을 고려한다면 한국사를 전쟁을 통해 읽는 것은 좋은 역사읽기의 한 방식입니다. 근래 읽은 조선 전쟁사관련해서 ‘전란으로 읽는 조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전문가들이 전공영역에서 한 꼭지씩 맡았고 서지목록이 좋아서 제 마음에 든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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