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출신 한국사 연구자이신 마르티나 도이힐러 (Martina Deuchler) 런던대 명예교수의 연구서입니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한국학자께서 경북 안동과 전북 남원의 출계집단의 변천을 추적해 어떻게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들어왔는지를 추적한 사회사입니다.
출계집단이란 부계와 모계를 통해 공통의 조상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초기에는 가계도에 부계와 모계를 모두 기록하다가 조선에 신유학이 도입된 이후 부계중심으로 바뀝니다.
조선의 부계중심 종족제도의 출현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16-17세기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고, 조선에서는 유교식 부계종족과 토착적 기반의 문중을 동일한 제도로 담아내는 절충으로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p715).
따라서 조선은 특히 지방의 경우 통치는 정부의 ‘공적’조직에 기반하지 않고 중앙정부는 지방을 종족제도를 통해 ‘사적 통치 (private governance)’를 하는 사족(士族)집단과 갈등관계에 있었고 지방의 사대부, 즉 사족들은 종족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신분과 이익을 지켜냈다는 말입니다.
한국의 경우, 출생과 출계가 엘리트 신분을 상속 가능하게 했지만 , 중국은 이론상 엘리트 신분은 사회적 출신과 무관하게 오직 과거급제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p721).
한국의 이런 출계 기준의 국가와 사회는 엘리트 신분과 비엘리트 신분의 구분을 확실하게 만들었고, 비엘리트 층의 상향이동이 극히 제한된 사회였습니다.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확대된 상태로 서울에 근거를 둔 소수의 경화사족(京華士族)만이 권력에 접근이 가능하고 지방의 사족들도 점점 과거급제가 어려워지게 되면서 이들은 자신의 출계집단과 서원 그리고 유향소 등을 통해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들과 경쟁하고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족들 중에서도 서얼(庶孼)들은 적서차별의 벽에 막혀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고 향리(鄕吏)들고 출세길이 막혀 결국 지방정치 부패의 온상이 되고 맙니다.
이미 노비들이 실질적인 경제활동의 당사자인데도 사족들의 견고한 기득권에 막혀 착취당해온 내력은 다른 책에서도 다룬 적이 있습니다.
노비는 조선 조정이 필요에 따라 세금을 더 걷기 위해 양인 여성과 노비의 결혼을 용인하기도 하고 농업과 가내 노동력의 필요에 따라 노비는 재산으로서 경제적 가치를 지니기도 했습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조선은 노비들의 노동력 착취를 기반으로 한 경직적인 엘리트 양반위주의 견고한 신분사회였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경직적 신분사회를 만든 엘리트 제도를 존속시킨 건 신유학이 아니라 ‘토착적 친족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합니다(p727).
그리고 조선의 신분제가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갑작스럽게 폐지되었으나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는 신분의식은 민주주의 국가라는 현재의 한국사회에도 아직도 스멀스멀 살아있다고 느낍니다.
아직도 학벌에 목매고 고시출신들 실력에 관계없이 실력이 있다고 믿는 세태가 신분제의 긴 그림자가 아직 한국사회를 배회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네요.
끝으로 이 책의 외형적인 구성을 보려합니다.
본문만 총 729쪽의 벽돌책으로 총 14장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신라부터 조선말인 19세기까지 다루지만 주로 조선 중기가 중심으로 생각됩니다.
저자가 2015년 Harvard에서 출판한 영문본을 너머북스에서 2018년 번역한 책입니다.
책을 보면 저자가 안동과 남원 등지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들이 가득합니다. 저자가 오랜시간 한국을 탐구한 자료들이 집대성한 책이라는 느낌이 듭니다.